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 만난 사람
길 위에서 만난 사람
3.1운동 100주년기념 4차포럼에서 이성한 씨를 만났다.
양평에서 태어나 대학생 시절만 양평을 잠시 떠났다.
현재 용문면에 거주중, 취업과 경제적 안정에 관심이 많은 스물여덟 청년이다.
그때 삶의 만족도에 대해 질문했을 때 ‘감사’가 깊어졌다고 했다. 더 듣고 싶다
사람마다 만족도에 대한 기준이 있을 거다. 내 경우 그 기준선이 내려간 만큼 감사에 대한 임팩트가 커지고 깊어졌다. 상대적으로 만족함이 커진 건 맞지만, 전체적 삶에는 만족하지 않는다(“만족하지 않아요, 만족하지 않아요”) 두 번 연달아 말하며 그는 환하게 웃었다.
‘만족하지 않다’라는 표현이 부정적이 아니라 오히려 삶에 대한 애정이나 애착으로 들린다.
그렇죠. 맞아요. 삶에 대한 욕심이 있죠. 긍정적인 욕심이 있어요.
요즘 어떤 일에 관심이 있나
내 또래 대부분이 그렇듯 현실적인 요건이다 보니 ‘일과 취업’에 관심이 있다. 취업을 위해
요즘 배우는 일에 관심이 많다.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고 싶다.
배우고 싶은 목록에 어떤 것들이 있나
그래픽을 배우고 싶다. 아무래도 신체 활동이 약간 부족할 수 있어서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고 특별히 그래픽을 배우고 싶다. 바로바로 결과가 나오고 피드백이 주어지는 그래픽 쪽에 흥미를 느낀다. 얼마 전, 회계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매우 어렵고 복잡했다. 어렵고 복잡해도 흥미가 느껴지면 했을 텐데 나와는 맞지 않았다.
아프기 전에는 마라톤이나 활동적인 일에 흥미가 있다고 했는데, 성향의 변화가 생긴 건가
대한민국 남자에게 갑자기 시간이 많아지는 때가 있다. (기자가 어리둥절해 하자 웃으며) 군대에서 그렇다. 그전에는 머리로 이해해야 몸으로 움직인다 생각했다. 군대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시행착오도 하면서 성향이 달라진 면이 있다. 몸으로 움직이며 배우기도 했다. 축구를 하다 보니 이렇게 하면 공을 뺏기는 구나 알게 되었다. 활동하다 보니 운동도 잘 맞는구나 알게 되었다. 아프고 나니 정작 몸으로 하는 게 어렵다. 그런 면에서 성향이 바뀐 면이 있다. 이제는 몸으로 먼저 하지 않는다. 중점이 달라졌다.
따뜻한 커피 좀 드시라 혹시 식은 커피 좋아하나
사람들이 흔히 김빠진 콜라라고 하지 않나. 천천히 마시는 게 좋다. 천천히 오래가는 것에 안정감을 느낀다. 커피도 뜨거울 때부터 완전히 식었을 때까지 다 마신다. 그 모든 맛이 좋다.
(그래서 커피가 나오자마자 입으로 가져갔나, 입 데는 줄 알았다^^)
그의 제스처가 제법 근사하여 '잠깐'이라고 말하자, 동작도 말도 그대로 멈췄다
원래 입맛이나 성향이 그런가
이것도 바뀌었다(소리 내어 하하하 웃으며) 예전에는 빨리 마시고 다른 거 해야지 했다.
그동안 활동적으로 살았다. 쉼 없이 너무 열심히 산 건 아닌가
그때는 그게 좋았다. 어느 날 문득 집에서 용문사까지 뛰어가보고 싶어서 뛰어가 봤다. 5km쯤의 거리이고 30분쯤 걸린다. (기자가 깜짝 놀라자) 뛰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10km면 50분에 뛴다.
(기자도 태어나 죽어라 뛰었던 경험, 학생 시절 지각 경험 한참 수다를 떨다가)
좌우명이 있다면
딱히 좌우명은 없는데 삶에서 반성, 성찰은 중요시 생각한다. 같은 실수나 잘못을 반복하는 건 좀 그렇다.
아프기 전과 아프고 나서 장단점이 있다면
그때의 삶도 지금의 삶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면 재밌다. 치열하고 활동적인 삶이 재미있다.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고 자존감을 느끼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오만함이 있었던 거 같다. (어느 부분에서 그랬나?) 주변 사람의 도움이나 그런 면을 알지 못했다. 열심히 해서 스스로 이뤄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오만함이 있었던 거 같다.
지금은 사는 게 편하다. 반면 패배주의를 경계한다. 자기만의 몫이나 나이 값을 안 하고 아프다는 것을 핑계 삼을까봐 경계한다(성한 씨에게 나이 값은 어떤 건지) 멋이나 만족이 나이 값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스스로는 만족하는데 주변인이 봤을 때 아니다 싶으면 그건 나이 값을 못하는 거다. 나이 값에는 주변의 평가가 들어가는데, 그 평가를 ‘멋’으로 한다.
우리가 ‘멋있다’라는 말을 할 때 조금씩 의미가 다를 수도 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나.
내게 멋있다, 멋있게 산다는 건 ‘행복해 보인다’이다. 모든 부분이나 스타일을 다 말하기 힘들기에 ‘멋있다’라고 대표해서 말할 수 있다.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긍정적인 내용이 포함된 이런 단어가 좋다. ‘사랑해’라는 표현도 그렇다.
혼자 있는 시간은 주로 어떻게 지내나
대부분 잔다. 전날 뭔가를 하면 다음날은 쉬고 싶다. 아직까지 몸에 무리가 있는 거 같다. 그래서 혼자 있다는 건 전날 활동을 했다는 거고, 쉬고 싶다는 의미기도 하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민감한 것도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인거 같다
그런 거 같다. 이제는 그 신호를 거스르지 않는다. 예전에 수련법이 딱 그랬다. 화전리에서 삼성리 넘어가는 구간을 좋아했다. 같은 길을 왔다 가는 건 재미가 없어서 산을 넘어 달렸다. 도로에 전신주나 가로등이 있다. ‘어제는 여기까지 갔으니, 오늘은 가로등 하나 더 가서 쉬자’ 이런 식으로 운동을 했다. 스스로 목표를 정해서 시간을 단축하려 했고 성장과 발전을 도모했다면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몸이 힘들면 바로 쉰다.
(그때는 그런 삶이 기쁘고 즐거웠고 이제 좀 다른 삶을 사는 거네요^^)
음악이나 영화, 또는 다른 취미 활동은 있는지
지금 나오는 노래도 무척 좋아한다(Eric Clapton/ tears in heaven) 텔레비전 시청은 별로 안한다. 재미가 없다. 하지만 드라마 흐름이나 전개는 관심 있게 지켜본다. 정작 드라마는 챙겨 보지 않으면서 진행이나 시청자의 반응, 구성에는 흥미를 느낀다. 내가 유행에는 민감한 편이더라. 야구도 게임을 보기보다는 스코어와 하이라이트만 챙겨 보는 편이다.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최근 ‘스카이캐슬’을 재밌게 봤다. 오래 전 드라마 중에서는 ‘육룡이 나르샤’가 재미있었다.
몸이 아프거나 힘든 시기를 지나는 중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느 정도 초연해지는 게 도움이 되는 거 같다.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을 하면 좋다. 의료기술이 많이 발달했다. 모든 재활 과정이 좋았다. 휠체어도 좋았고 목발도 좋았다. 병원에 있을 때 재활치료 과정을 보면 보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의욕적으로 재활하려고 무던히 애쓰는 사람도 있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절망적인 사람도 있다.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편이었고, 포기할 건 포기했다. 그때 그때마다 집중할 것에 집중했던 거 같다.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일어서지 않나. 내가 크게 아팠다는 것이 뭐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의 인생에서는 중요한 경험이고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경험이 대단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뇌수술 후 수술 후유증인지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었다. 의사선생님에게 말했더니 닦으라고 하더라. 눈물이 흐르면 닦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