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1-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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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의의(上)

[기고]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의의(上)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3~5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3.1운동은 신분, 사상, 종교를 넘어선 우리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투쟁이었다. 또한, 3.1운동은 4월 11일 임시정부 설립으로 이어졌고 비로소 헌법이 만들어지게 됐으며, 헌법에는 모든 권력의 주체가 국민임이 명시됐다.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3.1운동은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3.1운동은 종교를 넘어서,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신분을 넘어서 하나가 된 일대 거사라고들 한다. 3.1운동 이후인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정부는 헌법을 제정하고, 헌법에는 그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지향했던 나라, 조선이 원했던 나라가 명시돼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 그런데 과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이 가슴에 절절하게 다가올지는 알 수 없다. 100년 전에는 어떠했을까? 당시에 거리에 나와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 일본헌병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2천만 우리 국민들은 총칼 앞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500여명이 넘게 죽고, 2만여 명 가까이 부상을 입었는데도 3월에서 5월까지 계속 됐다. 무엇이 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총칼의 위협을 넘어서게 했을까? 1910년 황제가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넘기더니, 일본이 왕이 돼 거리에서, 학교에서, 사람이 모이는 모든 곳에서 걸핏하면 잡아가고, 죽이고 때린다. 쌀도 빼앗고, 산에서 긁어다 때던 나무도 빼앗고, 농사에 필요한 물도 빼앗는다. 나중에는 말도 빼앗고, 이름도 빼앗았고, 거의 모든 물자를 빼앗더니 문화 또한 착실하게 뭉개버렸다. 그렇게 10년을 살았는데, 나라를 내 준 황제가 죽었고, 황제가 준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국민이 일어섰다. 독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황제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고 선언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3.1운동은 위대한 평민의 거사였다. 한 줌도 안 되는 양반의 세상에서 90퍼센트의 평민이 상놈이 아니라 국민이 되기 위한 거사였다. 대한독립만세는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는 말의 다른 버전이었다.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를 원했던 평민의 외침. 민주주의를 원했던 평민의 바람이 일으킨 폭발력이 전국으로, 전 세계 모든 동포에게로, 그리고 3월에서 5월로,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반상을 뒤집은 평민들이 선언한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독립선언서 첫 문장의 키워드는 그래서 ‘독립’과 ‘자유’다. 마치 현재완료형처럼 자유민들은 독립이 됐다. 독립된 나라는 정부가 있고, 헌법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여느 나라처럼 군대도 만들고, 행정부도 만들고, 국회도 만든다. 국회는 최초로 헌법을 만들어서 제일 앞장에 반상이 아닌 국민의 정부임을 명시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주인이 바뀌고, 그것이 법으로 인정됐던 것이다. 3.1운동의 위대함은 평민의 거사였다는 점과 실제로 상해임시정부와 헌법제정을 통해 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독립기념일이다. 이러한 3.1운동에는 숨은 주역들이 있다.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신한청년당을 조직해서 파리로 보내고, 동포들이 있는 곳곳으로 보내 김규식을 응원하자고 제안한다. 3.1거사의 기폭제 역할을 한 몽양 선생과 신한청년당은 100주년을 맞으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손병희 선생도 있다. 선생은 국내 3.1거사의 여러 계통성을 하나로 통일시킨 주역이다. 자본금도 거의 선생한테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2017년 만주 길림에서 조소앙 선생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의 바탕엔 바로 평민들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결연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결과적으로 3.1운동의 진정한 주역이 되었다.1919년 위대한 평민들의 독립과 자유의 함성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고, 2019년 100주년을 맞이했다. 100년 전 독립을 원했지만 아직도 반쪽인 우리는 이제 평화의 새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끝 하보균 양평 3.1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2)- 그래서 선거법개정이 필요해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2)- 그래서 선거법개정이 필요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란? 정당 지지율만큼 국회의원이 생긴다. 예를들어 국회의원이 300명일 때 한 정당이 3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면, 연동형 비례대표 국회의원 9명이 배출되는 방식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금처럼 노동자가 죽어가는 노동조건을 진정으로 노동자 편에서 대변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지난 6.13 지방선거도 있었지만, 군수든 군의원이든 한 명에게 표를 몰아줘야 된다는 “고민”이 있고, 실제로 연대를 하면 표가 분리되지 않고 당선될 확률이 높아진다. 야당이 둘로 나뉘어서 졌다는 말이 나온다거나, 삼자구도가 여당에세 유리하다는 분석이 당연했던 이유이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적용되면- 각 당에서 골고루 국회의원이 배출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소수정당인 야3당이 적극적이다. 국회의원을 300명으로 놓고, 3퍼센트면 9명, 5퍼센트면 15명, 10퍼센트면 30명의 국회의원이 비례로 되는 것이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 것이다.   승자독식 지금의 선거제도는 아무래도 1등이냐, 꽝이냐는 방식의 독점구도이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적용하면, 내가 찍은 사람이 1위 후보가 아니어도 한 표, 한 표가 유의미하다. 그야말로 소중한 한 표가 말이 아니라 현실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될 놈 찍는다거나, 하나로 밀어야지 갈라지면 죽는다거나, 그래서 결국은 양당구조가 되고 정치적 다양성이 사라져서 국민의 고충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무능국회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것이라 하겠다.   상상 이상의 연대 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막아보자는 것인지 민주당과 자한당이 손을 잡은 모양이다. 그걸 막자고 정의당 이정미 대표와 바른정당 손학규 대표가 국회에서 단식을 하고 있다. 벌써 일주일인지, 9일 정도 됐다. 손학규 대표는 소신을 위해 죽어도 좋다는 강력한 표현도 서슴치 않았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인데, 손학규 대표는- 촛불로 일어선 민주당이 촛불로 망한 자한당과 손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더민주당의 대선 공약이었다. 민주당이 집권을 한 이후에 말을 바꾼다는 비난을 면치 못 할 것으로 보인다.   양평에도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지지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런데 그냥 검은 것은 글자인 듯 내 삶과 연결되는 지점 없이 바람에 나부끼는 듯하다. 하지만 잠깐만 생각해보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되면 양평군에도 비례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양대정당에 이어 지지율이 5-10퍼센트 사이를 오가는 정의당의 경우,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된다면 15명에서 30명 이내의 비례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은 양평에 국한해서 생각해도 적지 않은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불러올 수 있다. 양평에만 국한해서 생각해도 진보 대 보수라는 양대구도가 훅- 무너지고? 무조건 큰 정당은 살고, 작은 정당은 맥을 못 추는 경향도 희박해질 것으로 보인다. 즉, 다양성이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양하면 그 중에는 노동자가 노예가 아님을 법으로 보여주거나, 농민을 국가의 근간으로 보고 농민에게 정당한- 독일처럼 년 2000만 원 이상- 연봉을 지불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회의원도 나올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일 하다 죽는 나라, 더는 볼 수 없다면- 휘날리는 현수막 속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가슴으로 받았으면 좋겠다. 총총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1)- 누구를 위한, 누구의 나라일까?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1)- 누구를 위한, 누구의 나라일까?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일 하다 죽는다. 일 년이면 백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일 하다 죽는다. 이들은 대부분 통계에도 적용되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다. 그런 가운데 한 청년노동자의 죽음이 통계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그림자의 실체는 바로 ‘당신’의 아들이다. 어머니도 모르는 참혹한 노동 조건 속에서 당신의 아이들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의 참혹한 죽음- 입사 두 달 만에 숨진 청년노동자 김용규 씨는 24세이다. 김용규 씨는 사망했지만, 그리고 이미 여러 명의 서부발전 소속 노동자들이 일하다 죽었지만- 정작 태안화력발전소는 정부로부터 무재해 사업장으로 인정받고 산재보험료 20여 억 원을 감면받았다. 김용규 씨가 태안화력발전소 소속이 아니라 외주업체인 서부발전 소속이기 때문이다.   외주화는 민영화의 산물이다. 서구의 파트타임을 흉내 내서 비정규직이라는 실로 기상천외한 노동자 학대를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그보다 한 수 위인 외주화에 이르렀다. 그런 것이 아니어도 이미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급여는 박하기 그지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은 “아래것”들에게 시키면서 박한 처우와 고용불안을 강요하는 신분제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를 보는 듯한, 일제 강점기를 보는 듯한, 아니면 군부독재시절을 보는 듯한, 통칭 보수정권시절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전체에서 10퍼센트만 벗어나면 다들 형편은 비슷하다. 10퍼센트가 우리 재화의 90퍼센트를 쥐고 있다는 통계들이 있다. 100명 중 90명의 사람들은 100개의 재화 중 단 10여개만으로 나눠야 한다. 이런 이상한 상황은 이미 민란이 일어나고도 넘어야 하는 통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못살겠다고 일어난 민란은 정치권력의 교체만 가져왔을 뿐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역대 어느 정권도 바로 이런 신분제 같은 노동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이런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가진자들과 권력이 절대로 소득을 나누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박정희가 선성장, 후분배를 구호처럼 외쳤지만- 이미 세계경재 10대국이라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선성장 중이다.   앞으로도 후분배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귀족, 사대부와 양반층이 굳이 노비를 해방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역사적으로 놀랍게도 양반층이랄 수 있는 사회 지도층이 신분을 내려놓은 사례는 있다. 그것이 바로 3.1 만세를 폭발력 있는 대중운동으로 확산한 물밑정서라고 생각한다. 임시정부 헌법이 말하듯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3.1만세 정신을 모르고 있다. “우리”가 권력의 주체라는 것을 모르고, 아직도 신분제가 사라진 줄 모르고 있는 귀족 양반 사대부들한테 90퍼센트를 상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노예처럼.   자신이 주인인 걸 모르는데, 누가 주인대접을 해주겠는가? 그러니 선성장은 있어도 후분배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월급이 신분인 대한민국에서 대부분 월 200만원 이하의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은 주인인지, 아닌지를 따질 시간도 없이 살고 있다. 그리고, 내 자식이 그보다는 더 많이 받는다고 딱히 좋아할 일도 아니다. 대부분의 하급직들은 여전히 상전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 돈 주는 사람은 규모에 상관없이 귀족이고자 한다.   어쨌거나 사람이 일을 하다가 죽고 있다. 해마다 150명 안팎이다.- 일 하다 죽는 나라, 대한민국. 사회적 통계 상 90퍼센트의 국민이 그런 삶을 강요받고 있다고 해도 허언이 아닐진대,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누구의 나라라는 것일까?   조선만 해도 양반은 노비를 때리고, 가두고, 죽일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법으로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사용자들은 노동자 노비들을 일 하다가 죽게 만들고 있다. 일 하다 죽는 노동자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은 여전히 신분제사회일 뿐, 민주주의도 민주공화국도 아니다.

칼럼, 은혜재단으로 본 양평군수의 개혁 의지

      은혜재단 김종인 재단이사장 측이 재판에서 잇달아 승소하면서 결과가 정의로울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4일 여주지원의 최문경 이사장 직무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지면서- 양평군과의 원만한 해결의 근거로 작동될 것으로 보인다.   양평군은 김종인 측의 잇단 승소에도 불구하고, 3심까지 가야한다는 입장이 주류였다. 하지만, 지난 정권 행정갑질에 진저리를 치는 군민들에게 또다시 1년여의 세월을 감내하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요구일 테고, 결과적으로 새 군수에게 매우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은혜재단 건은 재판 판결문에서도 드러났듯이 부패한 최모 재단 측과 양평군 담당 공무원들의 합작품이라고 하겠다. 재단 내부에서 소송이 진행되는 사안에 군이 개입하면서 기만적으로 김종인 이사장 측을 거꾸러뜨린 사건이다.   지난 정권에서는 상식적인 공적 행위였을지 모르지만, 새정권에서도 잇단 승소에도 불구하고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너무도 명백하게 양평군 공무원의 갑질이 재판에서 드러났음에도 1심으로는 불가하다는 양평군의 태도에 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하여 일부 정당에서도 술렁이던 3일 오전이었다. 이미 동일 사안에 대한 대법 판결에서 승소한 터였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4일, 최모 재단이사장의 직무정지 판결이 나면서 정상화로 가닥이 잡힐 것 같다.   어쨌든, 은혜재단의 정상화가 이루어지고, 정의로운 결과로 귀결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바로 이 모든 사태를 불러온 갑질행정의 주범들이 3일까지도 반성모드가 아니라, 여전히 갑질모드였다는 점이다.   양평군 공무원들은 행정처리를 할 때, 사안의 경중보다는 인맥의 유무 및 관계의 정도를 먼저 따지는데, 지난 10여년간 길들여지고, 이제는 거의 체질화되어 있다. 그들은 군수의 복심과 오더에 거의 바람보다 먼저 눞는다. 자동사인지, 타동사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그래서 더욱 의문이다. 양평군 공무원들이 부패한 재단 측과 거의 운명 동일체처럼 재단 내부의 소송 중에도 개입한 것은 과거라고 하겠으나 이제 시절이 달라졌음에도 계속해서 갑질모드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현역 공무원이 국가를 대상으로 80억에 가까운 사기를 치고, 여러 부서에서 거의 사기와 위조로 재판을 받는 공무원들이 즐비한 양평군이다. 돈 먹는 하마라는 양평공사나 여러 부패의 흔적들이 공공연한 양평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갑질모드를 버리지 않는 공무원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양평군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여전할까? 지난 정권에서 너무 오랜 기간 지친 군민들은 이제나 저제나 양평군수의 개혁의지를 기다리고 있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이미 지쳐있는 군민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행정갑질이 대표 적폐인 양평군에서 군수가 군민의 지지를 얻는 방법론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총총            

[칼럼] 폭염, 재해로부터 양평군은 무엇을 할 것인가?

  111년만의 더위가 찾아왔고,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곧 아열대기후권에 들어갈 전망이라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으로 온열환자가 발생하고, 죽음으로도 이어졌다. 정부는 물론이고, 각 지자체도 이런 기후변화에 따른 행정지원이나 사업방향성 제고가 시급한 것으로 판단된다.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은 비 한 방울 없이 이십여 일 계속됐는데, 이런 기후변화의 주요인은 지구온난화라고 한다. 북극권을 중심으로 고산지대의 얼음이 녹아버린 것이 햇빛반사와 제트기류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우리나라를 포함한 지구의 극지방을 제외한 중간지대에 열대 돔현상을 만들고 있다. 더운기류가 정체되어 있는 우리나라는 태풍마저 빗겨가면서 그야말로 불가마 찜통더위를 겪었다.   우리나라는 동남아시아보다도 덥다는 여름을 맞으면서 채소값이 폭등하고, 과일이 햇빛에 그을려 떨어지는 등 농산물에도 많은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곧 다가올 추석에는 식물이 모든 성장을  멈추었다는 폭염의 피해가 그대로 물가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농업인구가 많은 양평에서도 이런 폭염에 대비한 농산물 생산과 종목 및 기타 제반 여건에 대한 재정비가 절실하다는 점이다. 한편, 줄어들고 있는 벼농사 및 수생산업에 대한 긍정적인 요인도 검토하여 농업관련사업을 조정할 필요가 보인다. 또한 이러한 기후변화는 도심의 열섬현상을 낮추기 위한 노력도 요구되고 있다. 도심에 그늘을 만들 수 있는 가로수 식재나 도심숲조성, 또는 물을 활용하여 도심의 달궈진 기온을 낮추는 노력도 필수사항으로 보인다. 하다못해 염천에 시내 도로에 재활용되는 물이라도 뿌려주는 성의가 여름 집행부의 매뉴얼에 포함되는 일도 기후 변화에 따른 군민을 배려하는 행정이라고 하겠다. 정부는 기록적인 폭염으로 인한 가정 전기료 누진률을 낮추는 등 국민들이 더위를 피해 냉방시설을 이용하는 문제를 자연재해에 대한 국민의 복지문제로 해석했다. 또한 서울시는 아파트 경비실에 에어컨을 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태양광을 설치해주고 있다. 지역에서도 군민이 폭염의 재난에서 기본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행정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그밖에도 행정 전반에 걸쳐 변화하는 기후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서 다른 어느 시군보다 기후변화에 앞서 가는 양평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측면에서 개별 사안이지만, 양평 물축제는 특히 이대로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의 고장 양평에서 폭염과 여름, 그리고 물이라는 조건들은 어떻게 활용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축제준비관계자들이나 도리상 예의상 참가한 사람들이나 준비하다 더위에 죽을 지경이라는 말이 나왔다. 물은 관정에서 1년에 한 번 퍼올린 지하수고, 지역주민에겐 1회적인 축제일 뿐이고, 자신의 삶과 생활과 경제와 소득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1억씩 더위 먹어가며 축제 진행하고, 좋은 소리 듣기 힘들고, 마을 사람들의 참여도도 더위로 인해서 뚝 떨어진 상황에서 양평군은 물축제의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일이야 말로 공론화가 필요한 일인 것 같다. 어느 축제를 가든 장소만 다를 뿐 대동소이다. 이런 경향성에서 벗어나려면 안목과 헌신이 요구된다. 물전문가이자 소통에도 특허 준비 중인 현 집행부 리더의 면모가 내년 물축제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군민들은 지켜볼 일이다.

칼럼. 기자수첩 “평화의 시대”- 몽양 여운형과 양평 패싱

지난 2012년도부터만 보더라도 행정의 달인이라는 군수 아래서 양평군민이 흘린 눈물은 동이로도 부족할 판이다.         군민의 눈물을 부르는 행정 얼마 전에 용문에 사행성 경마장을 지역주민도 모르게 들여오려고 했던 것을 비롯하여, 지금도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은혜재단과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몽양기념관 사태도 있다. 이밖에도 SNS 상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00캠핑장도 있고, 잊혀진 것처럼 보이는 환경미화원 100일 투쟁도 있다. 그래도 거론이 되는 것은 그나마 무언가 저항의 몸짓을 했다는 것이고, 밖으로는 아무 말도 못하는 답답함을 지닌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 중에서 몽양기념관 사태는 역사적이고, 전국적인 인물에 대한 문제이기에 더욱 특이한 경우라고 하겠다.   몽양의 부활 예측 ‘평화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남북정상이 만났고, 이제 곧 북미정상도 만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종전협정 가능성까지 나오고 있다. 한반도에 평화가 오면, 역사적 인물 가운데 가장 주목받을만한 사람이 있다. 바로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몽양 선생의 고향이 양평인 만큼, 몽양의 부활은 양평의 위상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양평이 평화를 상징하는 도시가 될 기회에 관해서는- 수년 전부터 양평의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고갔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3.1운동 100주년이 도래하고, 임시정부와 헌법이 주목받는 상황이 오면- 반드시 몽양 여운형 선생이 부활할 것이라고들 예측했다. 이제는 거기에 예상보다 빠르게 남북과 북미 정상이 만나는 상황까지 겹쳐졌다.   양평군의 갑질행정 그런데 마치 이런 예측에 찬물이라도 끼얹듯이 양평군은 몽양기념관에서 몽양기념사업회를 내몰고, 직영으로 전환했다. 양평군의 직영 전환을 위한 노력(?)은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악착같고. 치밀하고. 지속적이었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소름이 돋는다.   양평군과 몽양기념사업회와의 갈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생산됐지만, 출발점은 양평군 담당자의 사업제안에 대한 몽양기념사업회 측의 ‘거부’였다고 알고 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양평군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람이 함께 하기 어려운 축면이 있다. 이때부터 행정갑질이 도를 넘기 시작하고, 해마다 계약연장을 위해 안간힘을 쓰게 만들더니, 결국은 양평군 뜻대로 기념관에서 몰아냈다.   양평 패싱 평화시대가 열리고, 몽양 여운형 선생이 주목받으면- 덕분에 양평은 위상이 따라 오르는 게 아니라 몽양을 쫓아낸 고향으로 기억될 것만 같다. 몽양 수혜를 누리기는커녕 양평패싱 현상이 생길 전망이다.   몽양의 부활을 예측했기에 더더욱 몽양기념사업회가 내몰리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동안 양평군은 몽양기념관 직영을 통해 어떤 사업을 해냈는지 모르겠지만, 사업회 측은 질적 변화를 위해 노력했고 지금은 현역 국회의원만 14명이 이사로 선임됐다.   양평군이 계속해서 몽니를 부리면, 사업회 측도 손을 놓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양평 패싱의 시작이다. 양평 버리고, 서울로 가면 된다. 서울에도 몽양관련지역이 많고, 워낙 전국적인 인물이어서 사실은 지역 따질 필요도 없다.   양평군이 예산 2억 좀 넘는 기념관을 그렇게 차지하려고 한 까닭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양평군 공무원들 덕분에 “평화시대”의 “양평”은 졸지에 “몽양을 몰아낸 고향”이 될 처지가 되었다.   여야 정치인들의 민낯 2014년부터 지금까지 몽양기념관 사태로 많은 이들을 만났다. 그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정치인들이 그대로 자기 민낯을 공개한 시간들이었다.   그 많은 정치인 중에 단 한 사람만이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받아주었다. 피켓을 든 적도, 앞에 나선적도 없지만- 공정한 자세로 몽양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동의했다. 양평에 그런 정치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이 인터뷰를 하면서도 굉장히 위로가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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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기념 인터뷰

3.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두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양평군 토박이 정 복동 어르신입니다. 1930년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배잔 마을에서 태어나 결혼 전까지 그곳에서 사셨고, 해방 후 결혼하여 보금자리를 튼 양평읍에서 현재까지 거주중입니다.      기자 : 양평군 토박이라 들었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나셨나요?    정복동 : 나는 대평리에서 태어났어요. 대평리 알죠? 작은 오막살이에서 태어났어요.    기자 : 그럼요, 대평리 잘 알죠. 대평리에서 어린 시절 겪었던 기억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정복동 : 우리 어머니가 딸만 넷을 낳고 다섯째로 아들을 낳으면 저 동산에 가서 춤을 추겠다 그러셨대요. 그리곤 동생이 태어났죠. 그때 나는 멀리 밭에 일하는 아버지한테 점심도 갖다 드리고 새참도 나르고 그랬어요. 어느 날, 아버지에게 참을 날라다 주고 집에 오니까 울어머니하고 동생하고 마루에 걸터앉아 울고 앉았어. 왜 우냐고 하니까 동생이 밥을 먹고 싶은데 죽을 주니까 먹기 싫다고 울고 있다 하더라구요. 동생은 먹기 싫다고 울고 엄마는 그런 동생이 안되서 울었던 거야.    기자 : 그때 몇 살이셨죠, 동생과는 몇 살 터울이었나요?    정복동 : 나는 그때 열세 살쯤 됐을 거에요. 동생이랑은 여섯 살 터울이었어요. 그 동생이 얼마 전 저세상으로 갔어요.   기자 : 그러셨군요... .... 대평리에서 농사를 지으셨나요?    정복동 : 그럼요, 농사를 지으면 배급을 줘요. 친구는 콩깻묵을 받았는데, 나는 그걸 못 받아서 그땐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기자 : 콩깻묵이요?    정복동 : 네, 콩기름을 짜고 남은 게 콩깻묵인데 친구가 먹으라고 줘서 막상 먹어보면 아주 못 먹겠더라구요. 농사를 지어도 죄다 뺏어가니까 곡식을 감춰요. 죽담이라고 담장 뒤에 독을 묻고 거기에 곡식을 감춰요. 그러면 일본 앞잡이들이 쇠꼬챙이로 담벼락을 푹 쑤셔요. 그럼 흙담이 쑥 들어가거나 독에 묻지 않은 곡식이 쏟아져 나와요. 그럼 다 뺏어갔죠.    기자 : 콩이나 조, 수수 같은 곡식도 농사짓고 또 어떤 작물을 농사지으셨어요?    정복동 : 그때 왜정 때 목화를 심으래요. 목화를 심어서 공출을 해라 그래요. 그러고 나서 목화 나무껍데기를 삶아서 벗겨 바치면 돈 얼마 주고 그랬죠. 얼마나 일본에 들볶였는지 나는 해방이 되어야 시집가겠다 그랬어요. 해방이 안 되면 시집가지 않을 거다 그랬어요. 지금 이 집이 내가 시집온 곳이에요. 나는 진짜 말대로 해방되고 열아홉에 시집왔어요.    기자 : 애써 농사를 짓고서도 뺏길까봐 곡식을 숨기고, 정작 가족들이 배곯고 고단했는데 어떻게 인내하며 사셨는지 말씀해 주셔요.    정복동 : 어머니가 봄이 오면 칼나물을 논두렁에 가서 해와요. 나물을 넣고 밥을 비비면 어머니가 얼른 수저를 놓아요. 나 많이 먹으라고... (한참 있다가) 우리 어머니가 막내 낳을 적에 내가 쌀을 퍼서 몰래 바가지에 감추어 두었어요. 어머니 해산밥 해주려고.    기자 : 그 힘들고 배고팠던 때 어린나이에 참 철이 들었네요.    정복동 : 네, 어머니가 옷이 없어 날마다 행주치마를 빨아 입는 걸 보고 내가 시집가면 어머니 옷 한 벌 해드려야지 그랬어요. 손이 다 닳도록 일을 했죠. 다리방아 아시지? 보리를 다리방아로 찧어 마당에 말렸다 까불러 벗겨야 밥을 해먹어요. 그럼 손이 다 닳아요. 그때 어머니가 힘들까봐 안타까워서 내가 다 방앗간으로 날랐어요. 불을 화르륵 때면 방이 뜨뜻해야 하는데 서늘해지면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시집가면 우리 어머니 뜨뜻하게 살게 해드려야지.’    기자 : 어머니의 자식사랑이 극진하여 또 자녀들의 어머니 사랑도 애틋했나 봐요.   정복동 : 동생이 학교에 갈 때 어머니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생 모습이 모퉁이 뒤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서야 집에 돌아와 밥을 자셨어. 한 삼십분이 지나도록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서 계셨어. 대평리에는 과부 딸이랑 외딸(외동딸)만 학교에 다녔어요. 나도 얼마나 학교에 다니고 싶었는지 몰라요. 언니랑 나랑 그때 일본어를 배우면 내가 금세 깨우쳤어. 나를 공부 시켰으면 참 잘했을 거야. 그때 학교에는 못 다녀도 검은 양말(검은 스타킹)이 너무 신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짚새기(짚신)를 삼아 달라 그랬어. 설날에 명으로 지은 새옷을 입고 짚신을 곱게 삼아서 신고 나갔다 오니 양말 뒤꿈치가 다 구멍이 났어(말씀하시며 소녀처럼 까르르 웃으심^^)   기자 : 일본이 식량을 공출시키고 다른 노역도 시켰을 텐데 대평리에서는 어땠나요?   정복동 : 가마니를 치라고 배당을 줬어요. 우리는 농사를 짓는다고 100장이 분담이 돼요. 면에서는 밤에 일할까봐 조사가 나와요. 할머니가 들킬까봐 까만 치마를 두르고 빛이 새나가지 않게 일을 했어요. 언니하고 나하고 같이 하루 종일 일해도 가마니 세 짝밖에 못 짜요, 나는 매달린 채 배고픈 채로 일을 해요. 가마니를 다 짜면 아버지가 꿰어서 마무리를 지어요. 그럼 1등, 2등, 3등까지 차별적으로 돈을 줘요. 그걸 지고 대평리에서 지평에 가요. 그때는 차도 없어서 걸어서... ... 아버지가 불쌍해요. 우리 아버지 세 살 먹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우리 할머니가 과부로 아버지를 키우셨어. 할머니가 이천이 친정인데 잘 살아서 아버지에게 돈을 줘서 대평리에 땅을 샀지.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일만 하니까 농사짓는 거밖에 모르셨지.   기자 ; 정복동 어르신의 일제 강점기 살아온 얘기를 듣다 보니 가족에 대한 안쓰러움과 애틋함,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 느껴져요. 지금도 참 고우시고 건강해 보이셔요.   정복동 : 아유 나는 기운이 없어요 이제. 아유 내 정신좀 봐. 차를 드린다 해놓구선.    정복동 어르신이 준비해 주신 구수한 차를 마시고 귤도 하나 까먹고, 또 손바닥에 쥐어준 커피사탕도 받아 계단을 내려오며 과거와 현재가 정복동 어르신 내면에서 생명력 있게 작동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3.1운동 100주년기념 인터뷰

대한민국 역사상 짧지 않은 기간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그 시대를 살아낸 분들이 점차 귀해지는 시점에 2019년 3.1만세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양평토박이신문사에서는 양평지역내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갖고자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김옥순 :1931년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에서 태어나 서울(마포, 답십리)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여주와 양평지역에서 70여년 거주, 현재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 구둔역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옥순이는 참 이뻐, 언제 이렇게 언문을 배웠어?'' 이러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더라구요. 그게 얼마나 애절한 마음을 나타낸 거에요. 뭐 나를 봐서 눈물이 났겠어요. 어쩌다 한국사람이 한글도 마음대로 못 가르치고 속국이 되어 이러나 하는 마음에서였겠지요.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나도 눈물이 나요.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기자 : 일제강점기에 유년시절을 보내셨는데 기억나는 구체적 경험을 말씀해주시겠어요?   김옥순 : 제가 그때 아홉 살인지 열 살인지 좀 늦게 학교에 들어갔어요. 왕십리에 있는 배명소학교였어요. 지금은 배명중고등학교가 되었지요. 답십리에서 살았고 교통편이 별로 없던 때라서 왕십리까지 걸어다녔죠. 그때 고무밴드 공장이 있었던지 먼지구덩이, 쓰레기장 같은 곳을 지나 다녔어요. 그 길이 지름길이었거든요. 학교 가는 길에 고무밴드를 주워 손목에 걸고 다녔어요. 그 이후 전철이 다녀서 학교에 가려고 전철역에 줄을 섰어요. 그 당시 일본아이들은 짧은 주름치마를 입고 스타킹을 신고 테두리가 있는 아주 예쁜 까만 구두를 신고 단발머리에 가방을 딱 메고 다녔죠. 우리 조선아이들은, 그때는 조선이라고 했어요, 긴 검정치마에 자주저고리, 머리도 부성하고 보자기에 책을 메고 다녔죠. 우리가 먼저 와서 줄을 서잖아요. 그러면 일본 아이들은 나중에 와도 구두 신은 발로 여기를 차요(발목과 무릎 사이 정강이를 가리키며) 그럼 아주 아프지 그냥... 여기를 팍 차며 ‘’아따야로‘’하면 막 울면서 뒤로 갔죠. 어린 나이에도 울면서 생각했죠. ‘ 왜 우리가 일본아이들이랑 같이 살아서 이럴까’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걸 표현을 못했어요.   기자 : 그런 일이 있을 때 대응하거나 방어하는 한국 학생들은 없었나요?   김옥순 : 아니요. 아무도 그러지 못했어요. 맞고 울면서 길을 비켜주고 뒤로 가 줄을 섰어요. 속으로 억울하고 아파서 울어도 그렇게 할 줄을 몰랐어요.   기자 : 학교에서는 주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말을 했죠, 학교에서의 기억을 나눠주시겠어요?   김옥순 : 저는 외할아버지가 한문도 가르쳐주고 언문도 가르쳐줬어요. 그때는 한글을 언문이라 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한글을 깨치고 학교에 들어갔어요. 한번은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아주 어머니 같은 분이셨어요. (잠시 회상하듯이) 아주 인자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 . 그분이 애국자에요. 그때 한국말을 하면 막 혼이 났어요. 일본말을 잘 못해도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한글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어요. 어느 날 나를 불러내더니 ‘’옥순이는 참 이뻐. 언제 이렇게 언문을 배웠어?‘’이러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더라구요. 그게 얼마나 애절한 마음을 나타낸 거에요. 뭐 나를 봐서 눈물이 났겠어요, 어쩌다 한국 사람이 한글도 마음대로 못 가르치고 속국이 되어 이러나 하는 마음에서 그러셨겠죠.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나도 눈물이 나요.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기자 : 그 마음이 언제쯤 헤아려지던가요?   김옥순 : 애들 키우고 애들 학교 다닐 때는 몰랐어요. 애들 다 커서 내 곁을 떠나고 혼자 있을 때 문들 그 생각이 났어요.   기자 : 학교 분위기는 어땠나요, 혹시 일본인이 감시하거나 그런 일도 있었나요?   김옥순 : 배명소학교에서 여주로 이사와 북내에 있는 학교에 다녔어요. 시골이라 그런지 일본인이 감시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일본말을 잘 하면 사쿠라 뱃지를 하나씩 달아줬어요. 벚꽃이 일본 나무라는 말이 있어요. 되지도 않는 일본말을 열심히 배우려고 기를 쓰고 그랬죠. 누군가 조선말을 사용하면 서로가 ‘’얘 조선말 쓴대요.‘’ ‘’얘 조선말 썼어요.‘’서로가 그랬어요. 지금 같으면 안 그러지. 서로 숨겨주고 가려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기자 : 한참 성장기에 음식도 귀했을텐데 먹거리는 어땠나요?   김옥순 : 땅을 좀 사서 농사짓는데 벼농사를 지으면 다 뺏어갔죠. 밭작물도 맘대로 못 심었어요. 목화를 심어야 했어요. 전쟁의 막판으로 치달을 때였죠. 놋숟가락, 놋그릇까지 다 가져가고 농작물도 모조리 공출했어요. 학교 다니며 공부도 거의 못하고 모심고 풀베고 주로 일을 했지요. 먹을게 없어서 많이 주렸어요. 쑥을 캐다가 쌀을 요만큼(손바닥을 오므려 보이시며) 넣고 쑥을 많이 넣어 쑥밥을 해요. 이게 목에 걸려 넘어가질 않아서 토하곤 했죠. 감자를 심으면 감자가 클새가 없어요. 학교 갔다와 배가 고프니까 감자가 클새도 없이 캐어먹었죠. 배 많이 곯았어요. 여기(여주) 내려와서요.   기자 : 그럼 소학교 이전 더 어린 시기는 어디에서 보내셨나요?   김옥순 : 어려서는 함경북도 두만강 근처에서 살았어요. 거기에서 태어났어요. 일정 때 먹고 살기 힘들 때 만주 어디를 가면 땅도 거저 얻고 농사도 맘대로 짓고 산다고 했죠. 그 당시 양반들은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막노동은 꺼려했어요.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와 동네 청년이었던 아버지를 데리고 거기로 갔죠. 두만강 무산 삼장(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이란 곳에서 비단장사를 했어요. 어릴 때 기억이 생생해요. 가게를 아주 크게 차리고 각종 잡화가 많았죠. 두만강이 겨우내 얼었다 녹으면 집채만한 얼음이 위에서부터 엉켜서 내려와요. 강가에 있던 가게까지 얼음덩어리가 넘쳐서 가게 물건이 다 쓸려간 일도 있었어요. 외할아버지는 거기서 돌아가시고 이모는 두만강 근처 다리를 건너 중국으로 넘어가 아주 그쪽 사람이 되버렸죠. 지금도 두만강 그 푸르던 물이 기억에 생생해요.   기자 :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마포에서 잠시 살다가 답십리를 거쳐 여주까지 오신 거네요. 그리고 지금은 양평에 살고 계시구요.   김옥순 : 그렇지요. 두만강에서 가게가 몇 차례 떠내려온 얼음덩어리에 피해를 입고 마포로 왔던 거에요. 가게서 번 돈으로 집을 두 채 샀어요. 길가에 있던 집이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다 비키라고 하는 바람에 답십리로 갔어요. 그리고 여주로 와서 가장 고생이 심했죠. ‘일본 순사’라고 들어봤지요? 기다란 칼을 허리춤에 차고 무릎까지 오는 신발을 신었는데 걸으면 저벅저벅, 칼이 덜컹덜컹 소리가 나요. 저기만 오명 아이들이 ‘’얘 순사 온다‘’ 소리쳐요. 그러면 얼른 뛰어가 숨어요. 길을 가다 경찰서를 지나다 보면 기다란 막대기로 한국 사람들을 때리는 것도 봤어요. 우리 시대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에 이어 식민치하와 전쟁으로 고생이 많았어요.   기자 : 그 어렵고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에도 훈훈한 추억담이 있으시죠?   김옥순 : 그럼요, 주암에서 북내 학교까지 가려면 몇 십리는 족히 될 거에요. 아버지가 짚새기(짚신)를 삼아주면 그게 하루를 못가요. 게다(나막신)는 어찌나 발이 아프고 무거운지 몰라요. 나무 조각에 못 박아 놓으면 얼마 안 되어 끈이 다 벗겨져요. 불편하고 발 아파서 밤낮 벗어들고 맨발로 다녔죠. 그래서 내가 건강한 거 같아요. 어쩔 때는 달 보고 나가 해지고 깜깜해서 들어왔어요. 학교가는 길에 언덕을 지나며 ‘’우우~~‘’ 하고 신호를 보내면 ‘’우우~~~‘’ 하고 친구가 화답을 해요. 그러면 만나서 같이 학교에 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밤나무에 올라가 밤을 따먹고 놀았죠. 그 먼 길을 고생으로 안 알고 재미로 알았어요.‘’   기자 : 해방의 기쁨은 어떻게 누리셨는지 들려주세요.   김옥순 : 3학년 때 해방이 됐을 거에요.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인제 너희들 모도 안 심고 호미도 버리고 낫도 다 버려라. 해방이 되었다.‘’ 그러시죠. ‘’해방이 뭐에요?‘’ 그러자 ‘’일본놈들이 전쟁에 져서 다 쫓겨가 우리 이제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거야.‘’모두들 ‘’야 좋다 해방이다‘’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질렀어요. 내가 그때 열세 살인가 열네 살 때였어요.‘’   김은주 earlyhummi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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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 간 양평의 독립운동가

<응답하라 해외로 간 양평의 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 박 준 현   -목 차- 1. 머리말 2. 해외로 간 독립운동가들-박동완과 한봉철(한진)  1) 박동완 목사의 재만한인 지원과 미국행  2) 한봉철의 독립운동-만주로의 진출 3. 미국에서의 독립운동-변준호의 무장투쟁론에 대하여  1) 성장과 미국으로의 이주  2) 다시 무장투쟁론으로  3) OSS NAPKO PROJECT와 해방 이후의 삶 4. 맺음말     1. 머리말    1920~30년대의 일제가 펴낸 대표적 잡지 중 하나인 [朝鮮及滿洲]에서 경기도 일대를 개괄한 소개한 글이 있다. 그 중 양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북으로는 가평, 서로는 양주, 동으로는 강원도가 연결되어 있다…동부 및 한강 유역으로 가는 배들은 대부분 양평을 거쳐야만 한다.’ 이렇게 양평은 수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면서, 육로와 수로가 겹치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변화가 전파되기 위해서는 교통의 편리함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 기사대로 양평은 과거부터 정치·행정·군사 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선조 때 柳成龍의 감독 하에 지어진 파사산성이 좋은 예이다. 이 산성은 상류 요충지로 지정되어 수도 방위 임무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양평은 한강유역을 방어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양평은 이른 시기부터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될 자양분을 얻기 유리한 위치에 놓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양평은 구한말 시기에 의병운동의 중요거점으로 이름을 알렸다. 양평이 의병운동에서 중요한 격전지가 된 이유에 대해 선행연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양평 의병은 1896년에 화서학파의 이춘영·안승우가 조직한 지평의진이 유인석의 휘하에서 핵심으로 활동했고, 1907년에는 용문산을 근거지로 한 권득수·조인환의 의병조직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지정학적으로 용문산이 자리 잡고 있어 유격전에 유리했다. 때에 따라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는 은신처가 되었다. 그리고 홍천-여주로 연계할 수 있다는 교통적 특성으로 의병 모집·보급에서도 상당한 강세를 보였다. 실제로 일본군은 양평 의병의 기세를 꺾기 위해 용문사에 숨겨둔 의병의 물자를 색출해 파괴했다. 워낙 의병운동이 거세게 전개된 지역이라 양평 출신의 유력한 독립운동가들은 이른 시기부터 계몽운동에 투신하거나, 강력하게 일제에 항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양평은 국내 활동을 넘어 해외로 진출하여 독립운동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다. 대표적인 인물을 정리하면 몽양 여운형, 그리고 3.1운동 33인 중 한명인 박동완 목사, 양평 3.1운동에 적극참여하고 이후 만주로 넘어간 한봉철, 그리고 미국에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위원장을 역임한 변준호를 손 꼽을 수 있다.  위 언급한 네 명의 지사는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실제적 투쟁을 추구했다. 탁상공론에 머물지 않고 현장에 뛰어 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진보적인 시각과 주의를 견지하고 있었다.  오늘의 주제가 해외로 넘어간 양평의 독립운동가라는 초점에 맞추어 그 동안 몽양에 비해 활동상이 덜 알려졌던 박동완과 한봉철(중국, 만주)의 활동을 간략히 정리하고, 가장 먼 미국에서 여생을 보낸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장 변준호의 무장투쟁론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2. 해외로 간 양평의 독립운동가-박동완과 한봉철(한진)  1) 박동완 목사의 재만한인 지원과 미국행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으로 3.1운동에 참가한 근곡 박동완(1885. 12. 27~1941. 2. 23)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에서 출생했고 본관은 함양이다. 그의 가계는 아버지대부터 조선 후기 양반가에 속했다. 그 또한 어릴 때부터 서울에 유학하여 한학을 기반으로 근대 학문을 빠르게 접했다. 특히 배재학당에서 수학한 시절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3.1운동 당시 체포된 기록에서는 예수북감리교 전도사로 표기되었다. 기독교 대표 중에 한명으로 3.1운동 당시에도 큰 영향을 받았던 박동완은 3.1운동 이후 한동안 [기독신보]와 [신생명]주필로 활동했다.  그런데 박동완은 단순한 목회자로서 교인을 양성하는데 머물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힘으로 무기력에 빠진 조선사회를 구원해낼 것으로 믿고, 민족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따라서 3.1운동 이후 문화통치 시절에도 일제의 허황된 정책을 믿지 않았으며, 조선사회과 당면한 문제점을 기독교정신의 바탕에서 해결하자고자 했다. 박동완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당시 유행했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모두 뼈있는 비판을 가했다.    자본계급과 노동계급에서 일어나는 사회투쟁은 서로 상조하는 정신과 사회봉사의 근로적 정신이 일어나서 자본주의자는 사리와 사욕을 채우는 불완전한 사회조직을 변경하며 노동계급은 투쟁으로서 파괴만을 주장하지 말고 진실로 이타주의의 상애정신이 내측으로부터 진인간성을 발군할진대 사회에는 계급투쟁이 없는 이상적 새 사회를 이룸에 이를 것이라 하노라.    이 글에서 보이듯 박동완은 보통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일방적인 자세로 서로를 비난하는 것을 지양하고, 양 사조가 가지는 배타성에 대해 비판하며 상생을 추구했다. 또한 박동완은 1920년대 중반부터 민족협동전선 논의로 탄생한 신간회 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면서 기독교계 인물 중 손에 꼽을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다.  1920년대 후반에 일제의 만주 침략이 노골적으로 가시화되면서 만주에 있는 한인들의 박해 문제가 대두되었다. 박동완은 이미 1927년 12월 9일 ‘재만한인옹호동맹’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후 한인 권익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실제로 만주 봉천과 길림지역으로 답사를 떠나 실태를 조사했다. 이때에 박동완은 천도교계의 김기전과 사회주의 계열의 홍명희 등과 함께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어떤 특별한 계파에 구애 받지 않고 사회활동의 측면에 있어서 항상 연대를 같이했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성향을 근거로 전개된 그의 국내 활동은 1920년대 후반까지도 지속되었고, 이러한 활동은 그가 하와이로 활동 근거지로 옮긴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는 1929년 10월 8일 하와이에 도착, 국내에서 흥업구락부와 연관된 인연으로 동지회 계통의 독립운동에 헌신한다. 하와이 이주 후 박동완은 오하후 섬에서 목사로 재직하면서 한인 2세들의 국어교육에 힘을 썼다.   오하우섬 농장 각 곳에도 우리 국어학교가 설치되어 2백 50명생들을 가르치는데 와히아와 기독학교 박동완 목사 앞에 90명 동 지방 미감리교회 학교 안창호 목사 앞에 50명이 되며 또한 와이누하 학교 교사 안악선 부인 앞에 50명 와히파아 학교 교사 최병수 부인 앞에 40명이 있다더라.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들의 자녀는 본국과의 떨어진 생활로 국어와 역사에 대한 인식이 낮아지는 추세였다. 3.1운동과 재만한인운동에 헌신한 박동완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모국의 역사를 잃는 것을 두려워해 교회당을 빌려 국어 및 역사 교육을 펼쳐나갔다. 박동완은 이후 하와이 한인협회에 가입하여 미국 내 한인 통합운동에도 가담하는 등 1941년 2월 23일 하와이 호놀룰루 병원에서 사망할 때 까지 끊임없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의 유해는 사망 한달뒤 국내로 돌아와 3.1운동 당시 고난을 함께한 함태용 목사의 주도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 현재의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모역으로 이장되었다.     2) 한봉철의 독립운동-만주로의 진출  한봉철은 京畿道 楊平郡 葛山面 楊根里 154번지 출생으로 그의 독립운동 공적에 비해 현재까지 단독 연구가 정리된 바 없다. 따라서 발굴된 자료에서 언급된 자료 및 공훈록을 근간으로 그의 약력과 공헌을 간단하게 정리하도록 하겠다. 한봉철의 독립운동은 앞서 언급한 박동완과 비슷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바로 3.1운동이다. 박동완은 33인의 일원으로 중앙 지도자의 입장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반면 1919년 3월 24일 한봉철은 양평 군중의 일원으로 양근리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생생한 현장의 열기를 경험하고, 이로 인해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다음은 판결문 상에 등장한 한봉철의 만세운동시 행적이다.   (상략) 피고 韓昌鎬·金慶星·徐象錫·金石鳳·韓奉喆은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함으로써 정치의 변혁을 꾀하였다. 많은 군중과 함께 불온한 행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려고 기도하여 이 날 전기한 葛根里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이 동리 안을 광분함으로써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행동을 하여 동 지방의 안녕을 방해한 자이다. (중략) 수백 명의 군중은 同里에 있는 葛山面事務所·楊平郡廳·楊平郵便所 및 朴熙英의 집에 몰려갔다. 그 중 수십 명의 군중은 제멋대로 각 사무실 또는 방 안에 난입하여 극도로 소란을 피우고, 군청에서는 마음대로 뗄 수 있는 창문의 유리 수 매와 동 군청에 보관된 國稅에 관한 往復綴·제세금부징수 정리부 각 1책을 파기하였다. 면사무소에서는 면장 金讚濟를 사무소 밖으로 끌어 내어 때렸을 뿐만 아니라 동 사무실의 뗄 수 있는 창문의 유리 수 매를 파괴하였다. 양평우편소에서는 뗄 수 있는 창문의 유리 수 매를 부쉈고, 또 朴熙英집에서는 ‘군수와 면장이 잠복하였을 것이다’고 하면서 각 방을 수색하였으며, 소요를 피우는 군중이 봉기하자 피고 韓奉喆·韓昌鎬·金慶星·徐象錫·金石鳳은 그 사정을 알고서도 그 군중에 참가하여 소요에 참가하고 따라다녔다. 피고 韓奉喆은 위 우편소의 사무실에, 피고 金慶星·韓昌鎬·徐象錫은 면사무소의 사무실에, 피고 金石鳳은 위 朴熙英의 집에 모두 침입하여 함께 소요를 피움으로써 동 지방의 靜謠를 해친 자이다. (하략)    경성지방법원은 한봉철에게 소요죄를 적용하여 징역 10월을 선고했다. 한봉철은 이에 불복하고 계속해서 상고했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상고 기각,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어 옥고릴 치뤘다. 그럼에도 한봉철은 일제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920년 경기도 양평에서 상해[독립신문]대한독립단 명의의 군자금요구 협박문을 일제에 충성한 유지들에게 배포하여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후 양평에서 활동하기 어렵게 된 한봉철은 해외로 나아가 새롭게 독립운동에서 전환을 꾀한다.  1923년 만주로 건너가 고려공산청년회조직위원이 되었고, 1928년에는 길림성 林省 磐石縣으로 이주했다. 조선인 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재만농민동맹 결성에 참가했다. 이 때부터 한봉철은 한진이란 가명을 사용하여 만주의 항일전선에서 활동한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사회주의인명사전]의 설명을 참조하겠다.    한진(韓震 1900~1936 :) (중략) 조선공산당 만주총국(ML파) 지도간부로서 남만지역의 공산주의운동을 위해 노력했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31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33년 출옥했다. 출옥 후 樺甸縣 八道溝 일대 중공 지하공작에 참가했다. 9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獨立師 결성에 참가하여 군대 내 당사업에 종사했다. 1934년 11월 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 군수부장이 되였다. 桓仁․本溪 지구에서 유격근거지 창설사업을 담당하여 10여 개의 비밀숙영소, 주둔지를 건설했 다. 1936년 2월 延吉縣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한봉철은 1936년 연길현에서 일본군과 싸워서 전사했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사망날짜와 장소 등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 동안 만주지역 사회주의 운동 및 중국공산당 계통 지하공작에 참여한 이들에 대해서는 연구가 진척되기 힘든 환경이었다. 하지만 만주 운동가들 중 상당수는 사회주의를 세계사적 흐름에서 독립을 위한 전략으로서 취한 경우가 많았던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 실현을 원한다면 그 사조를 절대적 가치로 숭상하면서 본인이 가진 기존의 민족의식까지도 지워야만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독립운동가들 중 상당수는 소련과 중국의 지도를 거절하고 자생적인 방식으로 지하운동을 전개한 경우가 많다. 한봉철이 실제현장에서 일본군과 싸워 교전․순국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3.1운동 및 독립문서 배부 때부터 키워온 그의 항일 의식은 더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위해 만주로 나아가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박동완과 한봉철의 경우 국내의 경험이 해외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3.1운동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박동완은 근대 교육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문화운동 방면으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반면 한봉철은 만주로 건너가 일제와 정면승부를 택하는 길을 걸었고, 실제 교전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이어나갔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인물인 변준호는 앞서 소개한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일찍부터 미국에 건너갔으며,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실천방략에 몰입함으로써 미주 한인 독립운동사에 독자적인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할 수있다.     3. 미국에서의 독립운동-변준호의 무장투쟁론에 대하여    보통 해외에서 활동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정보 문건에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의 시각에서 작성된 정보는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폭도로 매도하고, 엄연한 독립운동의 쾌거를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 따라서 한국인의 시선에서 작성된 정보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해외에서 한국인이 발간한 신문 중 영향력이 컸던 건 상해의 [독립신문]과 미국에서 발간된 [신한민보]였다. 특히 미국에 살았던 한국인들의 활동을 파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자료는 [신한민보]이다. 이 신문은 일제강점기 부터 해방 후까지 발간되었고,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과 같이 미국에서 활동한 유명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소상히 기재했다. 또한 일본의 감시에서 자유로웠던 적에 이 신문은 당시의 국제 정세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예컨대 검열을 피해 조선인이 억울하게 죽었던 관동대지진의 실체를 다룬 것도 이 신문이었다.  한편 상해 [독립신문]과 혼동되지만, [독립]이란 신문은 1943년 10월 6일터 로스앤젤레스(LA)에 본부를 두고 발간된 신문이다. 이 신문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라는 단체의 기관지였으며, 중국에서 결성된 김원봉·김규식이 주도한 조선민족혁명당의 소식을 주로 다뤘다. [독립]은 독립전쟁론을 줄곧 주장했으며,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기회로 조선의 자주 독립의 중요성을 강하게 외쳤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이 [신한민보]와 [독립], 두 신문의 지면에서 줄기차게 독립전쟁을 주장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그 인물이 卞俊鎬(1895. 11. 1.-1966. 2. 20)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그가 1938년 12월 15일 [신한민보]에 게재한 「대표대회를 앞두고 몇 가지 제의 조건」이라는 글의 일부를 살펴보겠다.   (상략) 중일전쟁 중에 중국에 대하여 우리 한인은 명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조선민족 해방운동에 제일 중요하다 믿는다. 중국의 항전은 중국 민족의 혁명전쟁이 될 뿐만 아니라 조선민족의 혁명전쟁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한중 양 민족의 연대적 혁명의식을 가지고 물력과 인력을 내여서 동맹적 항일을 하여야 장구히 싸울 수 있고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이다. (중략) 더욱 오늘같이 우리 조선민족혁명전쟁 시기에 있어 조선 여자에 참정권 평등권을 주는 것은 우리 민족 혁명과 해방운동을 이끄는 중요한 길이 되는 줄로 믿는다. (중략) 나의 관찰로는 우리 대표가 워싱턴이나 평화회의에 가서 우리 독립을 따온다는 사람이 아니면 우리 사회에 대표자격이 있는 줄 믿는다.    1937년 일본의 도발로 시작된 중일전쟁으로 세계 질서는 급변했고, 중국과 연합하여 조선도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모았다. 그래서 미국의 한국인들은 중국인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각지에서 후원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위 사설을 쓴 변준호는 중국이 수행하는 이 전쟁이 곧 조선민족의 혁명전쟁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실 중일전쟁 초기의 전황은 중국에게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변준호는 반일의식이 충만한 중국과의 동맹은 필수라고 언급하는 한편,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고, 조선 민족의 단결을 추진해 전쟁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전쟁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외교론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을 국제연합에 파견대표로 보낼 것을 간청했다. 이렇게 변준호는 한중합작을 통한 무장투쟁을 거듭 강조했다. 이러한 논리를 펼쳤던 변준호는 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1) 성장과 미국으로의 이주    변준호는 1895년 11월 1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 304번지에서 변세영·이희 부부의 둘째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고향 양평은 한말 의병들이 치열하게 투쟁한 곳이었다. 즉 유년 시절을 양평에서 보낸 변준호는 의병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변준호의 학력에 대해서는 흥사단 이력서의 기록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유년 시절에는 한학을 수학하다, 1910년에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다음해에는 같은 마을의 박씨와 혼인을 했다. 이어서 1912년에는 간이농업학교에 진학하여 2년간 수학했으며, 1914년부터 장로교 계통의 경신중학교에 입학했다. 경신학교에서 수학하던 변준호는 1916년 중국 南京으로 망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흥사단 이력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처음 망명지는 그의 활동 무대였던 미국이 아닌 중국 남경이었다.  하지만 왜 남경을 망명지로 선택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당시의 상황을 추론해보면 다음의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5년에 조선총독부는 「改正私立學校規則」을 시행하여 기독교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 사립학교가 타격을 입었고, 경신중학교도 그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더 이상 국내에선 제대로 된 학업을 이어갈 수 없음을 느낀 학생들 중 상당수는 남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남경에는 기독교 사립명문이었던 金陵大學과 그와 동일 재단이 운영한 金陵神學이나 金陵中學과 같은 학교들이 있었다. 또 한가지로는 몽양이란 존재의 위상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안타깝게도 여운형과 변준호를 직접적으로 연결할만한 자료를 찾지는 못했다. 다만 여운형이 이미 그 이전에 중국 남경 금릉대학에서 수학한 적이 있는데, 청년들의 우상이면서 양평의 선배격인 여운형의 행보가 변준호에게 미쳤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고 생각된다.   즉 1910년대 당시에는 중국 남경이 새로운 문물과 사조를 받아들이기 적당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여운형을 비롯한 청년들이 몰려들었으며, 자연스레 변준호도 그러한 소식을 듣고 영향을 받았을 거라 추론된다. 변준호가 수학했던 금릉대학은 미국의 기독회·북장로회·감리회 등 개신교 계통의 지원을 받았으며, 학생 중에서 미국 영사의 증명을 받거나 중국인 성명을 사용하여 미국 유학을 떠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아마도 변준호도 짧은 남경 생활 중에 미국유학의 가능성을 접했고, 더 나은 공간에서 새로운 출발을 위해 도미 행을 결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변준호는 1917년에 8월30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大韓人國民會(Korean National Association 이하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이주 한인 관리에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북미지방총회장인 姜永韶는 항구에 나아가 직접 한인들을 만나볼 정도로 의욕이 넘쳤고, 그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헌신했다. 미국 이주후 변준호는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지방회의 서기를 맡아 활동했다. 변준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하면서도, 독립운동 의연금과 교회설립금을 성실하게 납부했다.   서서히 변준호가 샌프란시스코 생활에 적응해 가던 중 국내에선 3·1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보고 독립을 기대한 미주 한인들은 3·1운동을 지원하는 여러 단체를 조직했다. 변준호는 그 중 하나인 청년혈성단에 가입했다. 1919년 5월 31일 창단된 청년혈성단은 출범 1주일 만에 50명이 넘는 회원을 모으는 쾌거를 이뤘다. 국민회는 청년혈성단의 빠른 성장을 인정하여, 정식 단체로 승인했다. 청년혈성단은 단장인 黃思宣이 “춍과 칼로 샹죵하는 날에야 우리의 독립이 셩공될지며” 라는 주장을 펼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무장투쟁을 지향한 단체였다.   3·1운동을 지원했던 미주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파악한 국민회는 1919년 12월 22일부터 在美韓人國民大會를 소집했다. 이 대회에서 국민회는 미주 한인들에게 군사교육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安昌浩는 《독립신문》을 통해서 “여러분 獨立戰爭을 하자하자 하지만 말고 獨立戰爭에 必要한 金錢을 準備하시오. 政府의 發行하는 公債人口稅所得稅同胞들의 愛國熱誠으로 내는 願納金或은 外國에 對한 借隸等이 우리의 財源이 될 것이오.”라 하여 한인들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렇게 3·1운동 이후 미주 한인들 사이에서 무장투쟁에 대한 긍정적인 분위기가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혈성단은 오래 지나지 않아 활동이 흐지부지해졌고, 변준호는 興士團에서 새출발을 도모했다. 1920년 3월 7일 흥사단에 가입하여 102번 단우가 된 변준호는 千世憲·金炳堧 등과 서신을 통해 여러 단우들의 근황을 전하면서 의연금을 수납했다. 이 곳에서 변준호는 새로운 단우 모집에 능력을 발휘했다.     2) 다시 무장투쟁으로    1920년대 중반부터 변준호는 1924년 Wesleyan University, 1927년 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변준호가 다녔던 이 두 대학 모두 시카고와 가깝고 한인유학생들이 많았던 학교 중 하나였다. 1920년대 유학생들은 1910년대 유학생들에 비해 학력 수준과 대학 졸업률이 높았으나 미국 이민법의 통제를 받았다. 미국은 늘어나는 일본인 이주와, 자국 내의 배일분위기를 의식하여 이민법을 개정했고, 조선의 유학생들은 이로 인한 불이익을 피할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여권을 가진 학생 신분으로 입국했기 때문에 학적을 이어가지 못하면 미국 이민국에 의해 추방되었다. 반면에 변준호는 여권 없이 1910년대 국민회의 보증으로 입국하여 이민법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1920년대 유학생들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한편 시카고는 미국의 유명한 공업도시로, 한인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특히 강영소가 1924년 9월 金昌俊 목사를 초빙해 시카고 한인감리교회를 재건한 이후, 한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또한 시카고는 미국공산당의 주 활동지로, 사회주의 급진 운동이 빈번했던 곳이다.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진 이도 있었으며, 이에 대한 한인 학생들의 찬반 토론이 뜨거운 곳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미주 한인들은 국제적인 비난이 일본에게 쏠린 것을 목격하고 독립운동 연합 전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그 결과 미주사회에 여러 통일연합이 조직되었고, 한인들 사이에서는 침체되어 있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이러한 때를 맞아 연구회는 사회주의 선전과 더불어 만주사변을 이용한 독립운동의 중요함을 알린 것이다. 1931년 11월 26일의 [신한민보]에 의하면 변준호도 연구회에 참가해 만주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했다. 즉 변준호의 연구회 활동이 늘어나게 된 배경에는 시기적으로 침체된 흥사단과는 달리 연구회가 만주사변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중국과의 연대를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유학 초기에 신진 단체인 청년혈성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할 정도로 변준호는 무장투쟁에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변준호는 연구회가 주장한 한중합작을 독립전쟁을 위한 방략으로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35년에 변준호는 새로운 활동지로 뉴욕을 택했다. 뉴욕은 만주사변 이후 촉발된 북미 한인사회 통합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도시였다. 특히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지원과 한인연합을 촉구하는 단체인 한인공동회가 가장 먼저 조직된 도시가 바로 뉴욕이었다.   이렇듯 뉴욕 한인들은 1930년대에 미주 내의 독립운동에 있어 가장 앞선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변준호의 흥사단 동지들이 모두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Alexander Hurh(허진업), Young R. Kim(김영륙), K. Cho(조극), James C. Penn(변준호), 이 4명은 단우 모집에 성실했다는 평가를 받은 흥사단 동부의 단우들이었는데 모두 1935년에 뉴욕에 거주했던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변준호가 시카고를 떠나 뉴욕으로 이주해 새로운 활동을 도모하게 된 배경에는 한인 통합운동의 열기가 강했던 뉴욕의 특징과 흥사단의 절친한 단우들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이렇듯 변준호는 미국유학 직후 국민회와 흥사단에서 주로 활동했음에도 시카고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사회주의를 자신의 독립운동방략으로 삼았다. 그런데 당시 흥사단 시카고 지방회가 침체기를 겪었던 반면에 연구회는 사회주의 선전 외에도 중국과의 연대를 통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변준호가 연구회 이후 사회주의 단체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것도 그가 투철한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변준호는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중일전쟁의 피해를 입은 중국인들을 지원하자는 취지로 뉴욕,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의 세 도시를 순차적으로 순방했다. 각 도시에서 변준호는 중일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중국인을 후원하자는 연설을 했으며, 흥사단의 젊은 단우들이 그의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흥사단은 1932년 12월 안창호가 일제 경찰에 검거된 이후 활동이 뚜렷하게 위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도부는 보수 성향으로 굳어가는 중이었다. 이에 대해 불만을 품은 젊은 단우의 수는 상당했으며, 변준호가 흥사단 소속임에도 중국후원회의 진보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이 단우들에게 공감을 샀던 것으로 보인다.  변준호는 이경선·김강·이창희·최봉윤·선우학원과 같은 진보 성향의 단우들과 활동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가 1937년 말의 中國後援會(The China Aid Society)였다. 중국후원회는 ‘조직적인 반일선전’을 한인이 아닌 외국인에게 펼침으로서 다른 단체와 차별성을 두었다. 지도부는 트럭을 구입해 도심을 돌며 반일구호를 외쳤고, 장개석의 부인인 송미령에게 후원금을 전달하기로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중국후원회는 국민회 회관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포럼을 개최해 한인사회주의자들을 소집했다. 회원들은 앞으로의 독립운동 방략을 토의함과 동시에 사회주의 스터디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금요일 포럼의 주요 이론가는 변준호, 김강, 이경선 세 명이었다. 포럼 멤버들은 일본에 대한 국제적 보이콧을 강조했고, 젊은 학생들은 미군에 입대하여 중일전쟁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변준호는 193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대한인국민회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여했다. 이 회의에서 변준호는 일화배척과 중국후원을 실행하며 중국인 각 단체에 연락하여 한중합작에 노력할 것’을 요구했다. ‘일화배척과 중국후원’은 중국후원회의 목적이었으며,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변준호가 국민회의 기반을 활용하여 중국후원회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금요일 포럼의 장소가 국민회 회관이었다는 점을 볼 때 그들의 활동은 국민회의 양해하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변준호는 사회주의 단체에서 활동했음에도 기존 단체와 단절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무장투쟁을 한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변준호가 소속된 중국후원회 회원들은 오래된 망명생활로 경제적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미국에서 한중합작을 선전하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朝鮮民族革命黨(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이하 민혁당)의 朝鮮義勇隊 결성과 활동 소식을 듣게 되었다. 1938년 중경에서 개편된 민혁당은 ????앞길???? 등의 잡지를 발간하면서, 무장투쟁 선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중국후원회가 생각한 한중합작에 의한 무장투쟁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중국후원회는 조선의용대의 활동을 후원하기로 결정하고 중국영사관을 매개로 삼았다.  1939년 6월 변준호는 국민회에 조선의용대 후원을 위한 교포소집을 요청했으나, 국민회는 중앙상무위원회를 열어 변준호의 요청을 거절했는데, 중국후원회의 활동이 미주한인의 역량집중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국민회의 이러한 반응을 들은 중국후원회는 내부 회의를 거친 후 1940년 4월에 로스엔젤레스를 중심으로 朝鮮義勇隊後援聯合會(The Korean Volunteers Corps Aid Society in China: 이하 의용대후원회)를 만들었고, 여기에 한인사회 내의 중립성향의 인물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다.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단체인 국민회와 동지회가 조선의용대 후원을 거절했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의용대후원회의 성립은 미주 한인사회주의의 확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의용대후원회에서 변준호는 최능익, 한길수와 함께 조선의용대를 선전하는 임무를 맡았다. 변준호는 시위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는데, 1941년에는 최능익과 함께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반일 시위를 기획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 이 때 변준호는 일본 국기를 태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강론하고, 미국 기자들에게 일본의 만행이 적힌 선전문을 배부했다.   한편 1942년 5월 15일 중국군사위원회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통합명령을 내렸고, 임시정부는 김원봉을 광복군 총사령부의 부사령으로 임명했다. 이에 1942년 6월 1일 金元鳳은 의용대후원연합회 대표 안석중에게 전보를 보내어,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에 의해서 조선의용대는 광복군과 통합되었으니, 의용대후원회를 재조직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통합은 1941년 4월 19일부터 29일까지 북미와 하와이 단체 9개가 참가한 해외한족대회에서 절실히 요청되었던 사항이었다. 그들은 독립전쟁 준비와 한인결집을 위해서는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는 형태로 통합되었으므로 의용대후원회라는 명칭도 바꿀 필요가 생겼다. 중경 민혁당 역시 의용대후원회가 재조직되어 독립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 의용대후원회는 朝鮮民族革命黨 美洲總支部(North America Branch of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이하 미주총지부)로 전환되었다. 1942년 6월 30일 경 조직된 미주총지부는 민혁당의 후원활동을 넘어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고 조직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반영할 새로운 신문제작에 착수했다. 그 결과 진보적 성격의 신문인 [독립]이 1943년 10월 6일 창간되었다. [독립]을 기관자로 삼은 미주총지부는 미주의 대표적인 정치 단체 중 하나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변준호는 바로 이 미주총지부의 위원장을 맡아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집결한 한인 사회주의자들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으며, 재미한인 연합기관인 在美韓族聯合委員會(The United Korean Committee in America, 이하 연합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1940년대는 한인단체 연합을 외치면서도 한인단체들 사이의 불신이 팽배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연합회에 참가한 각 단체 간에는 분열의 조짐이 극명해지고 있었다.이를 심각하게 여긴 임시정부는 1944년 8월 12일에 미주지역 여러 독립단체에게 ‘(각 단체는)미주한인의 결집을 위한 준비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주미외교위원부 개조에 관한 계획을 논의하라’는 훈령을 전달했다.   임시정부의 목표는 문제의 핵심인 이승만과 동지회를 전체회의에 참석시킨 상태에서 조직을 개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훈령에 따라 1944년 10월 28일부터 11월 6일까지 연합회 전체대표회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표회의는 이승만을 제외하고 국민회가 중심이 된 주미외교위원부를 조직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따라서 민혁당의 입장을 대변하여 군사위원회 설치를 중요하게 여긴 미주총지부와 다른 단체 사이에 마찰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변준호는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현 시점의 독립운동에서 무장투쟁이 우선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지금 연합군이 불란서(프랑스) 해방에는 군정부를 세우지 못하엿다. 그 이유는 불란서(프랑스)는 그 민중이 지하운동을 하야 연합군을 맞여들여 같이 싸운 까닭이다. 그런즉 조선도 지하운동과 비밀공작 하지않으면 위임통치나 군 정부 통치를 받게 될 것이다. 결국 최후의 해결은 내지에서 비밀 공작에서 나올 것이다. 앞으로 일아 전쟁이 나게 되면 러시아 세력이 만주로 나올 것이고 현재 영미도 또한 조선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러시아 통치도 원치 아니하고 영미의 통치도 원치 안는다. 우리는 공산정치도 사용할 수 있고 또 민주정치도 사용할 수 있다. 하여간 우리의 주장은 군사 운동을 첫째로 해결하는 것이라고 본다.    위의 발언은 변준호의 독립운동 방략과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 그리고 해방 후 독립국가구상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이다.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우선 변준호는 프랑스에 군정이 세워지지 않은 이유를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연합군과 협력하여 승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변준호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같은 무장투쟁을 해야 하며, 연합국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워야 함을 강조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러시아, 영국, 미국이 속한 연합국 통치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즉 변준호는 연합국의 위임통치나 군정이 아닌 독립국가 건설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공산정치도 사용할 수 있고 또 민주정치도 사용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볼 때 변준호가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한 것이 아님은 알 수 있다. 그는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임시정부가 무장투쟁을 독립의 중심방략으로 삼아 군대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했는데, 아래의 사설이 그것이다.     해외에 잇는 우리들은 적으나 크나 우리가 가진 총역량 정신적 지식적 물질적을 합하여 원동전션에서 피를 흘리며 우리의 적과 싸우고 잇는 우리 광복군에게 탄환 한 개라도 더 살 수 잇게 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본국 안으로 드러가 적을 몰아내게 하기 위하야 우리는 최후의 노력을 아끼지 않어야 할 것입니다.    변준호는 적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광복군을 지원하고 최종적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시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중국후원회 시절 한중합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아가 무장투쟁을 독립운동 방략으로 설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변준호는 광복군이 통일적 무장투쟁의 상징이며, 그것이 실제 성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미주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해 군비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변준호는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가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연합국에 인정받았던 사례를 소개하고 김원봉이 티토와 같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의 드골,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군사적 성과를 내야만 독립에 가까워진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당시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실제 행동을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3) OSS NAPKO PROJECT와 해방 이후의 삶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한인을 활용하는 작전을 계획했는데, 그 중 하나인 NAPKO PROJECT(이하 NAPKO)에 변준호가 발탁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 정부는 미국 내 한국인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1943년 5월 7일 한국문제 관련 정보당국의 실무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미주한인 문제에 대한 비공식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의 결과 ‘비공식적으로 한인들에게 접근하여, 한길수의 입지를 좁히고, 이승만은 명예적으로 대우하고 실질적으로 미국을 도와 임무를 수행할 한인이 필요하다’는 목표가 정해졌다. 이것은 사실상 한길수를 배제하는 동시에 이승만의 영향력 또한 제한하자는 조치였다.  또한 미국의 입장에서 작전에 목숨을 바칠 정도로 반일사상이 투철한 한국인들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FBI는 한인사회에 정보원을 침투시켜 그들의 사상과 행동을 관찰해 전쟁투입에 적합한지를 조사했다. FBI의 정보원들이 연합회 3차 회의를 다룬 보고서에는 ‘전체적인 업무가 지역의 한국단체들을 통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결론지었다. 연합회 회의는 당시 전쟁에 참여할 요원을 모으는데 급했던 OSS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회의에서 한반도 진공작전과 무장투쟁을 꾸준하게 주장했던 인물이 변준호였다.  따라서 OSS는 변준호를 작전에 적합한 인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변준호가 단체 운영을 통해 한인사회에 일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면서도 반일시위 활동을 이어나간 점을 평가했다. 변준호도 연합국과의 국내진공작전을 실천할 수 있는 OSS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김강, 이근성, 유일한과 함께 1월 4일 OSS FEU(Field Experimental Unit)에 민간인 신분으로 참가하였다.  OSS의 NAPKO는 공작원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정보수집과 국내 지하조직과의 연결, 사보타주, 연합군 선전활동 등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 작전에 배치된 한인은 변준호를 포함하여 총 19명이었고, 그들은 훈련을 위해 캘리포니아 남부의 산타카리나 섬으로 이동했다. NAPKO 요원들의 출신은 다양했다. 버마전선에서 탈출한 학병들과 맥코이 수용소의 한인 포로(박순동, 박형무, 이종실, 김필영, 김현일, 이종흥), 그리고 미 육군에 복무 중이었던 장교와 병사(박기벽, 이태모, 이초, 장석윤, 최창수) 그리고 미주에 오래 거주한 민간인들(유일한, 최진하, 이근성, 차진주, 하문덕, 변일서, 변준호, 김강)이었다.   이들 가운데 사회주의자로 구분된 이는 변준호와 김강 둘 뿐이었다. 이 명단을 통해 OSS는 NAPKO가 한인 지도자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지 않게 요원 선발에 신중을 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원들 대부분은 미주 한인사회내의 정치 동향에 중립적이거나, 미 육군 소속의 군인, 그리고 서류상으로 언제든 파기할 수 있는 포로들이었다.   변준호는 1945년 1월 18일부터 FEU 특별훈련소에서 정탐과 첩보에 관한 훈련을 받았다. NAPKO에는 서울 침투가 목적인 Einec Mission과 진남포-평양 침투가 목적인 Charo Mission이 있었다. 변준호는 이근성, 김강과 함께 Charo Mission에 배치되었다. Charo Mission은 ‘공작원 A(이근성), B(김강), C(변준호)를 서해안의 진남포에 침투시켜, 그들을 평양방면으로 진출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Charo Mission은 작전 지휘자인 아이플러가 소속된 Einec Mission을 지원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우수한 요원들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NAPKO는 OSS 중국 지부의 EAGLE PROFECT와 여러 가지 갈등을 겪었다. 두 작전은 종전을 위해 협력을 하면서도 많은 전공을 위해 경쟁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의 NAPKO도 초기보다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다. 이 때 Charo Mission은 Chamo Mission으로 변경되었고 하문덕이 새 요원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작전은 ‘중국에서 비행기를 통해 낙하산으로 침투하여 이근성과 김강은 평양으로 진출하여 지하조직망 건설, 변준호와 하문덕은 활주로를 건설할 것’으로 수정되었다.   NAPKO는 실행 직전까지 갔으나 8월 15일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불발로 끝났다. 작전이 실행되지 못한 이상 요원들의 거취는 모호해졌다. 이로 인해 변준호를 비롯한 민간인 출신 요원들은 계약해지를 당했다. 비록 NAPKO는 실패했지만, 고령에도 불구하고 최전선에 배치되어 군사작전훈련을 수행했던 변준호의 경험은 독립운동사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독립]의 멤버들은 해방 후 조국의 변화에 기대감을 품었지만, 통치자로 들어선 미군정의 정책에 실망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변준호가 쓴 사설들은 1946~1948년까지 미군정 통치기에 집중되어 있었고, 당시의 사설을 통해 변준호는 해방 후 남한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통제하는 미군정의 정책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조선에서 미군정 당국은 조선의 진정한 인민의 혁명을 박멸하였다. 각 정당의 결사 자유권을 허락지 아니하며 진보적 출판 자유를 금지하였다. 그 반대로 반동적 매국적 행동을 하는 신문을 장려하며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와 왜놈의 산업을 압수하여 오직 반동파들에게만 주어서 다수 민중을 압박하는 앞잡이들의 수는 많이 늘게 되었다. 그래서 농민은 농작 후에도 왜놈이 있을 때와 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기아에 빠지게 되었고 노동자들은 실직하여 방황하며 보통 시민은 경제적 혼돈으로 말미암아 남조선은 생지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남조선을 혼돈 상태에 빠뜨려놓고 있는 중에 미소전쟁이 나면 조선은 노서아를 공격하는 전쟁 근거지가 될 것이다     변준호는 미군정이 정당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일본으로부터 압수한 조선의 토지와 산업기관의 권리를 민중에게 정당하게 분배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그런데 여기서 변준호는 친일파들의 존재를 중요하게 비판했다. 그는 해방 후 미군정이 실무 경험을 이유로 이전의 친일 관료들을 재등용했기 때문에 민중이 경제적으로 도탄에 빠졌다고 보았다. 변준호는 남한이 혼돈에 빠진 상황에서는 전쟁이 발발할 우려가 있다고 예측했다.  변준호가 미군정 정책으로 변동하는 남한 상황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변준호는 이를 통해서 미국의 정책은 아시아를 후원하는 가면을 쓴 후에 조선을 시작으로 아시아 전체를 제3차 세계대전을 위한 군사기지를 만드는 것이라 예측했다. 1949년 4월 13일 변준호는 로스앤젤레스 단체연합 대표 중 한 명으로 유엔총회와 미국 정부에 공개서한을 제출했는데, 여기서 통일정부 수립 문제가 큰 화두였다.    우리가 의미하는 통일 민주 조선졍부라는 것은 남북조선을 통일 시킬 수 잇는 능력을 가진 졍부를 말하는 것이며, 남북조선을 통일하기 위하야는 이 정부는 반드시 조선 민족 대다수의 절대적 존경과 신임을 받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며, (중략) 이 정부는 조선 민족의 민주적 의사를 토대로 하고 수립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며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킨 조선 애국자들로써 구성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위의 기사에서 변준호는 먼저 통일 민주조선정부의 등장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5월 10일에 남한 총선거가 실시된 이래 통일정부의 희망은 빛이 바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통일 민주조선정부를 이야기 한 것은 친일파 숙청이 실패했고, 그들이 주도로 이루어진 분단정부를 비판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해방 후 조선애국자들이 정부 구성의 주도권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통일정부가 성립되지 못했으며, 민주적의사와 인민의 이익을 위한 정부의 출현이 실패하게 된 것이었다.그리고 변준호는 ‘조선인의 피와 땀이 기초가 된 새로운 조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동족 상잔의 내란을 배격해야 함’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리 한반도의 상황이 불안정하지만 내란이라는 최대 비극만큼은 피해야함을 간절히 원했다. 1950년대는 한반도 전쟁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시기였다.  해방 후 변준호가 남긴 글을 살폈을 때, 미군정이 남한에서 조선애국자들의 활동을 탄압하고, 귀국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조국이 분단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좌절이 컸음을 알 수 있었다. 1956년 [독립]이 폐간된 후 변준호의 활동은 파악되지 않는다. 변준호는 1966년 2월 20일에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에 대해 [신한민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었다.    청년시절에 학생으로 도미하여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고적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던 변준호씨는 노환으로 인하여 롱비취 「엘세리트」병원에 입원 중이던 바 지난 2월 20일 새벽 4시경에 별세하였다하며 장례식은 오는 3월 1일 하오 2시에 「리드브라더스」 장의소에서 거행된다 한다.    변준호의 죽음을 아쉬워한 김창만이 추모시를 [신한민보]에 올렸다. 추모시는 ‘왜젹성토 시위대엔 번번이 선봉이고 미국군무 비밀대에 자원출젼 하였고나’ 라는 표현을 통해 변준호가 다방면으로 한국을 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했음을 알렸다. 이후 그의 유골은 동지인 김혜란에 의해 본국으로 보내졌고, 1997년 미주 독립운동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질 때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4. 맺음말    해외로 진출한 양평의 독립운동가들은 실천과 투쟁을 미덕으로 삼고 자신의 위치에서 해방의 순간까지 일제와의 대결을 피하지 않았다. 오늘날 소개한 이 3인의 삶은 양평이란 지역을 넘어 자라나는 세대에게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끝없는 투쟁으로 미래를 쟁취한 선각자들의 자랑스런 역사로 기억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양평 3.1운동의 전개 과정과 주요 인물

양평 3.1운동의 전개 과정과 주요 인물     장원석(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     1. 머리말   3·1운동은 폭압적인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떨쳐 일어나 1919년 3월1일을 시작으로 약 2개월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과 국외 동포사회로까지 퍼져 나간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항일투쟁이었다. 이렇게 표출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져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헌법 정신의 기초를 이루었다. 하지만 3·1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3·1운동은 중국 상하이에 망명 중이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1918년 11월28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윌슨 미국 대통령과 파리평화회의 앞으로 독립청원서를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몽양은 김규식 선생을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는 동시에 신한청년당 당원들을 국내외 동포 사회로 보내 전 민족적 만세시위를 조직하여 조선 독립의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여운형 선생과 신한청년당원들이야 말로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숨은 주역들이었던 것이다. 여운형 선생이 태어난 양평 또한 전국 어느 지역 못지않게 3·1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지역이다. 양평은 개성을 제외하면 시흥군과 함께 경기도 내에서 만세시위운동이 가장 먼저 발생하였다. 3월 10일 시작된 양평의 만세운동은 4월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총 25회의 시위에 당시 6만9000여명의 군민 중 2만1000여명이 참가하여 그 규모면에서 방대했을 뿐만 아니라 총 82명이 검거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시위 양상 면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양평 만세시위 운동의 전개 과정을 발생 순서에 따라 각 지역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 양평 3.1운동의 전개 과정 (1) 서종면 양평의 3.1운동은 3월 10일 서종면 문호리에서 처음 만세 시위가 발생한 이래 약 한 달에 걸쳐 크고 작은 시위가 이어졌다. 수백 명이 참가한 문호리 시위는 천주교인들이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서종면을 비롯한 양근군 일대는 일찍부터 천주교를 수용하여 전국으로 전파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곳이다. 또한 서종면은 개항 전후 위정척사운동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한 유학자 화서 이항로가 태어난 곳이다. 그는 만년에 이곳에 머물면서 후진을 양성하여 화서학파를 형성했는데, 항일의병의 주요 지도자들인 유인석, 최익현 등이 바로 화서 문인들이었다. 서종면에서 가장 먼저 만세 시위가 일어난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평등의식과 항일정신이 이어졌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2) 청운면, 단월면 문호리 시위 이후 한동안 소강상태에 있던 양평 지역에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3월 23일 청운면이다. 청운면 만세운동은 용두리 장날 시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주로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확산되었다. 시위를 주도한 인물은 단원면 덕수리의 신재원과 부안리의 김종학, 양동면 쌍학리의 정경시, 그리고 갈운리의 민주혁 등이었는데 모두 천도교인들이었다. 이들이 미리 준비한 “조선독립기(朝鮮獨立旗)”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쳐 시위를 선도하자 200여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시위행진에 호응했다. 이에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주도자들을 체포함으로서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날 경찰에 체포된 시위 주도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신재원 · 정경시는 징역 2년, 김종학 · 민주혁은 징역 1년 6개월에 처해졌다.   (3) 갈산면(현재 양평읍) 3월 24일에는 양평군의 중심인 갈산면에서 1,000여명이 모이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진행되었다. 이 시위는 연희전문학교 서기인 이진규가 독립선언서 수십 매와 대한독립회 명의로 된 아래의 격문 수십 장을 가지고 양평으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지금에 각 경찰서에서 형벌을 당하는 형제, 자매를 보고, 또 태황제 폐하를 암살하였다. 2천만 동포는 나라 없고 임금 없는 백성이 된 지 이에 10년의 능욕을 당하였다. 나라 없는 노예가 되어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총, 칼 밑에서 죽는 것만 못하다. 독립의 시기는 왔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는 만나기 어렵다. 맹렬히 분기하여 민족자결을 하고 독립기를 높이 게양하여 형벌 속에 있는 형제 자매를 구하고 역적의 무리를 잘게 토막쳐 우리들의 마음 속을 상쾌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동포여! 이 시기를 잃지 말고 독립기를 번득이고 맹렬히 분기하여 독립하라”   이 날은 갈산면 양근리 장날이었다. 이진규는 장터에 모인 1,000명의 군중들에게 “조선민족은 이 기회를 타서 일본 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의 연설과 동시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군중들도 적극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올렸다. 시장을 일주하는 과정에서 곽영준(21세 천도교도), 한창호(23세, 기독교도, 자전거 수리업) 김경성(32세, 농업), 서상석(19세, 양평우편소 사무원), 김석봉(20세, 요리점 고용인), 한봉철(22세, 농업) 등의 청년들이 적극 호응하여 시위를 이끌어 나갔다. 오후 2시경 일제 헌병이 나타나 이진규와 곽영준을 보안법 위반이라 하며 헌병분견소로 끌고 갔다. 이에 군중은 격분하여 헌병분견소 앞에 가서 만세를 부르며 이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수백 명의 군중은 갈산면사무소, 양평군청, 양평우편소와 박희영의 집에 쳐들어갔다. 이들은 군청과 면사무소의 서류, 장부 일부를 폐기하고 면장 김찬제를 사무소 밖으로 끌어내 구타하였으며, 우편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군수와 면장이 숨은 것을 찾아내고자 박희영의 집을 뒤지기도 했다 이날 일본 경찰에 체포된 시위 참가자들은 재판에 넘겨져 이진규 징역 2년, 한창호·한봉철은 징역 10월, 곽영준은 징역 8월, 김경성·김석봉·서상석은 징역 6월의 형을 받았다.   한편 이날 갈산면 공흥리에 사는 이용준(37세)도 이와 별도로 4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양근리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갈산면 사무소로 쳐들어가 면장 김찬제, 면서기 서병일을 바깥으로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용준은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3년형을 언도받았다.   (4) 강상면 강상면 만세운동은 3월 29일 교평리 나루터에 모인 군중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이날은 5일전 양근리 시위로 인해 장이 제대로 서기 않았으나 교평리 일대에 이미 100여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나루터에 모인 사람들은 “조선은 독립은 세계 각국에서 이미 승인하였다”, “일본도 우리나라를 내놓으려고 모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등 정치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러한 말을 들은 송학리 사는 신석영이 “우리 나라가 독립이 되었으니 기쁘지 않소!”라며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모여 있던 군중들이 호응하여 순식간에 나루터는 시위장으로 변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강건너 갈산에서 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여 다수가 부상을 입고 해산하였다. 신석영은 체포되어 1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재판정에서도 “우리나라가 독립되었다고 기쁨에 넘쳐 만세를 부른 것이 왜 잘못이냐?”며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5) 용문면 3월 30일에는 용문면 광탄리에서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 용문면 시위는 마룡리의 조영호가 오촌리에 사는 김윤구, 신순근 등과 함께 주도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수백명의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때 조영호는 군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우리가 지금 독립하는 것은 하늘의 운수에 의하여 되는 것이다.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겠느냐? 일본인은 모두 자기의 본적지로 돌아가라. 지금까지 두 나라가 합친 것은 무리한 일이다. 예를 들면 1개의 달걀이 쌍란일 경우 이것이 부화하면 두 마리의 병아리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는 일본과 쌍란 속에 들어 있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응당 두 가지로 갈라져야 하지 않겠느냐   이에 고무된 군중들은 박수 갈채를 보내고 가두행진에 나셨다. 시위 주도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조영호는 징역 8월, 김윤구·신순근은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6) 강하면 3월31일 강하면 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00여명의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이날 시위는 68세의 노인 최대현이 주도했다. 그는 한말 오위장(五衛將) 출신으로 1907년 군대 해산 후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학생들의 계속된 권유로 27일에 시위에 참가한 이후 앞장서서 시위를 이끌어갔다. 앞서 그는 고종이 사망하자 2월 13일에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셨으매, 그 성은에 보답하기 위하여 능 있는 곳 앞에서 제사를 지고자 하니, 상하의 모든 백성이 그의 자력에 따라 금원을 지출함으로써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만 될 것이므로 각각 분에 맞는 기부를 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문서를 만들고, 그의 양자 최윤식을 시켜 면사무소 등사기를 빌려 인쇄한 후 군내 11개 면장에게 배부하기도 했다.   (7) 양서면 1,000여명이 참가했던 24일의 양근리 장날 시위 이후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시위는 4월 접어들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했다. 전날 밤 11시에 강하면에서 시작된 시위가 밤을 세워 다음 날까지 이어져 이웃 양서면으로 이동했다. 4월 1일 오전 4시경에는 양서면 도곡리에 있는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 2,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잇따라 연호하며 열기를 높였다. 이날 시위에는 전날 강하면 시위를 주도했던 최대현이 참여하여 시위를 지도했다. 다음 날인 2일에도 양서면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양서면 시위에는 최대현과 함께 강상면 출신의 이보원, 윤기영과 양서면 출신의 윤기영, 김선동, 신우균, 여광현, 여운긍 등이 긴밀히 준비하여 군중들을 이끌었다. 이 중에서 특히 신원리의 여광현, 여운긍 등 몽양 여운형의 친척들이 주도하여 1,000여명의 군중들이 양서면 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해 나갔다.   (8) 고읍면(현재 옥천면) 다음 날인 4월 3일에는 양서면에 이웃한 고읍면에서 양평 3.1운동 최대 규모의 4개면 연합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전날 최대현을 비롯한 지도부는 함께 서울에서 온 학생 2명과 동리민들이 논의하여 4월 3일에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4월 3일이 되자 강상, 강하, 양서, 고읍 4개 면민 4,000명이 고읍면에 모여 만세 시위를 결행하였다. 고읍면 사무소 앞에서 최대현은 군중 앞에 나아가 “읍내로 가려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여 양평 읍내로의 진출 여부를 물었다. 군중들은 모두 손을 들었지만 머뭇거리고 행진하지 않았다. 이에 최대현이 “읍내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며 앞장서서 이끌자 군중들은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가 고읍면 옹암리(瓮岩里)와 용암리(龍岩里) 사이의 작은 언덕을 지나던 중 출동한 일본 헌병대와 마주쳤다.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최대현의 양자 최윤식을 포함한 3명이 순국하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 8명 가운데 3명도 끝내 순국했다. 그리고 최대현 마저 체포되면서 시위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9) 양동면 4월 3일의 고읍면 시위 이후 양평의 시위 중심 지역이 양동면과 지제면으로 옮겨갔다. 4월7일 양동면 석곡리 섬실의 양동면 사무소 앞에서 3,000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전석현이 동지를 규합하여 격문을 작성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전석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종성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치자 장날에 모인 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시위 군중들이 양평을 향해 행진하던 중 양평기마헌병대 수십 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10) 지제면(현재 지평면), 개군면 4월11일 지제면 곡수장터에서 시위군중 3,000여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당시 여주군 개군면에 속했던 김영규, 이철영, 이호승 등의 사전준비에 의해 진행되었다. 시위군중이 행진을 하던 도중 기마헌병대의 총격을 받아 김영규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시위대는 해산했다. 시위 이후 헌병대가 마을을 수색하면서 이호승이 총격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3. 양평 3.1운동의 주요 인물 한 달 이상 치열하게 전개된 양평 3.1운동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했다. 그리고 82명이나 되는 분들이 검거되어 재판을 받고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 중에서 양평 3.1운동에 참여한 공훈으로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현재까지 20명이다. 이 외에도 3.1운동으로 투옥되는 등 희생을 치렀지만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분들이 적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래는 양평 3.1운동과 관련해서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들의 공훈록 내용이다.   (1) 곽영준(郭英俊, 1899.9.22~1932.4.28) 주소 :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창안리 217 서훈 : 애국장(2006)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葛山面) 양근리(楊根里)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이신규(李藎珪)가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매를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배포하고, 1,0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곽영준은 1919년 7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고, 동년 10월 23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곽영준은 1920년 4월 28일 출옥하여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서 활동하던 중 동년 7월 양재은(梁在殷) 등과 회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을 위해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위해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22년 1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7호위반 및 강도죄로 징역 7년을 받았고, 동년 3월 29일 공소기각 되었다. 1931년에는 양평군에서 양평농민조합준비회의 지제지부(砥堤支部) 면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32년 이후 양평적색농민조합에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 김경성(金慶星, 1888.6.10~1950.10.5) 주소 : 경기도 양평군 葛山面 楊根里 339 서훈 : 대통령표창(2006)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葛山面) 양근리(楊根里)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이신규(李藎珪)가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1,0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김경성은 이 날 오후 3시 경에는 양근리 면사무소에 가서 면장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요구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김경성은 1919년 7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고, 동년 8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기각, 동년 10월 2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기각 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 김상경(金相卿, 1876.6.12.~1919.3.4) 주소 :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망미리 275 서훈 : 애국장(2015) 1919년 음력 3월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곡수리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하였다. 양평군의 만세운동은 3월 10일 서종면 문호리에서 수백 명의 만세시위가 일어난 이후 3월 23~24일경부터 4월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3월 23일 청운면 용두리 시장 만세시위, 3월 24일 이진규(李盡珪)가 주도한 갈산면 만세시위, 3월 30일 용문면 광탄리 만세시위, 3월 31일 강하면 사무소 앞 만세시위 등 크고 작은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이어 4월 1일에는 양서면에서 2,000여 명이, 4월 3일에는 고읍면에서 4,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4월 4일에는 지제면 곡수리에서 주민 2,70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김상경도 이날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양평군내 곳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자, 일본 헌병과 경찰은 군중을 진압ㆍ해산하기 위해 무차별 총격을 퍼부어 5명이 순국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김상경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4) 김영규(金英圭, 1888.11.5~1919.4.11) 주소 : 경기도 楊平군 介軍면 香리 161 서훈 : 애국장(1991) 경기도 양평 사람으로, 1919년 4월 11일 양평 지제면 곡수 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선두 대열에 서서 시위군중을 지휘하며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급거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시위군중이 지켜보는 현장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5) 김윤구(金崙求, 1893.11.5~1950.4.15) 주소 : 京畿 楊平 龍門 梧村 181 서훈 : 대통령표창(2005)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이른바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한 이래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그는 고향인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30일, 광탄리에 군중들이 모이자 주도자의 한 사람인 조영호(趙瑛鎬)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들을 향하여 “독립은 천운이니 사람의 힘이 미칠 바가 아니다. 일본인은 모두 본적지에 귀국하라. 예컨대 1개의 계란이라도 쌍계이면 2개의 계란에서 2개의 병아리가 나오는 것이니, 1국으로 함은 쉽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연설하였다. 이는 우리나라가 절대 일본에 병합될 수 없음과 독립의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때 그는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6) 김종학(金鍾學, 1876.8.24~미상) 주소 : 京畿 楊平 丹月 富安 407 서훈 : 애족장(2010)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천도교주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 천도교인이었던 김종학은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던 중, 먼저 단월면 덕수리의 신재원(申在元)과 양동면 쌍학리의 정경시(鄭慶時)가 3월 23일 용두리 시장의 장날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하고 시장으로 가던 중, 단월면 부안리의 김종학과 청운면 갈운리의 민주혁(閔周赫) 등을 만나 내물리 어느 다리 밑에서 거사계획을 논의하였다. 김종학 등은 태극기 등을 만들어 시장으로 갔다. 신재원과 김종학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 200여 명이 모여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 일로 김종학은 1919년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7) 민주혁(閔周爀, 1870.11.17~미상) 주소 : 京畿 楊平 靑雲 葛雲 133 서훈 : 애족장(2006)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로 인해 옥고를 치렀다. 양평군에서는 3월 10일 서종면 문호리에서 시위가 시작된 이후 3월 23일 청운면 용두리에서 천도교인들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민주혁은 1919년 3월 23일 양평군 청운면에 거주하는 천도교인 신재원(申在元)·정경시(鄭慶時)가 청운면의 용두리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참여를 권유하자 동참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같이 여물리 무명교 아래에 가서 ‘조선독립기(朝鮮獨立旗)’라고 쓴 깃발을 마련한 후, 용두리 시장에서 15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조선독립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민주혁은 1919년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았고, 경성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8) 신석영(辛錫永, 1881.2.17.~1960.8.2.) 주소 : 京畿 楊平 江山 松鶴 893 서훈 : 애족장(1990)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3월 29일 양근읍 장터로 장보러 가려고 강산면 교평리(交坪里) 도선장에 나와 있었다. 그러나 3월 24일 양근읍의 만세시위로 이날은 장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때 그는 나루터에 모인 군중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중에 조국이 이미 독립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그는 이에 나루터에 세워놓은 태극기를 들고 "여러분!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었으니 기쁘지 않소?"하며 독립만세를 부르자, 100여명의 군중도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고 나루터는 이내 만세시위장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날의 시위로 일경에 피체되어 이해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였으나 6월 13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26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9) 신우균(申祐均, 1889.6.12~1921.1.25) 주소 : 경기도 양평 양서 대심 57 서훈 : 건국포장(2018) 1919년 4월 경기도 양평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궐석재판으로 笞 90度를 받았고, 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다 1920년 5월 경기도 양평군으로 돌아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기도 지단을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0) 신재원(申在元, 1860.11.9~1920.8.7) 주소 : 京畿 楊平 丹月 德水 336 서훈 : 애족장(1990) 경기도 양평 사람으로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919년 3월 23일 청운면 용두리 장날을 이용하여 정경시(鄭慶時)·김종학(金鍾學)·민주혁(閔周赫)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일 천도교 교주 손병희 등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을 한 이래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정경시와 만나 용두리 장날인 3월 23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는 3월 23일 정경시와 함께 용두리 시장으로 가던 중 김종학과 민주혁을 만나 그들의 거사계획을 말하여 찬성을 얻고 여물리(餘勿里) 다리 밑에서 자신이 사 가지고 온 흰 천에 김종학으로 하여금 조선 독립기라고 쓴 깃발 3개를 만들게 하였다. 장터에 이르러 150여 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 해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1) 여광현(呂光鉉, 1886.3.2~1962.8.10) 주소 : 京畿 楊平 楊西 新院 496 서훈 : 대통령표창(1995)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과 4월 3일 고읍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광무황제의 승하를 당하여 망국의 통한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중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최대현(崔大鉉)·이보원(李輔元)·신우균(申祐均) 등과 뜻을 모아 거사일을 3월 31일로 정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비밀리에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들을 포섭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31일 오후 11시에 그는 강상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백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시위는 밤을 세워 다음날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4월 1일에 이들은 이웃 양서면 사무소로 행진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4월 3일에도 고읍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 때에는 고읍면 주민 뿐 아니라 인근의 강상면·강하면·양서면 등지에서 합류하여 시위 군중의 규모가 4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고읍면 만세시위에 이어 양근읍으로 향하였으나,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이 때 윤기영은 만세현장에서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10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2) 윤기영(尹璣榮, 1871.2.17~1941.4.16) 주소 : 京畿 楊平 江上 松鶴 158 서훈 : 대통령표창(1995)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상면과 4월 3일 고읍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광무 황제의 승하를 당하여 망국의 통한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중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최대현(崔大鉉)·이보원(李輔元)·신우균(申祐均) 등과 뜻을 모아 거사일을 3월 31일로 정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비밀리에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들을 포섭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31일 오후 11시에 그는 강상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백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시위는 밤을 세워 다음날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4월 1일에 이들은 이웃면인 양서면 사무소로 행진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4월 3일에도 고읍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 때에는 고읍면의 주민 뿐아니라 인근의 강상면·강하면·양서면 등지에서 합류하여 시위 군중의 규모가 4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고읍면 만세시위에 이어 양근읍으로 향하였으나,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이 때 윤기영은 만세현장에서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10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3) 이보원(李輔元, 1870~1949.12.30) 주소 : 京畿 楊平 江下 屛山 801 서훈 : 대통령표창(1993)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면사무소 앞에서 최대현(崔大鉉)·윤기영(尹璣榮)·신우균(申祐均) 등과 함께 시위군중 300여 명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4월 3일에도 최대현의 주도로 양평군 고읍면에서 이웃 면 주민 4천여 명을 규합,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절규하는 등 시위행진을 벌여 읍내로 향해 행진하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의해 시위가 중단되고 여러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4) 이신규(李藎珪, 1899.7.22.~1926.1.24.) 주소 : 경성부 崇二洞 123 서훈 : 애국장(2006)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갈산면(葛山面) 양근리(楊根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양근 지역의 만세시위는 연희전문학교 서기로 재직하고 있던 이신규가 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회(大韓獨立會)’ 명의로 된 격문 수십 장을 가지고 1919년 3월 24일 이곳에 도착하면서 본격화하였다. 이신규는 양평군의 만세시위가 평온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서울에서 특파되었다. 3월 24일은 장날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는 길가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에게 “조선 민족이 이 기회에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하지 못하면 큰 일”이라는 요지의 연설과 동시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에 모인 군중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장을 행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직후 체포된 이신규는 1919년 10월 23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출옥 후 옥고 후유증으로 요양하다 28세에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5) 전석현(全錫玄, 1884.5.27~미상) 주소 : 京畿 楊平 楊東 石谷 379 서훈 : 애족장(2012) 전석현은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양동면(楊東面)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전국적인 독립만세시위가 발발했다는 소식은 양평군에도 전해졌다. 용문면 광탄리, 강하면 면사무소 앞, 양서면 면사무소, 고읍면, 청운면 용두리 시장, 양근읍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발했다는 정보를 들은 전석현과 이종성(李鍾聲)은 양동면에서도 속히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각 부락에 배포하는 동시에 많은 동지를 규합하였다. 미리 약속했던 1919년 4월 7일에 양동면사무소 앞에 많은 군중이 모였고 이날은 때마침 석실리(石室里) 양동(楊東)장날이라 장꾼과 합세하였다. 전석현은 선두에 서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종성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군중은 일제히 호응하였다. 군중은 시가지를 돌며 시위하고 양평읍내로 향하였다. 시위대가 각 부락을 지날 때마다 남녀노소가 문 앞에서 손을 흔들며 만세를 따라 불렀다. 그 때 용두리 헌병대가 양평으로 연락하여 불시에 기마헌병대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일사불란한 시위대가 계속 만세를 부르고 행진하니 일병이 총을 쏘아 사상자가 많이 났다. 군중은 목적지인 양평으로 가지 못하고 전석현과 이종성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전석현은 6월 24일 경성지방법원 여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그는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4월 24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6) 정경시(鄭慶時, 1855.9.23~1929.2.24) 주소 : 京畿道 楊平郡 楊東面 雙鶴里 198 서훈 : 애족장(1990)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경기도 광주에 분원의숙(分院義塾)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천도교인이다. 1919년 3월 23일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 장날에 신재원(申在元)·김종학(金鍾學)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동년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6월에 출옥하였다. 그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출옥 직후인 1920년 6월에 대한독립단 경기도 지단장 한덕이(韓悳履)의 권유로 동단에 가입하여 임시정부의 격문을 양평지방에 배포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양평군수, 양평서 일경등에게 사형집행선고문 등을 우송하는 등 활동하다가 1921년 6월에 다시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7) 조영호(趙瑛鎬, 1882.5.25~1960.6.10) 주소 : 京畿 楊平 龍門 馬龍 서훈 : 대통령표창(2005)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이른바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한 이래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그는 고향인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30일 광탄리에 군중들이 모이자 그는 독립기를 앞세우고 군중들을 향하여 “독립은 천운이니 사람의 힘이 미칠 바가 아니다. 일본인은 모두 본적지에 귀국하라. 예컨대 1개의 계란이라도 쌍계이면 2개의 계란에서 2개의 병아리가 나오는 것이니, 1국으로 함은 쉽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연설하였다. 이는 우리나라가 절대 일본에 병합될 수 없음과 독립의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어 그는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8) 최대현(崔大鉉, 1852.1.14~1931.11.6) 주소 : 京畿 楊平 江下 全壽 408 서훈 : 애국장(1995)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한말에는 의병장으로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였으며, 3·1운동 때에는 양평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같은 해 8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최대현은 대한제국 시기 오위장(五衛將) 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 사무소 앞에서 6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음 날인 4월 1일 양서면 도곡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4월 3일 강상·강하·양서·고읍 등 4면의 주민 약 4천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을 인솔하고 고읍면 옹암리(瓮岩里)와 용암리(龍岩里)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1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고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 최윤식(崔允植, 1896.2.24~1919.4.3) 주소 : 京畿 楊平 江下 全壽 501 서훈 : 애국장(2014) 1919년 4월 경기도 양평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피살, 순국하였다. 1919년 2월 중순 양평군에서 양부(養父)인 최대현(崔大鉉)이 작성한 고종 황제의 승하를 애도하는 제사를 올리기 위한 기부금 모집 취지문을 인쇄, 배포하였다. 이후 각 곳에서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최대현은 양평군 강하면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하였다. 그는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사무소 앞에서 면민 3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1일에는 양서면 도곡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최윤식은 4월 3일 오후 3시에 양부와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강상ㆍ강하ㆍ양서ㆍ고읍면 주민 4천여 명이 모인 대규모의 시위였다. 이들은 고읍면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양평면 양근리로 행진하였다. 이곳에서 시위가 한층 격렬하게 전개되자, 이를 탄압하기 위한 경찰의 발포로 3명이 순국하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 8명 가운데 3명도 끝내 순국하였다. 이날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최윤식도 일경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 한봉철(韓奉喆, 1898.3.2.~(1936)) 주소 : 京畿 楊平 葛山 楊根 154 서훈 : 독립장(2006)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군과 교전 중 희생되었다. 한봉철은 중등학교 시절 기독청년회에 입회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양평군청과 양평우편소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받았다. 또한 1920년 6월에는 기독교계의 장로인 한진리(韓眞履)의 권유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배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1925년 4월에는 혁청단(革靑團) 선언 강령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속되어 수일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봉철은 만주지역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하여 신활청년회(新活靑年會)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5년 12월 길림성 반석현(磐石縣)에서 남만청년총동맹(南滿靑年總同盟) 창립에 참여하였다. 남만청년총동맹은 1925년 11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결성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단체로 일반대중의 문맹을 퇴치하고 강연회와 토론회 및 신문강독회 등을 통해 청년 학생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신사상을 보급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봉철은 1929년 목릉현(穆稜縣)에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만주비서부(滿洲秘書部) 남만(南滿) 제1구역의 조직부장으로 청년운동 및 사회운동을 전개하였고 1933년 9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獨立師)의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34년 1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의 군수부장이 되었다. 만주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한봉철은 1936년 연길현(延吉縣)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한민족독립운동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98,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19,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양평군지???? 上, 양평군지편찬위원회, 2005 ????향맥 제25집, 양평3·1운동사????, 양평문화원, 2014

100주년을 맞이하는 3ㆍ1혁명의 정신과 몽양

100주년을 맞이하는 3ㆍ1혁명의 정신과 몽양    김삼웅(현대사연구가, 전 독립기념관장)    경장의 시대, 역사관 정립부터    대한민국은 지금 엄중한 역사의 전환기에 처해있다. 3ㆍ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반년여 앞둔 현시점은 역사의 정도(正道)와 정맥(正脈) 회복하여 남북화해와 민주공화정의 방향으로 발전하느냐, 식민지 잔재와 남북대결, 각종 적폐를 미봉한 채 전제적 퇴행을 거듭하느냐의 갈림길이다.  국가도 하나의 유기체에 속한다. 창업→수성→경장→쇠퇴의 과정을 걷게 된다. 자주독립과 반봉건 민주공화제를 기치로 봉기한 3ㆍ1혁명과 이를 바탕으로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창업이라면,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6ㆍ25공산침략 분쇄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는 수성에 해당한다. 지금은 경장(更張)의 시기다. 다른 용어로 말하면 개혁이다. 조선왕조가 병자ㆍ정묘 양란을 겪고도 경장을 하지 못한 채 낡은 봉건체제를 유지하다가 결국 왜적에게 국치를 당하고 말았다.  1884년의 갑신정변, 1894년의 동학혁명이나 갑오경장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성공했다면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1884년 갑신정변은 1868년 일본 메이지 유신에 불과 16년 차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이 근대적 국가개혁을 실천할 때 조선왕조는 기껏 왕권이나 강화시키는 칭제건원 따위로 미봉하고 말았다. 경장의 시기에 제대로 개혁을 하지 못하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세계문명사의 성장과 소멸과정을 연구한 아놀드 토인비는 명저『역사의 연구』에서 “창조적인 엘리트 집단이 부패하면 그 문명권은 몰락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투쟁으로 창업이 이루어지고, 민주화운동과 산업화로 어느 정도의 수성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일제잔재ㆍ군사독재잔재, 사대주의세력ㆍ냉전분단세력의 발호로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고 이들이 남긴 적폐는 우리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 이들 세력의 공동분모는 조선후기 집권층으로서 결국 망국의 주역이고 식민지의 적자인 ‘노론벽파’의 계열이거나 정신적 상속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로 이어진 30년이 넘은 군사독재는 예외로 치더라도 이명박ㆍ박근혜 집권 9년 동안 대한민국의 지배층이 얼마나 부패하고 나라가 어떻게 추락했는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국가권력의 사유화, 남북관계의 극한대결구도, 정보기관의 특수활동비 빼돌려 사복채우기, 정권 연장을 위한 부정선거, 공공기관과 은행 등 채용비리, 교과서 국정화 추진과 역사왜곡에 이르기까지 국가를 총체적인 위기에 빠뜨렸다. 한말 ‘삼정(三政)문란’의 현대판이다. 세월호참사는 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세월호의 선장은 배가 침몰되는 데도 “가만히 있으라”면서 가장 먼저 탈출하였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된다. 우리 국민은 가만히 있지 않았고 마침내 봉기하였다. 2017년의 촛불혁명은 침몰 직전의 대한민국호(號)를 건져놓았다. 이를 계기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적폐청산과 일정한 개혁이 추진중이지만, 이 기회에 국가의 총체적인 경장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국가는 다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3ㆍ1혁명의 ‘역사적 의미’    우리는 3ㆍ1혁명 100주년을 반년 앞두고 아직도 정명(正名)을 회복하지 못한 채 관제용어인 ‘3ㆍ1운동’이란 비칭을 사용하고 있다. 1919년 3~4월 한민족이 왜적의 총칼 앞에 생명을 내던지며 투쟁했던 ‘3ㆍ1혁명’의 역사적 의미부터 살펴본다.    첫째, 국치 9년만에 매국노ㆍ친일파ㆍ매판자본가ㆍ일부 종교세력을 제외한 많은 국민이 하나가 되어 왜정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선언하였다. 성별ㆍ세대ㆍ지역ㆍ종교ㆍ신분을 가리지 않고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독립시위에 참여한 것은 세계혁명사에서 초유의 일이다.  둘째, 전통적인 전제군주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민주공화제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이 법정에서 독립하면 민주공화제 국가를 수립할 것이라 진술하고,  1919년 3월 1일 시위현장에 살포된『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하여 이 해 9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발행된 지하신문은 한결같이 민주공화제를 추구했다. 4월 11일 상하이에서 건국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를 받아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셋째, 여성이 사상 처음으로 역사현장에 등장하였다. 4천년 동안 남성위주의 가부장제도에서  신음해온 여성들이 독립된 주체로서 봉기하였다. 국체보상운동이나 의병투쟁 등에 소수의 여성이 참여한 적은 있으나 자주적으로, 집단적으로 역사현장에 참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넷째, 신분해방의 측면이다. 조선사회의 ‘천민계급’에 속해 있던 기생ㆍ백정ㆍ광대 등 하층 민들까지 조국해방투쟁 전선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일제와 싸웠다. 이로써 군왕과  양반중심의 계급사회가 민중이 중심이 되는 평등주의사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섯째, 비폭력투쟁이다. 3ㆍ1혁명의 지도부는 처음부터 비폭력, 일원화, 대중화를 지침으로  하였다. 이 사실 역시 세계혁명사의 초유의 일이며, 지난해 촛불혁명의 모형이 되었다.  여섯째, 세계 피압박민족 해방투쟁의 봉화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중국의 5ㆍ4운동을 비롯하여 인도와 이집트, 중동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반식민지 해방투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곱째, 국치 이래 독립운동 일각에서 진행되어온 존왕주의 복벽운동을 중단시키고, 주권 불멸론 ㅡ 국민주권승계론에 따른 국민주권시대를 열었다. 전근대적인 신민(臣民) 의식에서 근대적 신민(新民) 의식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덟째, 국내 만이 아니라 해외에 나가 살던 이주민과 망명자들까지 하나로 묶어내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이루었다. 한인이 거주하는 세계 곳곳에서 독립 만세에 참여하였다.  아홉째, 독립의 당위성과 함께 일제의 패권주의와 침략성을 지적하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국제평화ㆍ평화공존ㆍ인도주의 등 이상을 제시하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코페르니쿠스적인, ‘후천개벽’의 대전환을 가져온 것이 기미년 3~4월 한민족이 성취한 3ㆍ1혁명이다. 이를 일컬어 어찌 ‘혁명’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시 일본정부와 신문은 폭동ㆍ난동ㆍ소우ㆍ반란 등으로 표현했지만, 중국의 신문ㆍ잡지는 조선혁명ㆍ대혁명ㆍ조선해방투쟁 등으로 썼다.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그렇게 불렀다.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헌헌법 초안에서는 전문에 ‘3ㆍ1혁명’으로 명시했던 것을 한민당 계열 일부 제헌의원들이 국회의장 이승만에게 신생정부를 뒤엎는 과격용어라고 진언, ‘혁명’이 ‘운동’으로 바뀌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 중의 하나로 꼽히는 에릭 홉스봄이 저서『혁명의 시대』에서 1789년(프랑스혁명)에서 1948년(제2차 세계대전 마무리)에 이르는 유럽사를 산업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2중혁명’으로 파악했는데, 우리의 3ㆍ1혁명은 앞에서 열거한 대로 ‘다중혁명’의 가치를 구현하였다. 근대적인 시민혁명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곧바로 식민지로 전락했던 우리 나라가 3ㆍ1혁명을 통해 자주독립과 더불어 근대적 시민혁명의 과정을 동시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3ㆍ1혁명은 어느날 갑자기, 우연하게, 즉흥적으로, 터져나온 역사의 산물이 아니다. 안으로는 동학농민전쟁ㆍ의병투쟁ㆍ독립협회ㆍ만민공동회ㆍ신민회ㆍ의열투쟁ㆍ무장전쟁 등 밑으로부터 전개되어 온 민중운동과, 밖으로는 1917년 레닌의 민족자주론,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론 등의 영향이 있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는 1916년부터 천도교 천도구국단의 무장봉기 준비를 비롯하여 기독교계 일각에서 거사 움직임이 있었고, 해외에서는 1917년 상하이에서 조소앙이 독립운동가 14인의 명의로 발표한 「대동단결선언」과, 1918년 여운형 중심의 신한청년당 창당, 1919년 초 길림에서 역시 조소앙이 작성하고 지도급 독립운동가 39인이 서명한「대한독립선언」과, 같은 해 도쿄 2ㆍ8학생 독립선언이 있었다. 모두 3ㆍ1혁명으로 흘러들어 온 역사의 맥락이었다.  우리는 3ㆍ1혁명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위대한 3ㆍ1혁명 정신을 ‘국가개혁’과 ‘남북화해ㆍ협력’의 정신적 지표로 설정하면서 적폐청산과, 특권이 없고 부패가 없는 민주공화제를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독립시위를 거역한 친일군상    3ㆍ1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벌써부터 학계나 사회일각에서 이를 지나치게 부풀리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해도 팩트는 사실과 진실에 기반해야 한다. 3ㆍ1혁명이 거족적ㆍ범민족적으로 독립시위에 나섰다는 표현은 다소 과장이다.  당시 인구 1,680만 중에서 연 인원 200만 이상이 독립시위에 참여했으니 ‘거족적’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고, 세계혁명사에 보기드문 현상이기는 하지만, 반대하는 자, 외면한 자가 더 많았고, 반대하는 계층도 다양했다. 심지어 무력으로 만세시위를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조선인들도 있었다.  3ㆍ1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위해서는 이런 분야까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그토록 엄중했던 상황에서, 특히 여성들이 목숨을 내걸고 만세시위에 나섰던 독립ㆍ애국정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19년 3~4월의 독립시위는 2016~17년 촛불시위처럼 평온한 상태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밝혀진 것만,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피검자 5만 2,770명, 불탄 민가 715채, 불탄 교회 47개소였다. 선열들은 생명을 내걸고 독립 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3ㆍ1혁명을 완강히 거부했던 반대세력이 적지 않았다. 첫 번째 부류는 매국5적을 비롯하여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던 골수 친일매국노들이다. 일제강점 9년 동안 조선사회의 지배층이 된 이들은 3ㆍ1혁명이 발발하자 불안공포에 떨면서 일본으로 피신한 자(백작 이지용과 한상룡)들도 있었고, 총독부에 무력진압을 요청한 자도 있었다. 이완용은 총독부기관지『매일신보』에 세 차례나 「황당한 유언(流言)에 미혹치 말라」는 글을 쓰고, 남작작위를 받은 이석주는 “힘으로 복종시키지 않으면 독립소요가 더욱 거세질 터이니, 반드시 무력으로 복종시키라”고 총독에게 주문했다.  두 번째 부류는 친일관료 그룹이다. 병탄과 함께 총독부의 고위 관료가 된 이들은 앞장 서서 시위 진압에 나섰다. 함경남도지사 이규완은 “일부 불령한 도배의 선동을 가차없이 처벌할 것”을 촉구하고, 황해지사 신응희는 “독립은 망설이니 경거망동치 말라”고 국민을 협박했다. 전북지사 이진호도 유사한 협박성 발언을 일삼았다.  세 번째 부류는 대지주 등 친일 매판자본가들이다. 호남의 대지주 현기봉은 남도지역을 순회하면서 농민들이 만세시위에 나서지 말도록 선동하고, 대구지역 자본가들은 ‘대구자제단’을 조직하여 “폭도가 날뛰지 못하도록” 자제토록 경고하고면서, 회원들에게 만세 부르는 사람들을 ‘밀고’하라고 지시했다.  네 번째 부류는 종교계의 일부세력이다. 동학에서 파생했으나 친일배족에 앞장선 시천교(侍天敎)의 포덕사 김기현은 “조선독립을 선언한 자는 천황폐하의 은덕을 망각한 무리”라고 망발하고, 병탄 후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일본조합기독교회’의 라일봉ㆍ신명균 목사 등은 각종 선전 팜플렛을 제작하여 만세시위에 나선 동포를 사탄이라고 매도하였다. 천주교와 구세군사관학교도 만세를 거부하고 반대 측에 섰다.  다섯 번째 부류는 일제로부터 은사금을 받은 유생들, 일본유학생 출신 등 지식인 계층, 경찰ㆍ공무원 등 상류층이다. 이들은 만세시위에 나선 이웃들을 갖은 감언이설로 겁박하였다. 경찰에 밀고하기도 하고 소작에서 제외시키기도 했다. 3ㆍ1혁명은 이와 같은 어려운 상태에서 두 달 동안 조선 8도에서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여성들이 독립만세시위에 나선 배경    ‘3ㆍ1혁명’이란 용어가 정명인 데에는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더욱 확인하게 된다. 3ㆍ1혁명 당시 피검자 중 학생과 교원이 2,355명이고 그중 여교사ㆍ여학생이 218명이었다. 1919년 당시 여자들의 취학률이 남자들의 100분의 1 수준도 안 되는 비율에 비하면 대단히 높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될 때 경기여고보생 최은희 등 수십 명의 여성들이 선언식에 참석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종로를 지나 서대문방면으로 행진하면서 여성 32명이 검거되었다. 당일 1.000여 명의 여학생이 YMCA 등과 연계하여 만세시위에 나섰다. 3월 3일에는 개성 호수돈 여학생들이 개성 시내에서 시위 행진을 하다 전원 구속되었으며, 회령에서는 남녀학생 5천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경기여고보생 이선경은 수원에서 혈복단(血復團)을 조직하여 시위하다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이화학당 고등과 1년 유관순은 충청도 목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ㆍ1혁명 중 여성들의 항일투쟁으로 가장 현저했던 것은 정신여학교 교원 김마리아, 동경유학생 황에스더,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이정숙 등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들 수 있다. 100여 명의 회원을 포섭하여 전국 13도에 조직망을 설치하고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사건’은 여성독립운동사와 더불어 여권신장운동사의 신기원이기도 하다.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시골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는 어김없이 여성들이 참여하고, 붙잡힌 여성 중에는 갖은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룬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철산에서는 일본 군경이 임신부의 복부에 칼을 찔러 난자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유관순 열사를 토막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외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만행이 전국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외국 선교사들의 기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돌이켜보면 반만 년의 가부장제의 남성중심사회에서 사회참여와 국권회복 투쟁에 여성이 등장한 것은 3ㆍ1혁명이 계기가 되었다. 이같은 현상만으로도 3ㆍ1혁명은 기존체제와 가치를 전복한 세계사적인 레블레이션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여성들이 3ㆍ1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경제사회적인 배경이 있다. 총독부의 가혹한 조세와 일제가 병탄 직후부터 3ㆍ1혁명 발발 직전까지 10년 동안 실시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을 들 수 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농지와 임야를 조선총독부가 멋대로 측량이라는 명분 아래 갈취하고, 조선농민들은 소작인 또는 중세 유럽형 농노로 만들었다. 조선 농민들은 7~80% 수준의 소작료로 수탈당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에 거미줄처럼 설치한 각종 경찰관서와 주재소의 순사ㆍ헌병들의 천인무도한 여성학살과 강간이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정절을 생명처럼 중히 여기던 여성들이 이에 맞서 자위의 깃발을 들고 일어난 것이다.  또한 한국민족을 말종시키기 위해 일본 남자에게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결혼 또는 첩으로 보낸다는 소문이 나돌면서(뒷날 성노예와 정신대로 현실화되었다) 여성들은 시골장날 장바구니를 던지고 만세시위에 나섰다.  국권을 되찾기 위한 여성들의 활약은 눈부스게 전개되었다.〈대한독립여자선언〉을 필두로 도쿄 2ㆍ8독립선언서에 참여한 여학생들,〈여학생 파리강화회의 청원서〉,〈열강국 부인회와 윌슨 미국대통령 부인에게 청원서〉,〈구국부인회 발기문〉,〈송죽결사대〉,〈대한민국애국부인회〉,〈조선애국부인회〉등 많은 여성들이 각종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국제기구에 청원하고 일제와 부단하게 싸웠다.  인도의 초대 수상이 된 네루는 항영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조선 여성들의 독립투쟁 소식을 듣고 딸에게 편지를 썼다. “너도 조선 소녀들을 본받으라”고.『세계사 편력』에 들어 있다.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3ㆍ1혁명 후 국내외에서는 몇 갈래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시도되었다. 국치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먼저 해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시도하였다. 1914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ㆍ이동휘 등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1917년 상하이에서 신규식ㆍ조소앙 등 17인이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창한 바 있다. 본격적인 임시정부의 수립은 3ㆍ1혁명 직후에 전개되었다.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조선이 독립국’ 임을 선언하였으니, 이를 대변하는 민족의 대표기구를 설립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치 이래 희망을 잃고 노예처럼 살던 한민족은 3ㆍ1혁명을 계기로 근대적 민족의식에 눈 뜨게 되고, 수 많은 지사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내에서 또는 해외 망명을 택해 독립전선에 서게 되었다.  1919년 3~4월에 국내외에서 도합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고려공화정부, 간도임시정부 등은 수립 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채 전단으로만 발표되었다.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 상하이, 한성의 임시정부였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1919년 4월 11일이다. 일제로부터 국토와 주권, 국민을 완전히 되찾아 ‘정식’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임시’로 세운 정부였다. 상하이에서는 국내외에서 모여든 조선의 각도 대표 29인이 4월 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임시헌장 10개조와 정부 관제를 채택,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비록 망명정부일 망정 유사 이래 처음으로 민주공화제 정치체제를 채택한 것이다.  임시헌장의 10개 조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제2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ㆍ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ㆍ언론ㆍ저작ㆍ출판ㆍ결사ㆍ집회ㆍ주소이전ㆍ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4조) 등 근대적 민주공화제의 헌법 내용을 담았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최고 수반인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심한 논란이 일었다. 내정된 국무총리 후보 이승만의 적격성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회영ㆍ신채호ㆍ박용만 등 무장독립운동계열 인사들이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하고, 의정원에서 이승만이 선출되자 이들은 회의장에서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절대독립을 방해하는 사람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이승만은 상하이로 오지 않고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한성정부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 사이 3ㆍ1혁명 이후 여러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각 정부가 추대한 정부 수반이나 각료가 상호 중복되어 있고 또 국내외 각지에 떨어져 활동하고 있어 미취임 상태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각각의 임시정부는 기능이 공백상태에 빠져들었고 원활한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단일정부로의 통합이 모색되었다.  상하이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이며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8월말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 및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의회 정부와의 통합과 정부개편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수차례의 논의 끝에 9월 6일 3개 정부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정부 수반의 호칭을 대통령으로 하는 새 헌법과 개선된 국무위원 명단이 발표되었다.  통합 임시정부가 정부 수반을 국무총리에서 대통령으로 바꾸게 된 것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의 줄기찬 요구 때문이었다. 국무총리로 선출되고서도 부임하지 않고 미국에서 활동해온 이승만은 국무총리 아닌 대통령으로 행세하였다. 그는 대통령 호칭에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미국식 정치와 문화에 깊숙히 젖어 있어서 미국 정부의 수반 프레지던트란 호칭이 의식에 각인된 것이다.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 직제에 대통령 직함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무총리 직제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한글로 대통령, 영어로 프레지던트를 자임한 것이다. 사소한 문제라 여길 지 모르지만 그는 헌법 위에 군림하는 오만함을 보였다. 해방 뒤 집권하여 몇 차례나 헌법을 뜯어고치고, 헌법을 무시하면서 멋대로 통치한 것은 따지고 보면 이때부터 ‘헌법 위에 군림’하는 태도에서 발원한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정부령 제1호와 제2호를 반포하여 내외 동포에게 납세를 전면 거부할 것(제1호)과, 적(일제)의 재판과 행정상의 모든 명령을 거부하라(제2호)는 강력한 포고문을 발령하였다. 그리고 국내조직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한 데 이어 해외에는 거류민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관리하에 두었다. 연통제는 지방행정조직이고 교통국은 비밀 통신조직이었다. 국내의 무장ㆍ사상투쟁을 위하여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두고 1개 면에 1개의 교통소를 설치하도록 하고, 연통제는 각 도와 각 군에 지방조직을 갖춰나갔다. 그러나 1920년 말부터 일제의 정보망에 걸려 국내의 지방조직이 파괴되고, 3ㆍ1혁명의 열기가 점차 사그라지면서 국내의 독립기금 송금과 청년들의 임시정부 참여가 크게 줄어들었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이승만 대통령 선임을 둘러싸고 외무총장 박용만과 교통총장 문창범이 취임을 거부한 데 이어 이회영ㆍ신채호 등 무장투쟁 주창자들이 상하이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가버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가 러시아 정부가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을 독자적으로 처리하여 물의를 일으키다가 1921년에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동녕 → 신규식→노백린이 차례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정부를 이끌만큼 불안정한 상태로 운영되었다.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1920년 12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이승만이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반만에 왔으니 임시 대통령으로서 무슨 방책을 준비해 온 것으로 믿고 기다렸으나, 아무런 방안도 내놓지 못하였다.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던 임정 요인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떠나는 이들을 붙잡아 포용하려는 대신 신규식ㆍ이동녕ㆍ이시영ㆍ노백린ㆍ손정도 등을 새국무위원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고자 하였다.  당시 만주, 간도, 연해주 등지에서는 민족독립을 위한 무장독립전쟁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어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대한광복군, 광복군총영, 의열단, 의군부, 대한신민단, 혈성단, 신대한청년회, 복황단, 창의단, 청년맹호단, 학생광복단. 자위단 등이 결성되고, 특히 1911년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강력한 군사훈련을 통해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하였다.  만주 각지에서 조직된 무장독립군 세력은 연대하여 봉오동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전투(1920년 10월)를 통해 국치 이래 최대의 항일대첩을 이루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독선과 독주로 요인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실현성이 취약한 ‘외교독립론’에 빠져 있었다.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되고, 이를 이유로 이승만은 1921년 5월 상하이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의 1년 반 동안 임시정부의 활동은 이로써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떠났다. 얼마 후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하였다.  이런 분란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일제패망 때까지 27년 동안 항일민족해방투쟁의 본거지로서 독립전쟁을 지휘하였다.    몽양 여운형과 3ㆍ1혁명    여운형은 1918년 8월 20일경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선우혁ㆍ한진교ㆍ장덕수ㆍ김철ㆍ조동호와 한국근현대사에서 최초의 근대적 정당으로 평가되는 신한청년당을 창립하였다. 창립취지서에서 먼저 독립을 완성하고 독립을 회복한 다음에는 문화적 도덕적으로 민족을 개혁하여 신대한민족을 만들며 학술과 산업을 일으켜 실력을 양성해서 대한민족의 신문화가 전인류에게 위대한 행복을 주도록 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신한청년당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개혁주의, 국제평화주의를 내세우고, 상해 대한인민단ㆍ대한인거류민단 등 민단사업에 주력하면서 기관지로「신한청년」을 발간하였다.  초창기에는 당원이 극소수이므로 부서를 정하지 않고 여운형이 대표 겸 총무로서 당의 모든 사무를 담당하였으나, 당원이 증가하고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게 되자 1918년 11월 하순에 당헌을 제정하고 강령을 문서화했으며 조직을 체계화하는 한편 부서를 정하였다. 이때부터 여운형ㆍ서병호ㆍ김인전 3인이 당무를 전담하는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여운형이 신한청년당 창립을 서두른 것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1917년 10월혁명으로 러시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고, 제1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1월 전후처리의 일환으로 민족자결주의를 포함하는 14개 조항의 원칙을 제시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은 본지와는 상관없이 한국을 비롯 각국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반제투쟁의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윌슨의 성명 제5항의 “식민지에 관한 요구를 공평히 조절할 것. 이것을 행할 때 식민지 인민의 이익을 존중할 것”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식민지의 해방’이 아니라 독일 등 패전국의 식민지를 재분배하려는 의도였다. 여운형은 미국에 유학중인 동생과 서신을 통해 그곳의 정보를 듣고 행동에 나섰다. 신한청년당을 창설한 배경이다.  제1차 대전이 종결되면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자신의 특사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을 중국에 파견하여 종전 후의 강화회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중국도 대표를 파견하도록 권고케 하였다. 1918년 11월 크레인이 상하이에 도착하자 중국 정부는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크레인은 “지금 파리에서 개최되고 있는 세계평화회의는 각국 모두 중대한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 그 영향력도 또한 큰 것이다.(…) 피압박 민족에 대해서는 그 해방을 강조함에 따라 피압박민족에게 있어서는 그 해방을 도모하는데 최적의 기회이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대표를 파견해 피압박 상황을 말하고 그 해방을 도모해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여운형은 강연을 듣고, 그의 숙소를 방문하여 한민족의 시민지 사정을 설명하고 한국민족 대표의 파견도 가능할 것인지의 여부를 물었다. 크레인으로부터 미국정부의 의사는 알 수 없으나 개인적으로는 지원하겠다는 응답을 얻었다.  숙소로 돌아온 여운형은 장덕수와 만나 중요한 두 가지 사항을 결정하였다. 조선독립의 청원서 작성과 누군가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키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은 3일 간에 걸쳐 장덕수의 숙소에서 두 통의 청원서를 영문으로 작성하였다. 하나는 윌슨 대통령에게, 또 하나는 대표 파견이 어려울 경우, 상하이에서 활동중인 미국언론인 밀라드를 통해 전달하려는 계획이었다. 청원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은 4천년의 역사를 가졌고, 동양의 문화에 적지 않게 공헌을 했던 나라이지만 한일합병 후는 민족의 정치적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정치, 경제, 교육, 종교상의 압박을 받아, 동양문화는 물론 20세기 문화에 공헌할 수도 없게 되어 동양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특히 일본, 중국, 러시아 3개국 간의 균형이 깨져서 동양평화를 교란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이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이 문제를 잘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여운형, 신문조서」)    두 사람은 이 문서를 누구의 이름으로 제출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한 끝에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기로 결심한다.    형님은 청원서 한 통은 클레인에게 주어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도록 부탁하고, 또 한 통은 당시 상해에서 발간되던 월간잡지『밀러드 리뷰(Millord Revieu)』의 사장인 밀러드에게 주어 우리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못 가게 될 경우, 대신 제출해달라고 부탁하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진정서를 작성하고 보니 제출자가 문제였다.  세계 각국의 대표가 참석하는 국제회의에 개인 명의로 제출할 수 없음은 상식 이전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상해에 머물고 있던 여러 동지들을 모아 ‘벼락정당’을 조직하고 그 당명으로 보내게 되었다.(여운홍, 증언)    신한청년당은 비록 ‘벼락정당’으로 조직되었지만, 김규식의 파리 파송,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국내의 3ㆍ1혁명,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운형은 동지들과 상의 끝에 파리에 파견할 대표로 톈진(天津)에 머물고 있는, 영어에 능숙한 김규식을 입당시킴과 동시에 이사장에 추대하여 신한청년당의 대표이며 한국대표로 파견키로 하고, 경비는 여러 채널을 통해 마련하였다. 장덕수는 부산 백산상회 안희재로부터 2천 원, 김철은 천도교에서 3만 원, 김규식이 1천 원을 내놓는 등 모두 10만 원의 활동자금이 마련되어서 김규식의 파리행이 이루어졌다.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프랑스 우편선 편으로 상하이를 출발하여 3월 13일 파리에 도착, 시내의 불라베라는 시인 부부의 집에 사무실을 차리고 타이피스트와 통역을 구하여 ‘한국공보관’을 설치하는 등 즉각 활동에 들어갔다.    당시 국내외 각처의 지사들은 모두 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미국과 하와이에서,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에서, 그리고 중국 광동성에서 대표 파견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여운형이 파송한 김규식만이 회의 중에 파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규식 파송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여운형의 장래의 갈림길이 되었다. 각처의 단체들이 하고자 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일을 성공적으로 이룩하므로 해서 전도사 여운형은 무명 씨의 신분에서 일약 독립운동가 여운형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사람’ 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는데 이 칭호는 그에게 천금의 무게를 안겨 주었다.(이정식,『김규식의 생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파견 문제는 국내외 한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큰 희망이고 당면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각처에서 대표파견을 시도했으나 모두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국과 하와이의 국민회에서는 이승만과 민찬호를 파송하려 했으나 여권발급이 되지 않아 무산되었다. 중국 광동성에서 활동하던 신규식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규식은 파리로 떠나기에 앞서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이것이 국내로 전해져 3ㆍ1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될 줄은 떠나는 김규식도, 거사를 주도한 여운형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의 증언.    김 박사가 상하이에서 파리에 가기로 결정하고 여러 가지 문제들을 토의하던 중 그는 어떻게 하면 한국 민족의 주장과 청원이 보다 더 효과적으로 전 세계에 선포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했는데 김 박사는 다음과 같은 소견을 말했어요. “내가 떠나가기는 가되 세계 각국의 대표들이 내가 누군지 알 리가 없다 .지도상에 보더라도 조선 반도는 쌀알만큼 밖에 나타나 있지 않고, 코리아란 나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내가 만일 정식 대표라면 회의석상에서 좌석이 있고 발언이 있겠지만 나는 방청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가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겠다. 그러나 나 혼자의 말만을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신한청년당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며 독립을 선언해야 되겠다. 가는 사람은 희생을 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고, 우리나라의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다.(이정식,『김규식의 생애』)    김규식을 파리로 파송한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의 촉발과 자금마련을 위해 각처로 당원을 파견하였다. 국내에는 김철ㆍ서병호ㆍ선우혁을 보내고, 일본에는 몇 차례 나누어 파견하였다. 1차 조소앙, 2차 장덕수, 3차 이광수였다.  여운형 자신은 1919년 1월 20일경 상하이를 출발하여 만주와 해삼위로 갔다. 도중에 베이징에서 손문을 만나 국제정세를 논의하였다. 손문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여운형은 만주 동삼성과 해삼위에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신한청년당 창설과 김규식의 파송을 알리고, 지금이 독립운동으로 총궐기할 적기임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기금의 마련은 여의치 못하였다.  여운형이 만주, 해삼위를 방문하기 직전인 1918년 11월 13일 국치 이후 최초의 독립선언서인「대한독립선언」이 만주 길림에서 발표되었다. 여준ㆍ김동삼ㆍ유동열ㆍ신채호ㆍ김좌진ㆍ신팔균ㆍ서일ㆍ김규식ㆍ이동녕 등 중광단(重光團) 인사들을 중심으로 만주ㆍ러시아ㆍ미국을 비롯하여 해외에 있던 망명 독립운동가 39명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조소앙이 집필하였다.  내용은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ㆍ강박ㆍ불법ㆍ무력을 통한 것이며, 일본의 합방 결과는 정치 경제적 압박으로 종족을 말살하고, 종교를 압박하고,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문화를 저해하는 것으로 인류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합방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정의의 칼로 나라를 훔친 적을 도결(屠決)하여 운명을 개척하자”고 호소하면서,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이니 목숨을 아끼지 말고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수할 것을 주창하였다.  여운형은 1919년 1월 20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먼저 만주 지린성 지방으로 가서 여준을 비롯하여 이 지방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파리강화회의가 기회임을 설명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였다. 여운형은 이어 노령 연해주로 가서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이동녕ㆍ박은식ㆍ조완구 등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의 파견을 알리고 노령의 한인대표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권고하였으며, 이것이 독립운동 봉기의 절호의 기회임을 역설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들 중 다수가 상하이로 와서 함께 독립운동을 대폭 강화할 것을 약속하였다. 여운형은 이곳에서 1개월간 체류하는 동안 김약연ㆍ정재면을 만나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했으며 일부는 상하이로 오기로 약속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었다.  여운형은 또한 당시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군사령관 가이다(체코인)을 찾아가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협조를 얻고,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고 한국독립을 주창하는 선전물을 영문으로 작성하여 수만 매를 연합군들에게 배포하여 독립운동의 홍보활동을 수행하였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의 1918년 11월~1919년 2월의 활동은 1919년 3ㆍ1혁명 봉기와 독립운동의 비약적 고양에 하나의 진원을 이루고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여운형은 하얼빈에서 고국의 3ㆍ1혁명 발발 소식을 듣고 발길을 재촉하여 1919년 3월 8일 상하이로 돌아왔다. 귀로에 일본경찰과 밀정의 추격을 재치 있게 따돌리면서 무사히 상하이 프랑스 조계로 귀환할 수 있었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이 도쿄의 2ㆍ8독립선언과 국내의 3ㆍ1혁명 발발에 깊숙이 작용하였다는 최근의 연구 평가가 따른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은 동경의 2ㆍ8독립선언과 국내의 3ㆍ1운동에도 깊숙이 관계했다. 신한청년당의 장덕수는 중국인 유모(劉某) 씨로 위장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접촉해 그 상황을 상해로 보고 했고, 여운홍은 여운형의 지시로 1919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말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했다. 그는 동경 2ㆍ8독립선언의 주도자인 최팔용을 만나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움직임을 전해듣고 2월 8일 동경 YMCA회관에서 독립선언이 행해지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여운홍은 장덕수를 만나 여운형의 지시를 전한 후 국내로 잠입했다. 여운형의 지시에 따라 여운홍이 3ㆍ1 독립선언의 ‘민족대표’인 이승훈ㆍ최남선ㆍ함태영ㆍ이갑성과 만난 것은 2월 27일이었다.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일이며, 동경에서 목격한 2ㆍ8독립선언의 진상을 전한 여운홍은 그날 상해로 탈출했다. 한편 장덕수는 2월 20일경 재차 서울에 돌아온 후 인천에 잠복해 있다 경찰에 검거됐다.(정병준,『몽양 여운형평전』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창당을 전후하여 은밀히 국내로 들어왔다. 1918년 8월 13~19일까지였다. 평북 정주에서 열린 장로교회 제14차 총회에 상하이 대표로 참석키 위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1917년 말에 기각되었던 목사 파견을 청원하고, 이것은 받아들여졌다.  그가 대단히 분주한 시점에 국내에 온 목적은 또 있었다. 장로파의 실력자 이승훈과 양전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구체적 대담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국제정세를 알리고 국내에서 기회를 보아 거사할 것을 의논하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6개월 여 뒤 이승훈과 양전백은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3ㆍ1혁명에 참여하였다. 여운형은 서울에 잠입하여 이상재 등과 만나 내외 정세를 논의하고, 9월 말에 상하이로 돌아갔다. 그는 3ㆍ1혁명의 불쏘시개 역할을 수행하였다.   김삼웅 프로필    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주필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제7대 독립기념관장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현)    주요 저서   〈몽양 여운형평전〉외 40여권

3.1운동의 숨은 주역(5)

3.1운동의 숨은 주역(5) 신한청년당 결성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 주제발표  몽양 여운형-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주역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은 국제사회에 독립을 호소하고, 3.1운동이라는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이끌어냈다는 측면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수많은 애국 지사들이 상해로 망명했고, 이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적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논의는 1919년 3월 말, 여운형을 비롯한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신규식 중심의 동제사와 함께 상하이 프랑스조계 바오창루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국내를 비롯하여 일본, 만주, 연해주, 미주 등지에서 여러 인사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어 이곳에서 협의에 협의를 거듭하였다. 그 결과 4월 11일, 정식으로 임시의정원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 선포하고 관제를 의결하고, 국무총리와 국무원을 선출하였다. 이리하여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의 근거지는 독립임시사무소였고, 이를 설치하고 유지한 것은 바로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신한청년당이었던 것이다. 또 독립운동의 중앙기관으로서 임시정부를 상하이에 둘 수 있었던 것도 여운형이 이동녕, 조완구, 조성환 등 만주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을 설득하여 동의를 얻어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정에서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의 역할은 여러 측면에서 드러난다. 제일 먼저 임시정부 수립 직후 그 내부에서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맡은 직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구, 김규식, 김인전, 김철, 도인권, 백남규, 서병호, 선우혁, 송병조, 신국권, 여운형, 여운홍, 이광수, 이규서, 이원익, 이유필, 조동호, 조소앙 등이 내무부, 외무부, 군무부 등 각 부처와 의정원에서 자리를 잡고 활동하였다. 또 1919년 4월 10일 제 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할 때 총 29명의 참석자 가운데 9명이 신한청년당이었던 점에서도 확인된다.  여운형은 1919년 8월 5일부터 1920년 1월 22일까지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을 맡았으며 의정원 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여운형은 한인거류민단 상하이 단장으로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교포사회 내에 다양한 교육 및 사회활동을 펼쳐나갔다. 또 1919년 7월 1일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내무부령으로 상하이에 다시 설립된 대한적십자회에서 이사로 활동하였다.  주제 발표의 맺음말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된 시기는 여운형이 외교독립론에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타개책으로 군사적 기초를 다지기 위해 김구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한 직후였다. 이사장 김구와 한국노병회의 이사로 활동했던 여운형은 당시 상황에서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을 전환하고 새로운 활로를 찾아겸서 활동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여운형은 임시정부 개조를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추진했던 것과 동일한 시기에 무장투쟁을 위한 활동도 병행하고 있었다. 이처럼 여운형은 조선독립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외교독립론적인 활동이건 무장독립론적인 활동이건 가리지 않고 포용력 있게 준비하고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그가 사회주의를 통한 독립운동 모색, 중국혁명을 통한 독립운동 모색에 몰두한 것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삶을 되짚어볼 때, 어떤 사상이나 이념도 조국의 독립과 해방, 인민에 기초한 하나된 민족민주국가 건설이라는 목표와 신념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상 *이 기사는 변은진 교수의 주제 발표 내용을 거의 본문 그대로 옮긴 것임을 밝힙니다.  

3.1운동의 숨은 주역(4)

3.1운동의 숨은 주역(4) 신한청년당 결성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 주제발표  몽양 여운형- 3.1운동의 불씨를 지피다김규식의 파견 결정과 동시에 몽양 여운형은 당원들을 국내외 각지로 파견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 조선독립에 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전 민족적인 궐기를 촉구하였다. 당원의 파견은 1919년 1월 중순 무렵부터 추진되었고, 여운형 자신도 1월 20일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출발했다. 이것으로 보아 이러한 활동은 김규식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 결정과 동시에 계획 준비된 것이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여운형은 조선동포가 거주하는 각지에서 동시에 2.8독립선언이나 3.1독립선언 같은 것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획하고 준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각지 파견의 목적 중에는 김규식의 파리행과 그곳에서의 활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도 있었다.  신한청년당원들은 조소앙, 장덕수 등은 일본으로 파견되어 조선유학생들의 궐기를 조직하였다. 또 김철, 서병호, 선우혁 등은 국내로 파견되어 이상재, 손병희, 이승훈 등의 민족지도자들을 만나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만세운동을 촉구하였다. 한편, 이광수는 중국 내 각지로 파견되었으며, 여운형 자신은 만주의 장춘과 하얼빈에 들렸다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체제 기간으로 보면 약 1달 정도 되는 기간에 몽양의 강연은 연해주와 간도, 블라디보스톡 등의 동포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실제로 3월 8일과 13일에는 용정촌을 시작으로 만주 한인의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3월 17일에는 니콜리스크에서 시작되어 연해주 한인의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그곳 체재기간 동안 여운형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고, 해당 지역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노력한 결과, 1919년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이 발표되었고, 국내에서는 3.1독립선언이 공표되었다. 또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1919년 내내 한반도 전역에서 만세시위운동이 끊이지 않게 되었고, 이러한 시위운동은 해외 동포사회로도 이어졌다.  이렇게 볼 때,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이야말로 3.1운동의 불씨를 지피고 기획했던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으로 독립운동 진영 안팎에서 여운형의 위상은 상당히 높아졌다.  만세 시위로 조선이 독립을 쟁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국내외 전체 민중에 의한 독립만세의 물결은 이로부터 25년 뒤 제 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세계열강이 조선의 독립문제를 논의할 때 각국에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확인시켜주는 주요한 근거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이 3.1운동에 미친 공로에 대해서는 당시 상해임시정부와 각지의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8월 26일 자 기사에는 여운형이 크레인에게 보낸 청원서가 첫 발단이 되었으며, 신한청년당 김규식, 장덕수, 여운형 등을 프랑스와 일본 도쿄를 비롯해 간도 연해주 및 국내로 파견한 것이 표면상 정숙했던 삼천이레 장차 일대풍운이 일어날 징조였다고 서술하였다. 오늘날 학계에서도 이에 대해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에 미친 영향을 자못 컸다. -3.1운동 발발의 진원지는 상해 신한청년당이었다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연인원 2백만명이 참가한 3.1운동은 국망 이후 10년 간 침잠되어 있던 민족의 에너지를 표면으로 끌어낸 대사변이었는데, 여운형의 청원서는 이러한 민족적 에너지의 대폭발을 초래한 중요한 기폭제가 된 것이다. 등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3.1운동의 숨은 주역(3)

3.1운동의 숨은 주역(3) 신한청년당 결성 100주년 심포지움  주제 발표 변은진 몽양 여운형- 2. 신한청년당 창당과 독립청원 늘 세계 정세 변화를 주시하고 그동안 상하이 독립운동단체들과의 관계, 한인사회 속에서의 신뢰를 바탕으로 1918년 신한청년당을 창당한다.  1918년 중순 경, 몽양은 조만간 유럽에서 전쟁이 끝날 것임을 예측하고,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는 조선의 독립운동에서 청년들의 조직화는 특히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장덕수도 이런 의견에 적극 동조하였다. 그래서 여운형은 인식을 같이 한는 장덕수를 비롯하여 조동호, 신석우, 선우혁, 김철, 한진교 등 6명과 매주 토요일마다 정세토론 모임을 갖고 세계대전 이후 활동을 논의하였다.  이런 와중에 9월 기독교 노회를 명분으로 국내에 들어와 이승흔, 이상재 등을 만나 국내외 정세와 국내의 역할을 합의한 후 10월 상하이로 돌아온다. 그리고 11월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여운형은 전후의 강화회의가 조선의 독립운동에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 판단, 구체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1918년 11월 28일 신한청년당이 결성되는데 기관지인 ‘신한청년’의 기록에서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결성의 주요 인사들은 주로 동제사의 소장층으로 신한청년당이 한말의 신민회에서 1910년대 초 동제사로, 1910년 후반의 신한청년당으로 민족 운동의 이념과 방략이 계승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신한청년당 창당 배경에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대처하기 위함과 미국의 윌슨 대통령 앞으로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주체의 필요성, 그리고 우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 위한 파견주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 11월 말의 여운형의 바쁜 행보 속에서 추진 배경이 드러나고 있다.  종전 직후 11월 하순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인 찰스 크레인이 상하이를 방문한다. 여운형은 한인 교민단장 자경으로 11월 27일 환영오찬회에 참석하고, 이 자리에서 파리강화회의가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해결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다. 여운형은 별도의 면담을 통해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해 독립을 호소할 경우 국제적 지원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에 여운형은 크레인이 강조한 민족자결주의, 피압박 민족의 해방,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 파견 수용 등에 크게 고무되어 열강에 ᄒᆞᆫ국독립을 호소하려는 외교적 방법의 독립운동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기고자 한다.  몽양은 11월 27일 당일에 장덕수 조동호 등을 만나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하고, 11월 28일 6명의 모임을 개편하여 정식으로 신한청년당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29일에는 재중국 신한청년당 총무 여운형 명의로 크레인에게 편지를 작성하여 28일의 독립청원서와 함께 전달하였다. 이것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크레인을 통해 윌슨 대통령에게 문서를 전달하여 조선의 상황을 알리고자 함이었다.   11월 28일 몽양 여운형, 조동호, 신석우, 선우혁, 김철, 한진교 등 6명의 구성원에다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로 정해진 김규식, 형식적으로 당수를 맡았던 서병호를 포함해 8명으로 출발했던 것 같다. 이후 곧바로 청년동지들이 합류하여 3.1운동 직후에는 국내나 일본에서 온 망명자가 늘어나면서 안정근, 김구, 이광수, 송병조, 이유필 등 다수가 참여하여 당원이 5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창당한 지 1년 뒤인 1919년 12월 1일자로 기관지 신한청년에는 이광수와 박은식이 쓴 창간사가 있다. 기관지 신한청년에는 1919년 신한청년당이 6개 부서에 150여명의 당원을 둔 거대조직임을 알 수 있다. 당의 최상의 목적은 대한독립이며, 그 이념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개혁주의 국제평화주의 등에 기조하고 있다. 당 강령은 아래와 같다. - 대한독립은 기한다.- 사회개조를 실행한다.- 세계대동을 촉성한다.  신한청년당의 해산과 관련해서는 진술이 엇갈리기도 하지만, 1922년 12월 중순 자진해산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시정부가 생기면서 파리의 김규식은 신한청년당과 임시정부 사이에서 종종 혼동되는 문제가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복합적인 정세 변화에 따라 임시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진 해산을 결정하게 되었다.  정리하면 신한청년당은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제 1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둔 국제정세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독립운동의 호기를 포착하려는 적극적인 대응책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다. 1917년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 14명이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민족대회 소집을 제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즉각적인 호응이나 적극적인 독립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하자, 이를 계승하는 새로운 시도로 신한청년당이 모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결성과 초기 활동은 도쿄에서의 2.8선언과 국내에서의 3.1독립선언을 거쳐 국내외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었다.  한편,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프랑스의 우편선을 타고 상하이를 출발하여 3월 13일 파리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한국공보국을 설치하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며 4월 10일에는 공보국회보를 발행하였다. 공보국에는 스위스 유학 중이던 이관용이 사무를 맡고, 5월 초에 상하이에서 온 김탕이 대표관을, 6월에는 황기환이 서기장을 맡았으며, 조소앙 여운홍 등이 합류했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일행의 성과는 미미했다. 일본의 방해와 전승국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의 독립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인이 일본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상황에서 국제사회에 그 부당함을 알리고 조선인이 이에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주겠다는 것에도 목적이 있었다. 조선의 상황과 입장을 널리 알리고 독립을 호소하는 데는 강화회의만큼 효과적인 장은 없었던 것이다.  정리하면, 조선 독립의 여부를 떠나서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처음으로 조선독립에 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조선사회 내에 가라앉았던 독립의지를 고무시키는 데 파리강화회의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당하고 독립청원서를 윌슨에게 전달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과정은 제 1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읽어내는 여운형의 탁월한 선견지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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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더불어민주당 여주양평 국회의원 예비후보 백종덕

경자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경자년의 자(子)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자축인묘의 처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새로운 것 같습니다. 또한 자(子)는 끝을 의미하며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의 시작도 자시에서 출발하여 다시 자시로 끝을 맺나 봅니다. 그렇게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보니 문득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작년 한 해에 나는 무엇을 했고 또 연초의 마음은 어떠했고 지금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국내외적으로도 바쁘게 돌아간 시간이었을 뿐 아니라 저 개인적으로도 참 활발히 움직였던 한 해였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여주시양평군 지역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으면서 가정리 전차부대 상설화 계획도 철회시키게 되었고, 농민기본소득, 여주 택시기사 쉼터, 양동산업단지 유치, 양평군 노인종합복지관 이전 건립 및 경강선 복선화를 위한 역할 등 참으로 보람된 일들을 일구며 살아온 한 해였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저 혼자 일궈낸 일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협조가 있었고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주신 가정리 마을 주민분들, 택시 기사님들, 마을 어르신들 등등 모두가 저에게 지혜와 가르침을 주셨고 부족한 저에게 과분한 사랑을 주셨기에 많은 일들이 추진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경자년 새해를 맞이하여 다시 한번 초심으로 돌아가 저에게 묻습니다. 너는 올해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떤 마음을 가질 것인가? 제가 참 좋아하는 말 중에 옳은 것을 취하여 이로움을 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선택은 정의롭게, 행동은 지혜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저는 올 한 해도 듣고 또 듣고, 묻고 또 물을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어리석음을 질타하는 목소리이던, 저에게 들려주시는 지혜의 가르침이던, 부족한 용기를 북돋는 격려의 말씀이던 가리지 않고 잘 새겨듣겠습니다. 배움은 깨달음으로 그리고 깨달음은 실행으로 가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정의로운 선택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고자 굳건히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보살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새해에 하시는 일마다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며, 모든 가정에 평화가 깃들기를 간절히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백종덕 배상

더불어민주당 여주양평지역 대의원회 개최

  더불어민주당 여주양평지역위원회(위원장 백종덕)가 지난 8월 5일, 양평쉐르빌호텔에서 대의원대회를 개최했다. 지난 7월 11일 지역위원장으로 확정된 백종덕 변호사는 사무국장에 류경수(여주), 양평연락소장에 맹주철을 내정하고 사무소는 여주에 두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종덕 위원장 주재로 열린 대의원대회는 여주양평 총 116명의 대의원과 전국대의원대회에 참석하여 당대표 및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전국대의원 40명 및 상무위원 80명을 승인했다. 상무위원에는 당연직대의원 15명, 지역대의원 21명, 전국대의원 19명을 승인했으며, 이로써 여주양평지역위원회 최고의결기관과 조직체계 구성을 완료했다.   이날 대의원대회에는 정동균 양평군수, 이항진 여주시장, 경기도당위원장에 단독 입후보한 김경협 국회의원이 참석했으며, 김진표 당대표 후보와 설훈 최고위원 후보 보좌관 등이 참석했다.   **이날 개최된 대의원대회도 권리당원에 의해서 대의원을 선출한 것이 아니라 승인한 것이지만, 지금까지와는 약간의 차별성이 느껴진다고 하겠다. 양평군민은 그동안 지역정당의 구실에 대해 전혀 경험한 바가 없기 때문에 지역민주당에 대해서도 기대를 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역대로 양평의 각 정당은 정당이 할 수 있는 제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정치를 집권자에게 일임하며 어떤 목소리도 낸 바가 없었다. 이번에 민주당은 집권당이자 지역에서도 집권하였고, 촛불로 태어난 정당이라고 스스로 정의하는 만큼- 지역에서 정당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지가 관심거리다.   민주당의 대부격인 고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고 했다. 이제 백종덕 위원장 호가 어떻게 시민을 깨우고, 시민을 조직해 나가는지 기대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지역민주당의 손에 양평의 운명이 많은 부분 걸려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집권을 한 만큼, 여주 양평 수장 및 정치권에 대한 올바른 견제도 바로 지역 민주당의 몫이기 때문이다.

6.13 승리, 정동균 양평군수 당선자에게 바란다

      6월 18일, 언론 보도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여당이 압승을 거둔 6.13 지방선거와 관련하여 “우리가 받았던 높은 지지는 굉장히 두려운 것이며, 어개가 많이 무거워졌다는 정도가 아니라 등골이 서늘해지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정도의 두려움”이라고 말했다. “지지에 답하지 못하면 기대는 금새 실망으로 바뀔 수 있다.”고 했다.   문재인대통령은 “지역, 색깔론으로 국민을 편 가르는 정치는 계속될 수 없게 됐다”고 선거 결과에 의미를 두면서도 지방권력을 상대로 한 감찰계획을 보고받았다. 검찰, 경찰도 감찰 대상에 포함된다.   양평의 선거 결과도 놀라웠다. 민주당이 군수, 도의원3명(비례 1명 포함), 군의원(2명)이 당선됐다. 정동균 양평군수 당선자를 비롯하여 더불어민주당 당선자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등골이 서늘하게 두려운 일”이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양평군민은 그동안 공무원군수의 행정갑질에 원망이 높았다. 집행부는 위탁사업체에 갑질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같은 공무원 중에서도 원칙을 지키는 공무원을 좌천시키는 일도 허다했다. 공무원사회조차 내편 네편으로 가르고 갑질을 해댔던 정권의 몰락은 군민의 기쁨이다.   이제, 새롭게 탄생한 더불어민주당 정동균 당선자의 양평은 억울했던 군민과 좌천당한 공무원과 이유도 안 되게 밀려났던 사업체들의 손을 들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야말로 정의가 바로 서는 양평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양평은 사전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앞섰지만 본 선거에서는 뒤졌다. 판을 뒤집은 것은 관외투표였다. 또한, 양평군민들의 시선 밖에 있던 도의원은 예상을 뒤엎고 모두 이겼지만, 군의회는 여소야대 국면을 맞게 되었다. 지난번과 동일하게 민주당 의원은 2명뿐이다.   더군다나 정동균 당선자는 행정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고, 여소야대 국면에서 해내야 할 일들은 산적해 있다. 선거전에서 통합의 정치를 외쳤던 만큼 협치의 정신이 절실할 것이다. 또한, 행정경험이 없는 만큼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일하는 공무원들과는 믿음과 신뢰로 군정을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정동균 양평군수 당선자가 성공적으로 군수직을 수행하는데 가장 절대적인 요소 중 하나는 – 공무원과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행정갑질을 했던 계보인지, 원칙과 소신을 지켰던 소신파인지를 정확히 가리고, 일벌백계로 삼을 일과 함께 손을 잡고 군민을 위해 봉사할 공무원을 알아봐주고 대우해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는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 벌을 받고, 벌을 받아야 할 자가 상을 받는 일이 많았다. 바로 이런 점을 정동균 양평군수 당선자가 교훈으로 삼아 군정에 임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1천여 명 조직을 이끌어갈 수장의 역할이 결코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만만치 않은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군민이 편안하다. 정동균 당선자가 소신파 공무원들에게 함께 이해볼만한 군수라는 평가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으면 한다.   다시 문재인 대통령의 심중을 헤아려본다. 6.13 지방선거 민주당 대승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문재인 바람”이라고 본다. 특히, 양평은 그렇다고 보여진다. 이 지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등골이 서늘하다”는 표현과 “감찰계획보고”를 받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으로 인해 얻어진 결과에 대해 국민이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준 것 같다. 적폐청산과 평화시대에 어느 정도 성과를 낸 정부는 이제 지방정권에도 시선을 주고 있다.  

6.13 스케치, 은혜재단 1인 시위 왜 하나?

      양평군 장애인복지재단인 은혜재단의 대표이사 건에 대해 서울고등법원 승소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은혜재단 정상화를 위한 1인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5월 31일, 유선영 원장은 6.13 선거 출정식마다 찾아가 1인 시위를 벌였다. 고등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양평군은 여주지청 판결도 모두 끝나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여주지청의 결과에 따라 항소가 이어지면 그야말로 부지하세월이지만, 양평군의 권한은 고등법원 판결보다 현실적이다.   양평군 이 사건의 본질은 양평군 군수와 공무원의 정의로운 판단의 문제이자, 공무원의 근본적인 힘의 문제로 보여진다. 애초에 사기, 횡령, 보조금위반 등으로 형을 살고 나온 설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은혜재단 자체의 아사회의 편에 서는 것인 옳은 것인지- 양평군수와 담당자가 어느 편에 설 것인지의 문제가 있었다. 이채롭게도 양평군은 설립자이자 사기, 횡령, 보조금위반 전과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고등법원의 판결에는 김종인 대표이사가 간사에게 맡겨둔 사직서에 대한 양평군 공무원의 행위에 대해- 담당공무원은 김 대표이사와의 통화에서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알면서도 이를 접수함이란 판결문 내용이 있다. 양평군수는 이런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즉시 은혜재단의 임시이사를 선정한다.   사회복지사업법이 임시이사를 양평군처럼 속전속결로 선정하라고 만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최0한이 대표이사와 이사회의 결정에 반하는 임시이사요청서에 양평군은 즉각적으로 3명의 임시이사를 선정한다.   법 위에 행정 고등법원의 승소판결이 나오고, 양평군수와 담당자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한 판결문이 있지만- 양평군은 다른 이유를 대서 판결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중앙부처인 보건복지부에서도 여주지원의 판결이 끝난 후, 사태의 향방을 물으라는 것이 양평군 주장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남지원 판결로 승소한 이후, 등기이사가 양평군이 선임한 새 이사진으로 바뀌었다.   양평군은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은 무시하고 있지만, 여주지원의 결과는 기다려봐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 역시 행정의 힘이다. 행정의 힘은 코에도 걸고, 귀에도 걸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이 있다. 심지어는 중앙부처도 활용한다. 이번에는 보건복지부가 방패인 셈이고, 어떤 경우엔 중앙 권고도 무시한다.   행정의 달인 컴퓨터를 잘 아는 사람은 좋은 기술력으로 사회에 긍정적인 힘을 미칠 수도 있지만, 해커처럼 사회를 교란할 수도 있다. 행정의 달인이라는 3선 군수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은혜재단사태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양평사회에서 행정의 달인들은 너무 많은 사태와 눈물을 부른다.   *별첨 1. 사건개요 *별첨 2. 서울고등법원 판결문 부분  **       *별첨 1. <<사건개요>> 장애인복지재단 은혜재단(이하 은혜재단)은 설립자 최모씨가 2014년 12월 사기, 횡령, 보조금관리에관한법률위반 등으로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받은 후, 다시 업무에 관여하면서 불화가 시작되었다. 은혜재단은 설립자 최모씨가 수감 중일 때 대표이사가 김모씨로 바뀌었다. 설립자 최씨는 출소 이후, 시설장은 김 대표이사에게 이사장직 사퇴를 요구해왔다. 2017년 1월 5일 임시이사회가 개최되고, 대표이사와 이사 등이 “한꺼번에 여러 명의 이사가 사임할 경우 재단의 운영과 업무가 마비될 수도 있으므로 일괄 사임을 보류하고, 추후 이사회 의결을 거쳐서 한 명씩 사임과 선임을 처리하는 것으로 결의한다. 이사들은 사임서를 대표이사에게 맡기면서- ”새로운 임원을 선임하고 나면 갖고 계셨다가 제출되도록 해달라“고 전제했다. 대표이사 김모씨는 2017년 1월 16일 재단의 간사 최0한에게 사직서를 교부하고, 최0한(설립자 아들)은 2017년 1월 18일, 양평군에 사회복지사업법 규정에 따른 임시이사 선임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대표이사 김모씨는 최0한 간사에게 양평군에 제출하지 말 것과 **양평군청 담당자 이모주사에게도 전화하여 확인하고, 사직서를 받으면 안 된다고 전하고, 이에 이모주사도 알겠다고 답변한다. 또한, 김대표이사는 양평군수에게 민원서류를 제출하여 ‘임시이사요청’을 즉시 반려해 달라는 공문을 제출한다. 하지만, 양평군수는 2017년 2월 15일, 재단 임시이사로 황00, 손0, 임00을 선임하고, 3월 17일 임시이사회를 개최하여 선임하고, 4월 5일에는 전00을 대표이사로 선임한다. 6월 30일에는 재단이사를 6인에서 8인으로 변경하고 이사 및 감사를 변경하는 내용의 정관변경을 인가한다.   이후, 양방간에 고소전이 시작된다. 김 대표이사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은 성남지원에서 김 대표이사가 패한다.(승소에 따라 등기가 바뀐다.) 하지만, 고등법원의 판결에서는 김 대표이사가 승소한다.     *별첨 2. <<서울고등법원 판결(주요부분)>> 1. 최0한과 양평군 담당공무원:2017년 1월 18일자 임시이사 선임요청 공문은 김 대표이사의 명시적 의사에 반한 것이고, 이사회의 결의를 거친 것도 아님. 담당공무원은 김 대표이사와의 통화에서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알면서도 이를 접수함.   2. 양평군수에게 보낸 민원서류; 김 대표이사가 1월 18일, 양평군수에게 공문을 보내- 은혜재단 임시이사 선임 요청의 건 반려 요청한 사실로 선임요청에 문제가 있음을 명확히 함.   3. 양평군 법정기간 위반; 그럼에도 양평군수는; 최0한의 사직서를 접수하고, 황00, 손0, 임00을 임시이사로 선임하고 재단에 통보하여 법정기간을 명백히 위반한 점.   4. 양평군수 새 이사선임은 무효; 양평군수가 임시이사를 선임한 2017년 2월 15일은 기존 이사가 모두 임기 중이었는 바, 양평군수가 2월 15일자로 임시이사 3명을 선임한 것은 그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하여 무효라고 봄이 상당하다.   5. 김종인 대표이사 권한 인정; 후임 대표이사 및 이사가 선임될 때가지 종전의 직무를 계속하여 수행할 권한이 인정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김 대표이사 및 이사로서 직무를 수행할 권한이 없다는 주장은 이유 없는 바, 가처분결정을 취소하고, 가처분신청을 기각하기로 판결한다. -이상.    

6.13 스케치, 양평교육공청회(군수후보, 기초의원 후보)

5월 31일 용문고등학교 강당에서는 6.13 지방선거 양평군 군수후보, 기초의원 후보와 양평교육지원협의회가 주최한 교육공청회가 열렸다. 주최 측 질문은 양평군 교육예산, 시승격과 농어촌특례, 기초학력향상, 교육시설 등이었다.   질문지가 미리 후보들에게 전달된 질문들이었지만, 후보마다 다양한 변별력을 보여주었다. 어떤 후보는 질문에 엉뚱한 답변을 해서 다른 후보에게 동문서답을 하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또 다른 후보는 바로 앞 사람의 답변을 믹스매치하는 놀라운 순발력으로 복사답안을 내놓기도 했다.   교육예산에 후보들도 양평 교육예산이 전체예산의 1% 내외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0.7에서 0.8%에 불과하다고 유상진 후보가 지적했다. 후보들은 모두 양평군 교육예산을 현재의 세 배 이상 높이겠다고 답변했다. 특히, 정동균 후보는 경기도지사와 중앙정부부처 등 집권당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에 유상진 후보는 예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군수의 마인드가 아니냐고 말했다.   시승격과 농어촌특례를 묻는 질문에서 김승남 후보는 여주의 경우, 시승격을 위해 인구 5만의 도시를 만드는 등 자연인구증가에 따르지 않은 점이 있다며, 또한 자연인구증가에 따라 시승격이 되더라도 농어촌특례를 일정기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충격을 완화하겠다고 답변했다. 대부분의 후보들이 시승격을 위해 무리수를 두지는 않겠다는 의견이었다.   기초학력.대체로 후보들은 이 문제가 현실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그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교육은 양평의 가장 비중 있는 항목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리얼리티와는 무관하게 행정적으로 접근하는 경향도 보였다.   기초학력저하를 묻는 질문에서 한 후보가 “인문학”을 이야기해서 옆의 후보로부터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 문제는 학생 개개인의 문제임과 동시에 전체의 문제인 측면이 있어서 다각도로 접근해서 개개인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식을 찾기가 수월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문제는 일단, 현장의 모습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데 있다. 사교육 시장마저도 소수인원으로 학습되지 않는 경우는 보통 ‘진도를 빼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있으면 해결방법도 있는 법이다.   교육 발전. 대부분 후보들은 ‘혁신학교’와 ‘꿈의 학교’ 및 유명무실한 장소의 전환이나 ‘진로교육’ 등이라고 답변했다. 혁신학교나 꿈의학교는 지금까지 양평군의 인구유입의 요소로 작용할 정도로 인구증가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답변은 없었다. 군수후보들이 평소에 교육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나 고민이 있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군수가 교육전문가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고 깊이 있는 고민이 있어야만- 새로운 교육에 대한 제안을 발굴하고, 육성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염려가 드는 대목이었다.   양평교육지원협의회는 군수 후보를 중심으로 공청회가 진행되는 측면이 있긴 했지만, 교육현장에서 비롯된 심도 있는 질문으로 후보자들의 전문성이 드러나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공청회였다. 답변을 다음 순번으로 넘어가게 하는 방식도 자연스러웠다. 선거를 통해 열린 공청회나 토론회 등이 선거 이후에도 일반화 되어 토론문화 정착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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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군 4인 가구, 정부 긴급재난지원금 87만1천원 지급 받을 수 있어

양평군은 코로나19로 인해 침체된 소비를 진작시키고, 어려운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지난 4일부터 정부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정부가 발표한 긴급재난지원금 액수는 4인 이상 가구 100만원, 3인 가구 80만원, 2인 가구 60만원, 1인 가구 40만원이나, 재난기본소득을 이미 지급하고 있는 양평군과 경기도는 국비에 해당되는 지원금(약 87%)만 지급하며, 따라서 4인 이상 가구는 87만1천원, 3인 가구는 69만7천원, 2인 가구는 52만3천원, 1인 가구는 34만천원의 정부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위의 기준에 따라 4인 가구인 양평군민은 양평군 재난기본소득 48만원, 경기도 재난기본소득 40만원, 정부 긴급재난지원금 87만1천원을 모두 합한 총 175만1천원을 받게 된다.   양평군은 5월 4일, 정부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대상 중 긴급지원이 필요한 가구(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 기초연금, 장애인 연금 대상자)인 8,752가구에 3,520백만원을 지급 완료했다.   긴급지원 대상이 아닌 가구는 긴급재난지원금 홈페이지(https://www.긴급재난지원금.kr)에서 세대원 수를 확인 할 수 있다. 5월 11일부터 세대주가 소지하고 있는 신용카드 및 체크카드사 홈페이지에서 긴급재난지원금 지원을 신청할 수 있으며, 5월 18일부터는 양평통보(지역화폐)로도 온라인 신청이 가능하다.   오프라인 신청은 신용카드 및 체크카드 연계 은행과 주소지 읍·면사무소에 방문하여 신청할 수 있으며, 은행에서는 5월 18일부터, 읍·면사무소에서는 5월 25일부터 신청 가능하다. 주소지 읍·면사무소에서 신청하는 경우 해당 금액이 충전된 선불카드로 지급 받게 된다.   정부 긴급재난지원금 신청은 공적 마스크 구매 방법과 같이 세대주의 출생연도 끝자리를 기준으로 신청 가능한 요일이 제한된다. 오프라인 신청의 경우 토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평일에 방문 신청 가능하며, 온라인 신청의 경우 5월 16일부터 요일 제한없이 누구나 신청 가능하다.   고령자, 장애인이 혼자 거주하는 경우 찾아가는 신청 서비스를 제공한다. 대상자가 읍·면사무소에 전화 신청 시 대상자를 직접 방문하여 신청서를 접수한 후 재방문하여 지원금을 지급한다.   지급된 긴급재난지원금은 8월 31일까지 경기도 내에서 사용해야 하며, 사용하지 않은 금액은 환급되지 않는다. 다만, 양평통보의 경우에는 기존 양평통보 사용처와 동일하게 양평군 내에서만 사용 가능하며 백화점, 대형마트, 온라인 쇼핑몰, 유흥업소 등에서는 사용할 수 없고 기부하는 것도 가능하다.   양평군 관계자는 “현재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위한 T/F팀을 구성해 운영 중이다”라며 “군민들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차질없이 지급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평군-NH농협은행 양평군지부, 재난기본소득 지급 업무 협약 체결

양평군은 지난 6일 재난기본소득 지급을 위해 NH농협은행 양평군지부와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양평군 재난기본소득’ 지급을 위한 첫 발걸음 내딛었다.   이날 협약식에는 정동균 양평군수, 오정수 NH농협은행 양평군지부장 등이 참석했고, ‘양평군 재난기본소득 운영 계획’ 소개, 인사말씀, 협약서 서명 순으로 진행됐다.   양평군과 NH농협은행 양평군지부는 군민이 쉽고 편리하게 재난기본소득을 지급받을 수 있도록 협조해 나갈 예정이며, 코로나19 재난의 조기 종식과 주민의 생활 안정 및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양평군은 지난 3월 26일 코로나 19로 인한 지역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양평군 재난기본소득’ 지급을 결정했고, 4월 1일 양평군의회 긴급 임시회를 개최해 1인당 지급금액을 12만원으로 결정했다.   지급대상은 2020년 3월 31일 24시 이전부터 배부일까지 계속해서 양평군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군민으로 5만6천여 세대, 11만7천여 명이다. 지급형식은 농협은행에서 발행한 정액 기프트 카드로 지급되며, 카드발급시기 등을 고려해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읍.면사무소를 통해 세대별로 지급 될 예정이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오늘 이 자리는 ‘양평군 재난기본소득’을 금융기관의 우수한 기술과 시스템을 활용해 더 신속하고 편리하게 지급할 수 있도록 금융기관과 협력체계를 구축하고자 마련됐다”며, “‘양평군 재난기본소득’이 지역경제의 선순환을 만드는 마중물이 되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양평군, 6억 원 이상의 주택 매매계약시 자금조달계획서 제출의무화

  양평군에서는 부동산거래신고법 시행령이 개정됨에 따라 오는 3월 13일부터 6억 원 이상의 주택 매매 계약시 부동산거래신고서와 함께 자금조달계획서 제출이 의무화 되었다고 밝혔다.   이번 시행령 개정은 지난해 12월16일 부동산 대책 후속조치의 일환으로, 지난 2월21일 부동산 거래신고기한 단축(기존 60일에서 30일로 변경) 및 부동산거래해제신고 의무화에 이은 추가 개정 사항이다.   그 간 양평군은 비규제지역으로 자금조달계획서를 제출하지 않았지만, 시행령 개정에 따라 6억원 이상의 주택 매매계약에 대해서는 부동산거래 신고 시 자금조달계획서를 제출되도록 변경되었다. 하지만 양평군은 조정대상지역 또는 투기과열지역에 해당되지 않는 비규제지역에 해당되므로, 별도의 자금조달계획에 관한 증빙서류는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   자금조달계획서를 제출하지 않을 경우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최근 2년간 양평군에 접수 된 부동산거래신고 중 6억 원 이상 아파트 거래신고건수는 1건 이었고, 단독주택의 경우 6억원 이상 부동산거래신고가 연평균 약 60건 정도 접수되고 있다.   권오실 토지정보과장은 “부동산 거래신고법 개정으로 주민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현수막 게재 및 SNS를 통해 홍보를 추진하고 있다”며, “부동산 투기 예방을 위해 부동산 실거래 신고 제도를 철저히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평군, 용문터미널~잠실간 광역버스 신규노선 개통

양평군은 용문터미널에서 잠실 간 광역버스 신규노선이 개통 돼 3월 20일부터 첫 운행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금번 개통될 광역버스는 공공이 노선을 소유하고 입찰경쟁을 통해 선정된 민간 운송사업자에게 일정기간 운영권을 위탁하는 ‘노선입찰제’ 방식으로 경기도와 양평군이 서비스를 책임진다. 양평군은 1개 노선, 2대의 버스로 일 8회(평일기준, 주말/공휴일은 6회) 운행예정이다. 노선번호는 G9311번으로 기점은 용문터미널, 종점은 잠실 종합환승센터로 중간에 양평터미널, 양평시장, 군청사거리, 아신리, 국수리, 양수리 등 6개의 정류소에 정차한다.   군민들이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을 위해 ‘친절기사 인증제’를 도입, 버스 운수종사자 전원이 공공에서 운영하는 친절교육을 반드시 이수하도록 하고, 사후 수시 모니터링을 통한 검증된 종사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해 친절 운행을 유도할 계획이다.   또한, 41인승 리무진 버스를 투입해 차량을 고급화하였고 좌석에서 편하게 인터넷을 즐길 수 있는 공공 WIFi와 차내 공기질 개선을 위한 공기청정시설, 휴대전화 및 모바일 장치 등을 충전할 수 있는 USB 충전포트 등의 다양한 승객 편의장치가 설치된다.   정차정류소가 적고 비용도 2천9백원(일반 현금기준)으로 책정돼 기존 시내버스 및 시외버스에 비해 시간과 요금을 절약할 수 있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여근구 교통과장은 “이번 신규 개통되는 광역버스는 군민이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며, “추후 군민들의 이동권 보장을 위해 노선확대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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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군립미술관, 관람객을 위한 새로운 열린 공간 마련

양평군립미술관(관장 류민자)은 미술관 초입의 야외공간에 컨테이너 3개동을 설치해 아트랩(Art Lab) 전시공간을 조성하고 오는 4월 1일부터 운영한다. 또한, 미술관 1층의 기존 카페를 개조해 커뮤니티 공간으로 재 구성해 휴게공간과 인문학강의를 듣는 강의실로 활용가치를 넓히게 된다.   미술관의 2020년 신규 사업인 컨테이너 아트 랩은 양평거주 청년작가들의 창작 기반 조성을 위해 기획됐으며,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 특화 사업으로 전시를 통해 평면, 입체, 공예 등 각 분야의 예술가들이 상호 소통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컨테이너 아트랩 전시는 전반기(20.4.1.-7.31)와 후반기(20.8.1.-12.31)로 나눠 진행되며, 관내 거주 작가 및 관내 작업실에서 활동중인 작가 중 50세 이하의 청년작가들을 대상으로 전시공간을 제공한다. 저소득 작가, 지역 생활문화예술가, 장애인 작가 등에게 우선적으로 지원 될 예정이다.   금년 상반기 컨테이너 아트랩 첫 전시는『12명의 청년』을 테마로 진행되며, 선정된 작가는 1개월 동안 각각의 컨테이너 공간에서 전시를 진행하게 된다.   전시를 원하는 작가들은 군립미술관 홈페이지(www.ymuseum.org)에서 신청서를 다운받아 문화체육과로 우편 또는 방문 접수하면 된다.   기존 카페 공간을 재 구성한 커뮤니티 공간은 문턱이 낮은 미술관을 지향하는 운영 정책에 맞춰 미술관 방문객들이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장소로 변모 한다. 전시관련 영상과 미술관의 각종 활동영상을 상영하고 미술 관련 도서를 비치해 예술과 함께하는 휴게 공간으로 조성 할 계획이다.   한편, 양평군립미술관은 현재 코로나19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하여 임시휴관 중이며, 감염병 위기 경보가 해제 후 개관일정을 홈페이지에 공지할 예정이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양평군립미술관 홈페이지 또는 전화(031-775-8515)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양평 용문산 산나물축제

양평 용문산 산나물축제  1부 4월 26-28일 용문역 일원서 개최 2부 5월 3-5일 용문산관광지 일원서 개최 매년 용문산 1부, 용문역 2부로 나뉘어 5월에 개최되던 산나물축제가 올해는 산나물채취기간을 고려하여 용문역 1부, 용문산 관장지 2부로 개최된다. 5월 3일부터 5일까지 용문산 관광지에서 열리는 2부 행사에는 임금님 진상행렬과 산나물전국요리대회, 산나물보물찾기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함께 박애리, 김원준, 정수라, 마야 등 인기가수 공연이 펼쳐진다.   2019 경기관광 대표축제로 선정된 양평 용문산 산나물축제는 양평군과 양평군축제추진위원회 주최로 열리며, 개막식은 5월 3일(금) 오전 11시에 개최된다. 개막식에서는 임금님 진상행렬을 시작으로 산나물 비빔밥 나눔행사와 산나물 전국 요리대회가 열리며, 산남물 홍보영상 UCC공모전과 조리체험관 리버마켓, 산나물 역사사진관과 문화예술 공연 등이 준비되어 있다.   대한민국 최고 용문산 산나물은 조선 중기 편찬된 동국여지지에 진상품으로 용문산 산나물이 최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거의 모든 지리지 등의 기록에서 용문산 산나물(특히 취나물)을 진상품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문헌을 바탕으로 매 회 개최되는 진상행렬 행사에 맞춰 지난 4월 1일부터 12일 간 “왕을 찾아라”는 선발전을 통해 왕좌를 결정했다. 산나물 축제 UCC공모전은 (3.18-4.12) 양평 용문산 산나물축제를 홍보하는 재미있는 영상 공모전으로써 사전에 매체를 통해 지역 내외에 홍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산나물 요리왕은 전국민 대상으로 산나물 요리에 관심 있는 사람을 참여자들이 5월 4일 13시-15시 용문산 관광지 주무대에서 경쟁한다. 본선 진출자 중 10개 팀을 선정하여 수상할 예정이다. 또한,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1100인 분의 비빔밥 나눔행사를 통해 누구에게나 비빔밥이 제공된다.   다양한 즐길거리 중에는 부스체험이 있다. 즐거운 체험전시, 건강한 산나물요리, 키즈 존, 전시 산촌체럼, 친환경농업박물관 기획전시 및 독립선언서 필사체험과 장아찌 등 산나물을 이용한 음식만들기도 눈길을 끈다. 즐거운 체험 전시에는 – 산촌문화 추억의 먹거리, 한지공예 전시체험, 이목을 작가의 스마일 퍼포먼스, 농촌체럼마을 산나물홍보관, 산나물 역사전시관, 리버마켓 등이 있다. 또한 건강한 산나물 요리로- 산촌주막 산나물 조리체험관에서 명장과 함께 하는 산나물 장아찌 산나물 만두 조리체험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키즈존 공연 –오브제극, 판타지 무용극, 어린이 뮤지컬, 마술 등 다양한 공연이 준비되어 있다.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에서는 성미마을 원주이씨 기획전이 열리고, 다도체험과 쿠킹클래스도 진행된다. 이밖에도 산나물 보물찾기, 산촌놀이터, 가족엽서쓰기, 양평어린이 벼룩시장, 산나물 공방 등이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전시조리체험관에서는 산나물 요리전시 및 지평막걸리, 은행막걸리, 세븐브로이 맥주 등이 전시되며, 용문산 사진관에서는 현장에서 사진을 즉석 인화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동물체험농장, 전통혼례, 한복체험이 가능하며, 분경전시관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용문산 산나물축제장은 매표소까지 1.친환경농특산물 장터길을 따라 올라가면, 입구에 2.양평농촌나드리가 있고, 우측으로 3. 공연장 쉼터 리버마켓, 5. 산나물 예술장터가 있으며, 그 아래로 6. 친환경농업박물관이 자리한다. 농업박물관에서 맞은 편 방향으로 7. 산촌체험마당, 8 산나물 힐링마당, 9 산나물 꽃정원이 있다. 일주문 옆으로는  10 전시조리체험관, 11 산촌주막, 12 산나물 홍보관, 13 산나물 역사사진전이 열리며, 아래 쪽으로 14 산나물 한우식당가와 16 동물체험농장이 있고, 마당 건너로 주무대인 공연장이 있다. 교통편은 경의중앙선을 이용하여 용문역에서 하차하여 구) 용문버스터미널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또한 현장에서는 나들이 소품도 대여가 가능하다.

양평 세미원, 봄빛 가득한 ‘봄빛정원문화제’ 개최

양평 세미원, 봄빛 가득한 ‘봄빛정원문화제’ 개최   개막일, 선착순 500명에게 연꽃씨 증정 6만2천 평 세미원 정원에 봄꽃 가득 피어나    양평 두물머리에 위치한 물과 꽃의 정원 세미원이 봄을 맞아 ‘봄, 화려함을 펼치다’를 주제로 봄빛정원문화제를 개최한다. 4월 5일(금)부터 5월 26일(일)까지 열리는 이번 봄빛정원문화제에서는 봄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행사들을 만날 수 있다.  특별히 이번 봄빛정원문화제 개막일인 4월 5일(금)에는 관람객 선착순 500명에게 발아된 연꽃씨를 증정한다. 미세먼지를 비롯한 환경오염 문제가 대두되는 요즘, 정화를 상징하는 연꽃씨를 나누는 행사를 통해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되새기자는 취지이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와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행사들도 준비되어 있다. 6만2천 평 규모의 세미원 야외정원에는 다양한 봄꽃이 피어, 봄빛 가득한 모습으로 관람객들을 맞을 계획이다. 튤립, 향수선화, 히아신스, 잉글랜드 양귀비, 수련 등이 구역 별로 봄꽃zone을 구성하고 있어 한껏 봄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야외전시 ▲이재형 라이트아트展, ▲김명희 테라코타展 ‘엄마의 정원’이 정원을 더욱 풍성하게 채울 예정이다.  알록달록 메모지에 사랑과 소망을 담은 메시지를 소원 나무에 거는 ‘소원지 쓰기’, 입으로 향으로 봄을 느낄 수 있는 ‘봄꽃차 마시기’를 비롯해 ‘봄꽃 그리기’, ‘인증샷 이벤트’ 등 행사에 직접 참여하며 봄빛정원문화제를 즐길 수 있다.    따사로운 설렘의 계절을 놓치지 않고 만끽하기 위해 세미원으로 봄나들이를 떠나보면 어떨까.    세미원은 휴관일 없이 매일 아침 9시부터 운영하며 5월부터는 밤 10시까지 야간개장을 진행한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www.semiwon.or.kr)를 참조하거나 031-775-1835로 문의하면 된다.

3ㆍ1운동 100주년 행사‘1천 여명 그날의 함성’

양평에서 3ㆍ1운동 100주년 행사‘1천 여명 그날의 함성’재현 - 기념식에서 양평군 청소년이 기획ㆍ개최하는 연극 ‘잊혀진 길을 걷다’ 관람 - 양평 독립운동가 94인을 기리는 만장 행렬 양평읍 시가지 행진 등 진행   양평군(군수 정동균)은 1일 오전 9시 30분 양평군민회관에서 ‘과거와 현재가 만나 미래로 이어지는 3ㆍ1운동정신’이란 주제로 양평 3ㆍ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기념식은 양평3ㆍ1운동기념사업회의 연출을 더해 이전 행사보다 차별화를 강조했다. 국민의례 중 국기에 대한 경례는 독립유공자 후손인 변준우 군과 김윤서 양이 낭독하고, 애국가1,2절은 해금 연주와 함께 조정규 소리꾼이 독립군 아리랑을 불렀으며, 3,4절은 조현초등학교 아빠합창단이 지금의 애국가를 힘차게 불렀다. 이어서 용문중, 서종중, 양수중, 단월중, 양평중 등 양평군 학생들로 구성된 청소년 연극 ‘잊혀진 길을 걷다’라는 제목으로 창작연극이 이어졌고, 변도상 양평3.1운동 기념사업회장이 독립유공자 유족을 소개했다. 이후 윤광선 광복회장과 유족 등 8명이 3ㆍ1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다함께 만세삼창을 외치며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했다. 행사에는 정동균 양평군수를 비롯해 이정우 양평군의회의장과 양평지역의 군ㆍ도의원, 보훈단체, 국가유공자, 양평군민 등 400여 명이 참석해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기념식이 끝난 후 참석한 유족, 내빈 및 양평군민 등은 양평독립운동가 94인을 기념하기 위한 길놀이가 진행됐다. 길놀이에는 1,000여명의 많은 인파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양평 시가지를 지나 만세터(물맑은양평시장)로 이어져 다양한 문화행사 등 양평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만장퍼포먼스, 단심대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 다양한 행사가 이어졌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위대한 선조들이 만들어낸 자긍심 넘치는 역사를 가슴에 품고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그리고 주민의 화합과 지역의 발전을 위해 함께 나가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라고 기념사를 통해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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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빨간 벽

 빨간 벽 브리타 테켄트럽 지음 | 김서정 옮김 | 봄봄출판사      새로운 세계를 여는 첫 발걸음에 관한 우화    벽은 경계의 상징이다. 그 경계 설정을 아주 당연히 받아들이고 그것이 주는 안전감에 안도하며 사는 것이 보통 우리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 경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소수 변종의 사람들이 간간히 출현하는데, 그들의 문제제기가 대부분 허튼 소리로 치부되지만 때론 진일보한 새로운 세계로의 시작을 열기도 한다. 그 새로운 세계로의 첫 발걸음을 떼려는 꼬마 생쥐를 만나보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빨간 벽 안에 호기심 많은 꼬마생쥐가 있었습니다. 꼬마 쥐는 그 벽안에 살고 있지만 그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 벽과 벽 넘어 세상에 대해 질문 합니다. “야옹아, 이 벽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지 않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있는 거야. 벽은 우리를 지켜 줘, 꼬마 생쥐야 저 바깥쪽은 위험해.”    “곰 할어버지, 저 빨간 벽은 왜 세워진 거예요?” “기억이 안 나는 구나,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단다. 이제 내 삶의 일부야.” “저 벽 뒤에 뭐가 있는지 아니, 여우야?” “벽 뒤에 뭐가 있든 무슨 상관이야, 뭐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럼 행복해 져”    “사자야, 저 벽 뒤는 어떤 세상이야?” “아무것도 없어. 그냥 커다랗고 시커먼 없음이 있지.”   꼬마 생쥐는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벽 너머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듭니다. 그리고 그 파랑새의 도움으로 이전에는 상상하지 도 못했던 색색 가지 아름다운 벽 너머 세상을 만나게 되지요.   한 번 뛰어 넘은 벽은 더 이상 벽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파랑새는 말합니다. “꼬마 생쥐야, 네 인생에는 수많은 벽이 있을 거야. 어떤 벽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지만 대부분은 네 스스로 만들게 돼. 하지만 네가 마음과 생각을 열어 놓는다면 그 벽들은 사라질 거야” 꼬마 생쥐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본, 벽 넘어 세상을 알려주려고 돌아가다가 알게 됩니다. 처음부터 빨간 벽은 없었다는 것을요.    브리타의 최근 신작인<Little Mouse and the Red Wall>가 2018년 11월에 <빨간 벽>으로 국내에 번역 출판되었다. 꼬마 쥐와 빨간 벽이란 영어제목이 벽과 꼬마 쥐의 관계를 더 잘 보여주는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꼬마 쥐를 뺀 ‘빨간 벽’이란 제목이 더 근사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독자가 표지 디자인의 빨간 벽 위에 서있는 꼬마 쥐를 더 유심히 살피고 이미지를 통해 꼬마 쥐와 빨간 벽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 세련된 유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그림책의 스토리 와 전체그림의 세련된 연출, 모두가 훌륭했지만 특히 책 표지는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도 다 읽고 덮은 후에도 시선을 한참 머물게 한다. 나는 간결한 표지의 빨간 벽을 통해 평소에 의식하지 않았던 내안의 많은 벽들이 의식되어 졌다. 내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운명의 궤적은 실은 내가 만든 경계 의 벽 이라는 궤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나는 오늘 세상에서 가장 높고도 가장 낮은 벽을 만났다.                         브리타 테켄트럽 Britta Teckentrup / united agents     작가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나고 자랐다. 런던에서 St Martin 's College(성마틴예술학교) 와 Royal College of Art(왕실예술학교)에서 미술과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17여 년 동안 런던에서 활동하였으며 현재는 남편과 독일로 돌아가 베르린에 살면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작품 삽화의 스타일은 수제콜라주와 디지털콜라주의 혼합과 판화를 기반으로 한다. 1993년부터 작품을 시작한 이래 20 개국 이상 100여 개가 넘는 어린이 그림책을 집필하며 삽화를 발표해 오고 있다. 그녀는 세계가 주목하는 훌륭한 집필자 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중 한 명이다. 국내에 번역 발표된 그림책으로 <별을 사랑한 두더지>,<여우나무>,<사계절>,<날씨이야기>, <누구지, 누구?>, <손에 손잡고>등이 있다.          

[그림책 ] 한밤중에 강남귀신

   김지연 지음 | 김지연 그림 | 모래알 |   잠 못 드는 밤! 귀신의 자장가가 필요한 날 도 있다  아이 학교도서관에 들른 어느 날, 새로 들어온 책 더미에서 귀신에 홀린 듯 집어 든 ‘한밤중에 강남귀신’, 책 제목을 읽는 순간 “그래 강남에는 귀신들이 많지!” 하며 조롱석인 웃음이 피식 나왔다. 왠지 강남이란 이미지가 나에게는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못 할욕망을 쫓는 그 무엇의 이미지여서 일까? 여하튼, 강렬한 구도와 삼색 대비와 보여주는 표지에서부터 몰입되는 걸 느끼며, 첫 장을 펼쳤다.  강남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가장 화려한 외형에 글로벌한 비즈니스가 이루어지고 대중문화와 유행을 선도하는 격변의 도시 아닌가!  이 곳 강남에, 한번 놀면 밤이 새도록 놀고, 한번 자면 한 오백년을 잔다는 잠귀신 노리가 강남의 빌딩숲 사이에 유적으로 보호되는 오래되고 낡은 기와집에서 500년 만에 깨어난다.  노리가 잠들기 전 강남의 모습은 온대간대 없다. 밤이 되어도 건물에는 불이 꺼지지 않고, 사람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리를 활보한다. 그 속에서 잠귀신 노리가 같이 놀 친구 한 명을 발견하는데, 두 눈은 퀭하고 흐느적흐느적 걷는 것이 영락없는 귀신으로 본 것이다.   밤새 같이 놀자며 말을 걸어오는 노리를 보고 졸려 눈도 잘 못 뜨며 걷던 자미가 깜짝 놀라지만, 눈 깜짝할 순간에 노리 손에 이끌려 하늘을 날아 강을 건너 한 고요한 숲에 내려앉는다.  그 곳에서 노리는 각시귀신! 억울귀신! 몽달귀신! 아기귀신! 오백년 전에 같이 놀던 귀신친구들을 만난다. 귀신들은 예전 배추밭이었던 강남이 이제는 빌딩으로 숲을 이루고 사람들은 일도, 공부도 너무 많이 하여 불을 끄지 않는 통에 밤에도 밝아 놀 수 없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투덜댄다. 사람은 밤에 자고 귀신들은 밤에 놀아야 하는 법!! 귀신들과 자미는 그들을 재울 방법을 궁리하는데..,  너희가 사는 이곳에도 재미난 이야기가 숨겨져 있어 이제 불빛들도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김지연작가 또한 강남에서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강남을 항상 불편하게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늘 불편한 시선으로 보던 강남의 불빛들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이곳에 사는 건강한 사람들, 예쁜 아이들의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강남’을 중심으로 귀신이야기를 만든 이유를 밝혔다.  저자는 스스로 쉬지 못하고 잠들 수 없는 이들을 귀신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꿀잠에 들게 해 주고 싶었을까?  노리와 귀신들은 달빛으로 만든 배에 자미와 자장가를 태웠어.  쑥국쑥국, 졸졸졸, 바스락바스락, 치르르 꿈꾸는 숲의 소리들도 함께 실었지. 서늘한 밤바람이 달려와 달빛 배를 껴안는 바람에 자장가가 온세상에 흘러넘쳤어. 도시 곳곳에 자장가가 스며들어. 하나둘 불이 꺼지고 잠이 들어.⌟   <한밤중에 강남귀신> 본문 중     김지연작가는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SI그림책연구소를 졸업했다. 2018년 최신작인 한밤중에 강남귀신은 이전에 전통문화를 주제로 다뤘던 <부적>,<깊은산골 작은집>,<꽃살문>에 비해 대중이 그림과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공감을 느낄 요소를 두루 갖췄다는 느낌이다. 귀신들이 잠 잘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지금의 속세 사람들을 위로하듯 이번 작품은 따뜻한 채색을 이용한 회화적 표현으로 현대적인 느낌을 줌과 동시에 귀신들의 모습은 두 가지 단색의 판화로 전통적 표현을 살렸다. 두 가지 기법을 통해 한 공간 속에 사람과 귀신의 차원을 달리 효과적으로 표현한 점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게 했던 장면은 귀신들의 자장가 소리에 편안하게 눈 감고 잠 든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지금 이 밤, 마음에 병을 앓아 잠 못 들었을 내 조카 역시 저런 미소를 짓고 잠들 수 있는 그 밤도 곧 오리라 바래본다.  그림책 소개를 하는 이는         책 소개하는 이는 양평에 살고 있는 아이 둘 키우는 평범한 40대 주부다. 내가 그림책을 가까이 하게 된  계기는 다른 엄마들이 그러하듯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이제 문고판 책을 더 많이 읽는 길목에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림책을 좋아하는 독자다.  그림은 글, 문자가 주는 명확성과 확정성을 뛰어넘어 무한한 생각의 확장을 가져다준다는 점이 큰 매력이다. 그래서 때론 글이 없이 그림만으로 된 그림책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나는 그런 그림책들이 참 좋다.    예전에 그림책을 아이들이 읽는 동화로만 생각하던 인식에서 0세부터 ~100까지 세대를 넘어서 읽는 책이라는 인식으로 점차 바뀌어 가고 있다. 아마도 그건 세대 넘어서는 이야기와 예술성 높은 그림을 담은 상당한 수준의 그림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상당한 수준의 그림책들이 계속해서 출판되는 한, 나는 그림책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보물과 같은 새로운 좋은 책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좋은 책으로 먼저는 자신을 만나고, 다음에는 아이, 친구, 이웃으로 관계를 확장하여 소중한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는 문화가 확산되기를 희망한다. 그런 책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과 타인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나는 지금 경험 중에 있다. 매 주 한편의 책을 소개 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내가 모르는 이들과의 확장된 책 생각 나눔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겁 없이 시작한다.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읽고, 이렇게 느꼈어~”에 정답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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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그다드 카페

[영화] 바그다드 카페 이 영화를 오래 전에 보고,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기억나는 것은 음악이다. 영화에서 울려퍼지던 그 몽환적인 노래는 아마도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자리잡았으리라. 시간이 많이 흘러 감독판으로 재개봉한 영화를 다시 봤다. 낯익은 얼굴이 반갑다. 독일에서 온 야스민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동행했던 남자-남편일 수도 있다-와 도로 위에서 헤어진다. 아마도 남자가 짜증나게 했기 때문이리라. 아니면 훨씬 오래 전부터 두 사람에게 문제가 있었고,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아마도 바로 그 시점에 두 사람의 감정이 폭발했으리라. 야스민은 옷가방을 트렁크에서 꺼내고, 남자는 차를 가지고 떠난다. 야스민이 내린 도로 위는 트럭들이 주로 오가는 퍼시픽 트레일 하이웨이로, 그녀는 물론 몰랐지만, 로스엔젤레스에서 라스베가스로 가는 길에서도 곁길로 빠진 한적한 도로다. 이 길을 오가는 차는 거의 대부분 트럭들이고, 어쩌다 드물게 승용차가 지나갈 때가 있다. 날씨는 덥고, 정장을 하고 무거운 트렁크를 끌면서 야스민은 도로 옆 허름한 카페에 도착한다. 바그다드 카페다. '바그다드' 지명은 실재한다. 황량한 사막같은 곳에 낡은 건물 몇 개가 전부인 바그다드는 사람이 살기에 그리 좋은 곳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도 카페 주인은 흑인이다. 억척스러운 여성 브렌다는 남편을 닥달하고, 손자-아들이 너무 이른 나이에 사고를 쳐서 얻은 아이-를 기르며, 피아노만 치는 아들과 밖으로만 나도는 딸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면서도 카페와 주유소와 모텔을 운영한다.  모텔에는 장기 투숙자가 있는데, 자신을 헐리우드 배우 겸 무대미술가라고 말하는 루디-잭 팰런스-와 문신을 해주는 데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파일리스가 카페의 손님이기도 하다. 브렌다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늘 바쁘고, 늘 화가 나 있으며, 온갖 잔소리와 불평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악랄하거나 품성이 나쁜 여성은 아니다. 브렌다는 지쳤다. 먹고 살기 위해 카페와 주유소와 모텔을 운영하지만 생각만큼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니고, 남편은 성격이 너무 느긋하고 게을러서 일을 거의 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 아들은 어떤 여자애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 데려왔는데, 젊은 나이에 이미 할머니가 되어 버린 브렌다는 자기 인생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늘 우울하고 초조하며, 불안했다. 딸도 학교에 가는 것보다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트럭 기사들 차를 얻어타고 모하비 사막으로 놀러갈 생각이나 하는 철없는 아이여서 제럴드의 걱정은 커지기만 한다. 그러던 어느날, 인적 드문 이곳 카페에 낯선 이방인이 나타난다. 날씨는 더운데 정장을 입고, 무거운 트렁크를 끌며 도로를 걸어온 그 여성은 영어도 유창하지 못한 외국 여성이다. 그녀는 하룻밤 묵겠다고 말하고 여행자수표로 결재한다. 객실에 들어와 트렁크를 열어본 야스민은 가방이 바뀌어 남자의 트렁크를 가져왔다는 걸 알게 된다. 바그다드 시내가 어디냐고 묻는 야스민의 질문에 브렌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기가 바그다드라고 말한다.  투숙객인 야스민은 늘 바쁘기만 한 브렌다를 위해 사무실을 정리, 정돈하고 카페 건물도 청소한다. 하지만 브렌다는 그런 야스민의 행동에 화를 내고, 자기의 권리와 영역을 침범하는 야스민의 태도에 의구심을 품는다. 돌이켜보면, 야스민의 가방에 마술도구가 들어 있던 것은, 야스민의 남편 또는 남자친구 또는 남자 동료가 마술을 했고, 야스민은 그를 돕는 보조자의 역할로 라스베거스로 가서 일자리를 찾으려던 것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다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리거나 감정적 다툼이 있었고, 야스민은 이 황량한 곳에 외톨이로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잘못 가져온 가방에서 나온 마술도구와 남자옷 때문에 난감했지만 야스민은 곧 그 도구를 이용해 스스로 마술을 배운다. 그리고 아주 가볍고 간단한 마술을 카페에서 선보이며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다. 브렌다와 야스민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장기투숙객들과 친해지며, 브렌다의 아들과 딸도 야스민을 좋아한다. 바그다드 카페는 마술을 하는 카페로 알려지고, 매일 저녁 카페에서 마술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트럭운전수들이 공유하면서 카페는 손님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외진 곳에 있는 낡고 허름한 카페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라스베가스보다 훌륭하다는 마법쇼가 펼쳐지면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고, 모두 행복하게 되기까지 야스민의 헌신이 있었다. 야스민은 대체 누굴까. 그녀는 뚱뚱해서 세속의 시선으로 보면, 아름답다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루디(헐리우드의 배우이자 무대미술가)는 야스민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야스민의 외모가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다. 재미있고 행복한 마술쇼를 펼치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카페가 된 바그다드 카페에서 모처럼-아마도 인생에서 처음이었을 게 분명한-행복한 시간을 보낸 사람들-브렌다와 그의 아이들, 장기투숙객들, 트럭운전수들, 일부러 마술쇼를 보려 온 사람들-은 야스민이 불법체류자로 체포되면서 그 행복한 추억을 더는 만들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간 지나고, 덥고 황량한 퍼시픽 트레일러 하이웨이의 도로 저쪽에서 하얀 옷을 입은 야스민이 다시 나타난다. 이야기는 해피엔드로 끝나고, 브렌다와 야스민의 따뜻한 우정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파리, 텍사스

[영화] 파리, 텍사스 좋아하는 영화는 시간이 흘러도 기억에 남고, 다시 찾아보고픈 마음이 든다. 그런 영화들이 꽤 많지만, 어제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로마'를 보고나서 그 영화와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가 떠올라 영화를 다시 찾아봤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의외로 많다. 제목에서부터 두 영화는 '동명이역' 즉 이름이 같지만 지역은 다른 지명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생각하는 머리속 나침반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을 뜻한다. '파리, 텍사스'에서 지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주인공 트레비스의 엄마가 태어난 곳이 텍사스에 있는 파리였고, 트레비스의 부모가 사랑을 한 곳도 파리였으며, 트레비스는 파리가 자신이 '만들어진 장소'라고 굳게 믿고 있다. 즉 엄마가 자기를 임신한 곳이 텍사스에 있는 파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트레비스가 한때 여유가 있을 때, 텍사스의 파리에 있는 넓은 공터를 우편판매로 매입했다고 동생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말한다. 이 영화가 1980년대 초반에 만들었으니 벌써 30년도 훨씬 넘은 영화인데, 그때 텍사스 파리는 지금보다 더한 시골이었을텐데, 지금의 텍사스 파리는 한국과 비유하자면 시골의 한적한 면소재지 비슷한 마을이다. 요즘은 구글 지도가 있어서 미국이라면 어느 지역이든 마치 실제 걸으면서 보는 것처럼 풍경을 자세히 볼 수 있는데, 대도시인 달라스에서 조금 떨어진 작고,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동네에 불과하다. 그곳에 땅을 매입한 것은 오로지 트레비스 엄마의 고향이고, 부모가 그곳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고향이자, 나중에 가족과 함께 그곳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트레비스의 꿈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는 느리게 진행한다. 텍사스의 황량한 사막을 걷는 한 남자. 남루한 옷과 지저분한 턱수염, 쾡한 눈과 거칠고 더러운 피부. 누가 봐도 부랑자이고 노숙자 같은 모습이다. 갈증이 심한 남자는 물을 찾아 다니다 작은 식당에서 얼음을 퍼먹고는 쓰러진다. 그가 깨어난 곳은 지역의 병원이고, 마침 그 식당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의사여서 그는 운 좋게 살아난다. 하지만 의사가 묻는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는 남자. 의사는 남자의 지갑에서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거는데, 마침 그의 동생 월트가 받는다. 월트는 로스엔젤레스에 살고 있고, 형과 연락이 끊긴지 4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만난 형제는 월터의 집으로 가기 위해 나서지만,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트레비스 때문에 이틀을 걸려 자동차로 집에 도착한다. 처음에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있던 트레비스도 동생의 보살핌과 아늑한 동생의 집에서 생활하자 예전처럼 정상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동생 월터의 집에는 그가 잊고 있었던 어린 아들 헌터가 있었다. 헌터는 이제 8살이 되는 아이로 잘 생기고 똑똑하다. 월터는 헌터를 친자식처럼 키우고 있었지만 친아버지가 나타나자 헌터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두 사람의 어색한 만남을 없애기 위해 그들 가족이 행복했을 때 찍었던 수퍼8밀리 비디오 영상을 함께 본다. 그 영상 속에서 두 가족-트레비스와 월터의 부부와 아이-은 여행을 떠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 헌터는 이제 겨우 4살의 어린 아기로, 두 부부에게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영상을 바라보는 트레비스와 헌터는 행복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슬퍼진다. 함께 있어야 할 아내이자 엄마인 제인이 그 자리에 없기 때문이다. 트레비스와 헌터는 아버지와 아들이면서도 어색한 사이로 지내고,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헌터가 학교가 끝나 집으로 가려고 나올 때, 길 건너편에 서 있던 트레비스와 만나고, 두 사람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며 걸어서 집까지 걸어온다. 트레비스가 움직이는 모습을 헌터가 따라하고, 말없이 그렇게 오래도록 걸어서 집 근처에 다다르자, 트레비스는 도로를 건너 헌터에게 다가가고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집으로 돌아간다. 이 장면은 아버지와 아들이 심리적으로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잘 드러낸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버지와 아들은 손을 잡지 않고, 조금은 어색한 마음의 공간을 남겨두고 있다. 월터의 아내는 트레비스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제인이 연락을 했으며, 매달 헌터의 은행계좌로 돈을 입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트레비스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제인을 찾으러 가겠다고 말한다. 로스엔젤레스에서 돈을 입금하는 은행이 있는 휴스턴까지 아들 헌터와 함께 차를 몰고 떠나는 트레비스. 매달 15일이면 돈을 입금하는데, 그 날에 맞춰 은행 앞에서 기다리다 제인을 만나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두 사람은 15일에 휴스턴 시내에 있는 드라이브 쓰루 은행에 도착하고, 입구와 출구 쪽에서 머물며 들고나는 자동차를 보며 제인을 찾는다. 그러다 두 사람 모두 잠이 들고, 막 잠에서 깬 헌터 앞에 빨간색 쉐비를 운전하는 금발의 여성이 보인다. 헌터는 본능적으로 그 여성이 엄마라는 걸 느낀다. 잠자고 있는 트레비스를 깨워 겨우 빨간차를 뒤쫓아 가는데, 휴스턴 외곽의 허름한 동네에 있는 건물 앞에 도착한다. 트레비스가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은 성매매를 하는 곳이었다. 직접 몸을 팔지는 않지만, 창문을 통해 여성의 몸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제인은 그곳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 헌터에게 돈을 보내고 있었다. 트레비스는 4년만에 아내 제인을 만나지만, 제인은 창문 너머의 남자를 볼 수 없고,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트레비스는 제인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와 헌터에게 엄마가 그곳에 있음을 알린다. 그리고 다음날, 트레비스는 녹음기에 아들 헌터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녹음하고, 다시 제인을 찾아가 그가 겪었고, 생각했던 제인과의 이야기를 천천히, 조용히 말한다. 제인은 창문 너머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다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설움이 복받쳐 눈물을 흘린다.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까지, 관객은 두 사람이 왜 헤어졌고, 트레비스가 왜 사막을 헤맸으며, 제인이 왜 사창가에서 몸을 팔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하지만 트레비스의 말을 듣고, 다시 제인의 말을 들으면서-이것은 영화 속에서 헤어진 부부가 서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트레비스와 제인이 관객에게 직접 하는 독백이기도 하다-앞에서 했던 주인공들의 모든 행동을 납득하게 된다. 트레비스와 제인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이었다. 제인은 매우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었고, 트레비스는 그런 제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너무 사랑해서 직장도 다니지 않고 제인 옆에만 있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것은 집착이고 소유욕이었을뿐,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었다. 트레비스는 자기가 일하러 나간 사이에 제인이 바람을 피고 있다고 믿기 시작했고, 의처증으로 발달해 제인을 괴롭혔다. 다른 여자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제인을 함부로 대했다. 그럼에도 제인은 트레비스를 사랑했고, 그를 걱정했으며, 그를 믿고 기다렸다. 그러다 제인이 임신하고, 아들 헌터를 낳으면서, 상황은 바뀐다. 제인은 자신의 인생이 망가졌고, 아이를 낳아서 자신을 구속하려한 트레비스를 미워했다. 반대로 트레비스는 헌터가 태어나자 다시 제인을 사랑하고, 자신이 잘못했던 행동을 반성하며 용서를 구했다. 제인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짜증을 부리고, 집을 뛰쳐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트레일러에 불이 나고, 트레비스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마음 상태로 무작정 집을 떠나 달리기 시작했다. 왜 집을 나왔는지, 왜 제인과 헌터를 버리고 부랑자가 되어 거리를 헤매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 이후 트레비스는 제인을 처음 만나는 것이다. 제인은 그렇게 떠난 트레비스를 오래 기다렸지만 결국 트레비스를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그것이 헌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헌터를 트레비스의 동생 부부에게 맡기고 집을 떠난다. 두 사람의 독백을 들어보면, 제인의 행동은 출산을 하고 나서 임산부가 겪는 산후우울증일 확률이 높다. 다만 임신 전과 임신 상태에서 트레비스가 보인 타락한 모습에 몹시 실망하고, 절망한 상태였다가 출산과 함께 그 절망적인 감정이 폭발해 남편과 아이를 포기하고 어디론가 도망가고픈 욕망이 솟구쳤다고 해석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아직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지만, 트레비스는 여전히 제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알면서도 정작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에는 깊은 반성을 하지 않는 이중의 모습을 보인다. 제인은 자기가 했던 과거의 행동이 잘못이었고, 그로 인해 트레비스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빌지만, 트레비스는 아들 헌터와 엄마 제인이 함께 있기를 바라면서도 자신은 다시 길을 떠난다. 영화가 두 사람-부부-만의 이야기였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을 울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어린 아들 헌터가 존재하면서, 개인과 가족의 슬픔은 더 깊어지고, 울림은 커진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미혼이었는데, 그때는 주로 두 사람의 관계만을 중심으로 보았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키운 다음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부부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사람이 바로 8살 헌터임을 알게 되었다. 행복했던 시절에 찍었던 비디오에서 4살의 아기 헌터는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그리고 4년이 흘러 이제 초등학생이 된 헌터는 아름다우면서도 슬픔을 간직한 아이가 되었다. 헌터는 부모의 이별로 작은아버지, 작은엄마를 친엄마, 친아빠로 알고 지냈으며, 그에게 친아버지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겪었을 마음의 갈등과 혼란을 생각하면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느낀다. 그나마 헌터는 좋은 양부모 아래서 행복하게 자라 퍽 다행이었고, 친아버지를 이해하는 속깊은 아이였다. 호텔에서 혼자 기다리며 떠나간 아빠를 생각하고, 엄마를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는 헌터를 찾아온 제인,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가가 말없이 끌어안는다. 엄마와 다시 만나지만, 아버지와는 다시 헤어져야 하는 헌터. 가족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다. 밤길을 운전하며 어디론가 떠나는 트레비스의 옆모습에서 반짝거리는 건 아마 눈물이었으리라. 이 영화에서 붉은색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사막을 걷는 트레비스가 쓰고 있는 모자는 빛바랜 붉은색 모자였고, 트레비스가 동생네 집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아들 헌터와 관계가 좋아지면서, 다시 아내 제인을 찾아나서는 길에 붉은색 옷을 입고 있다. 아들 헌터도 마찬가지. 게다가 휴스턴의 드라이브 쓰루 은행 앞에서 헌터가 발견한 엄마의 차도 빨간색 쉐비였고, 트레비스가 몇년만에 만나는 아내 제인이 입고 나온 옷이 붉은색 옷이었다. 결정적 순간마다 등장하는 붉은색은 붉은피 즉 혈연을 뜻한다. 이들이 한 가족으로, 서로 피를 나눈 사이임을 암시하며, 가족이 흩어졌다 다시 만나면서 피가 통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드러낸다.  영화는 긴 여운을 남기며 끝나는데, 트레비스와 아들 헌터가 만났다 헤어지고, 제인과 아들 헌터가 만났으니 이제 다시 트레비스가 돌아오면 가족은 완전하게 결합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트레비스와 제인은 만나지 않더라도 헌터가 중간에서 부모 사이를 오가며 만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가족이라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헤어지고,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사이가 될 수 있다.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증오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길을 떠나야 할만큼 마음의 상처가 깊다면, 그것을 치유하도록 시간을 주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일 것이다.   

[영화] 로마 ROMA

[영화] 로마 ROMA 이 영화는 그가 만든 '그래비티'보다 흥행이 낮을지 모르지만, 그의 작품-앞으로 만들 작품까지 포함해서-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 아닐까 예상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쉰들러 리스트'가 생각났다. 두 작품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데-있다면 딱 한 가지, 영화가 흑백이라는 점-왜 '쉰들러 리스트'가 떠올랐는가 생각해보니, 이유를 알 것 같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멋진 영화를 만들면서 세계적인 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자신의 검증된 연출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고자 했다. 반면 스티븐 스필버그는 유명한 흥행감독으로 성공하자, 상을 타고 싶은 욕망으로, 오로지 '예술성 있는 감독'이라는 이름을 얻고 싶어서 '쉰들러 리스트'를 연출했다. 두 사람의 출발점이 처음부터 다르다. 유대인이자 시오니스트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핍박당하는 유대인을 구출한 독일인 쉰들러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그렇다고 지금 스티븐 스필버그를 '예술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영화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그저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 아니라, '예술영화'도 잘 만드는 뛰어난 감독임을 보여준다. 이전의 영화들이 대중성과 흥행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적어도 이 영화는 그런 관객의 시선에서 초연하다.  무려 134분이나 되는 런닝타임은, 대단한 사건이 없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길어야 하는지,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더는 줄일 수 없다는 감독의 의지를 반영한다. 그리고 흑백필름은 단지 멋을 부리기가 아니라, 1970년대 멕시코의 시대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훌륭한 수단임을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된다. 이 영화가 컬러필름이었다면 오히려 영화의 몰입과 집중에 방해가 되었을 터이고, 영화의 격도 낮아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흑백필름을 적절하게 쓰면 영화는 더욱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본같은 영화다. 이야기는 매우 평범하다. 오히려 너무 평범하고 단조로워 지루할 것 같은 내용이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호흡을 이어간다. 멕시코의 한 도시 이름이 '로마'다. 이탈리아의 로마라면 너무 당연하겠지만, 이 영화에서 '로마'는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의 중심부에 있는 한 지역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동명이역(이름이 같은 다른 지역)으로 유명한 영화 '파리, 텍사스'가 있다. 미국 텍사스에 있는 '파리'에서 벌어지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빔 벤더스 감독의 이 영화 역시 걸작이다. '로마'와 '파리, 텍사스'는 헤어진다는 소재가 같다. 다만 그 방식이 다를 뿐, 가족의 해체, 사랑하는 사람과 결별, 후회, 안타까움 등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다. 텍사스의 로마지역에 사는 한 중산층 가족과 그 집에서 일하는 멕시코 여성 가정부 클레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중산층 가족이지만 이들은 미국인이다. 미국인이 멕시코에서 중산층으로 살아가며 멕시코인을 하녀로 부리고 있다는 것은, 멕시코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을 암시한다. 미국에 종속된 멕시코는 자신들이 분명 멕시코의 주인이면서도 미국의 하인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약자의 처지에 놓여 있다. 미국인 부부는 네 명의 아이가 있다. 집에는 두 명의 가정부가 있고, 남자는 아마도 의사인 듯하고, 여자는 생화학자로 교사로 일하는 것으로 나온다. 넓은 집에 두 대의 차를 보유하고, 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는 이 가족과 가정부 클레오는 주종 관계이면서도 사이가 퍽 좋다. 클레오는 전형적인 멕시칸으로 외모만 봐도 멕시코 사람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멕시코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 집에서 일하는 두 명의 젊은 여성 가정부는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임을 외모부터 보여준다. 조신한 몸가짐, 부지런한 몸놀림, 집안일을 두루 하면서 아이들도 돌보는 유모같은 가정부들이다. 미국인 부부는 두 명의 가정부를 믿고, 아이들까지 맡긴다. 집주인이나 아이들에게서 갑질이나 선민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고, 상식을 갖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느날부터 이 행복한 집안에 균열이 생긴다. 캐나다 퀘벡으로 출장을 떠난다는 남자는 돌아오지 않고, 클레오는 남자친구와 동침하고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남성은 무책임하고, 폭력적이다. 어린 자식을 네 명이나 남겨두고 출장 간다고 속이고 집을 떠난 백인 남성은 실제로는 같은 멕시코 시티에서 다른 여자와 살고 있다는 것이 발각된다. 클레오의 남자친구는 클레오가 임신했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도망친다. 남자들은 대책없이 한심하고, 어이없는 속물에다 역겨운 인간들이다. 클레오의 집주인인 백인여성이 '여자는 언제나 혼자였어'라고 말하는 건, 자신의 처지는 물론이고 클레오의 난처한 상황까지 아우르며, 여성 일반의 삶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클레오는 임신한 사실을 밝히면서, 자기가 해고될 것을 걱정하지만, 여주인은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집주인으로서의 배려일 수도 있고, 같은 여성으로서 동지적 입장으로 배려하는 것일 수 있다. 덕분에 클레오는 임신하고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는데, 그는 충격적 사건을 겪으면서 결국 아이를 사산한다. 아이들과 여행을 떠난 곳에서 두 아이가 파도에 휩쓸려 죽을 뻔한 상황에서 클레오는 성치 않은 몸으로 바다에 들어가 두 아이를 살린다. 하마터면 클레오도 죽을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모두 살아서 바다 밖으로 나오고, 이때 클레오는 자신의 속마음을 처음으로 드러낸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어요.' 이 말은 한때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남자에게서 받은 심한 마음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음을 뜻하며, 데모하는 학생을 총으로 쏴죽이는 사람이 자신의 아이 아버지였던, 한때 사랑했으나 매몰차게 임신한 자신을 버리고 떠난 바로 그 남자라는 것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던, 그래서 그 폭력적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클레오의 여주인 역시 자신이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심한 충격을 받지만, 네 명의 아이를 키워야 하는 어머니로, 생화학자이자 교사인 지성인으로, 남자의 배신을 결연하게 극복한다. 그녀는 아이들과 클레오에게 새로운 모험을 떠나자고 말하고, 앞으로 함께 더욱 뭉쳐서 잘 살자고 다짐하고 격려한다.  이 영화는 결국 여성의 이야기이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사랑했던 엄마, 이모, 누나들의 이야기다. 1970년대 초반의 여성이라면 멕시코나 한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들이 놓인 사회적 환경이나 억압은 나라를 떠나 비슷하며, 여성 일반이 겪는 고통의 역사는 인종과 국경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욱 보편적인 영화이며, 시대를 훌륭하게 반영하고, 여성의 삶을 드러내며, 평범하지만 비범했던 여성들을 기억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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