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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숨은 주역(4)

신한청년당 결성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 주제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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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8.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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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숨은 주역(4) 신한청년당 결성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 주제발표 


몽양 여운형- 3.1운동의 불씨를 지피다
김규식의 파견 결정과 동시에 몽양 여운형은 당원들을 국내외 각지로 파견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 조선독립에 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전 민족적인 궐기를 촉구하였다. 당원의 파견은 1919년 1월 중순 무렵부터 추진되었고, 여운형 자신도 1월 20일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출발했다. 이것으로 보아 이러한 활동은 김규식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 결정과 동시에 계획 준비된 것이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여운형은 조선동포가 거주하는 각지에서 동시에 2.8독립선언이나 3.1독립선언 같은 것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획하고 준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각지 파견의 목적 중에는 김규식의 파리행과 그곳에서의 활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도 있었다. 


신한청년당원들은 조소앙, 장덕수 등은 일본으로 파견되어 조선유학생들의 궐기를 조직하였다. 또 김철, 서병호, 선우혁 등은 국내로 파견되어 이상재, 손병희, 이승훈 등의 민족지도자들을 만나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만세운동을 촉구하였다. 한편, 이광수는 중국 내 각지로 파견되었으며, 여운형 자신은 만주의 장춘과 하얼빈에 들렸다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체제 기간으로 보면 약 1달 정도 되는 기간에 몽양의 강연은 연해주와 간도, 블라디보스톡 등의 동포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실제로 3월 8일과 13일에는 용정촌을 시작으로 만주 한인의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3월 17일에는 니콜리스크에서 시작되어 연해주 한인의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그곳 체재기간 동안 여운형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고, 해당 지역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노력한 결과, 1919년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이 발표되었고, 국내에서는 3.1독립선언이 공표되었다. 또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1919년 내내 한반도 전역에서 만세시위운동이 끊이지 않게 되었고, 이러한 시위운동은 해외 동포사회로도 이어졌다. 

이렇게 볼 때,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이야말로 3.1운동의 불씨를 지피고 기획했던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으로 독립운동 진영 안팎에서 여운형의 위상은 상당히 높아졌다. 

만세 시위로 조선이 독립을 쟁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국내외 전체 민중에 의한 독립만세의 물결은 이로부터 25년 뒤 제 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세계열강이 조선의 독립문제를 논의할 때 각국에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확인시켜주는 주요한 근거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이 3.1운동에 미친 공로에 대해서는 당시 상해임시정부와 각지의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8월 26일 자 기사에는 여운형이 크레인에게 보낸 청원서가 첫 발단이 되었으며, 신한청년당 김규식, 장덕수, 여운형 등을 프랑스와 일본 도쿄를 비롯해 간도 연해주 및 국내로 파견한 것이 표면상 정숙했던 삼천이레 장차 일대풍운이 일어날 징조였다고 서술하였다. 오늘날 학계에서도 이에 대해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에 미친 영향을 자못 컸다.
-3.1운동 발발의 진원지는 상해 신한청년당이었다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연인원 2백만명이 참가한 3.1운동은 국망 이후 10년 간 침잠되어 있던 민족의 에너지를 표면으로 끌어낸 대사변이었는데, 여운형의 청원서는 이러한 민족적 에너지의 대폭발을 초래한 중요한 기폭제가 된 것이다. 등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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