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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평중학교 이색직업체험, ‘마술사와 함께하는 진로직업교육’실시
    양평중학교(교장 김덕수)가 12월 27일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로직업교육을 실시했다.   이날 교육은 색다른 교육으로 진행되었는데 교육과 공연이 합쳐진 형태의 프로그램으로 마술사라는 직업에 대한 소개와 마술사 체험, 마술공연 등 다양한 구성으로 진행되었다.   평소와는 다른 교육으로 학생들의 이목을 끌었으며, 교육 내내 학생들이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아 학생들이 즐겁게 교육에 참여했다는 후문이다.   교육은 수원에 위치한 미리내마술극단에서 파견된 마술사와 강사가 진행을 하였으며 다양한 마술들로 학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고 학교 담당자는 말했다.   양평중학교는 앞으로도 다양한 직업의 전문가를 초빙해 학생들이 앞으로의 진로 선택에 있어 도움이 되고 많은 방법과 길을 제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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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9
  • 양평혁신교육, 성장나눔으로 공유의 장을 열다
    양평교육지원청(교육장 전윤경)에서는 지역 거점 혁신학교(지평중)가 중심이 되어 혁신학교와 혁신공감학교 간 연대와 협력, 공유의 장을 열었다. 2019 양평 혁신(공감)학교 성장나눔의 날은 지역 거점 혁신학교와 초·중등 혁신학교네트워크 선생님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행사를 기획하고, 혁신학교 간 공동성장 및 혁신교육의 자생적 성장과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하여 양평 관내 초·중·고 혁신학교 및 혁신공감학교가 혁신학교 종합평가교 및 성장나눔교의 성장 과정을 공유하고, 학교 간 성장 나눔을 통해 교사들에게는 차년도 수업계획에, 학교에서는 차년도 교육과정 수립에, 교육지원청에서는 차년도 정책 수립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이날 운영은 초등분과와 중등분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초등분과에서는 ‘혁신학교 교사 삶 나누기’와 ‘혁신학교 고민나누기’를 통하여 빛깔있는 혁신학교 운영 사례 나눔과 동시에 혁신교육을 실천하는 교사들의 보람과 어려움을 나누는 기회를 가졌다.    중등분과에서는 종합평가교와 성장나눔교의 성장이야기를 나누고 3개의 분임별 토의를 가졌는데, 주제는 학교-교육지원청 우리가 함께 좋은 혁신교육을 만들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 일반 고등학교에서 혁신 고등학교로 발전할 수 있는 방안, 아이들이 살아있는 수업을 만드는 방법 공유 등 이다.   양평교육지원청 전윤경 교육장은 “앞으로도 양평혁신교육 성장과 나눔을 위하여, 혁신학교의 교육활동 성과를 외부에 공개하고 지속적으로 혁신학교 및 혁신공감학교 간 운영 사례를 공유하는 자리를 많이 만들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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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9
  • 양평군청소년지원센터 꿈드림 성장 공유회 “꿈이 있다, 꿈을 잇다”
    양평군청소년지원센터 꿈드림(이하 꿈드림)에서는 지난 11일 평생학습센터 4층에서 2019년 양평군청소년지원센터 꿈드림 성장 공유회 ‘꿈이 있다, 꿈을 잇다‘ 를 학교 밖 청소년 및 학부모, 학교밖 청소년 멘토, 프로그램 운영강사, 대안교육기관 및 유관기관 관계자 160여명이 참석한 가운에 진행했다.   관내 대안교육기관들도 함께 참여한 이번 행사에서는 학교 밖 청소년들의 재능과 끼가 마음껏 발산된 댄스, 힙합, 밴드 공연과 청소년들이 직접 디자인한 캐릭터로 제작된 연하장과 서예 작품 전시 등 풍성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로 구성되었으며, 우수 청소년과 멘토들에게 수여하는 표창과 청소년 수기 발표 등으로 구성됐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축사를 통해 “전시와 공연에서 학교밖 청소년들이 숨은 재능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학교 밖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는 때인 만큼 우리 군에서도 학교 밖 청소년들의 성장과 함께 걸어가도록 노력하겠다.” 고 밝혀 참석자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오은혜(16) 꿈드림청소년은 “지난 1년 동안 학교에 있었으면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다양한 경험과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참여 수기를 발표했다.   양평군청소년지원센터 꿈드림은 학교밖 청소년들의 교육지원, 자립지원,복지지원, 문화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학교밖 청소년 사업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031) 775-1317로 문의하면 보다 자세한 사항을 안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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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3
  • 양평군 보육교직원 역량 강화 및 아동 안전 교육 실시
     양평군은 지난 4일 양평군문화체육센터에서 보육교직원 350여명을 대상으로 보육교직원역량 강화 및 아동 안전 교육을 실시했다.    이날 교육은 양평군어린이집연합회(회장 천용순) 주관으로 진행되었으며 어린이집을 이용하는 대상이 영유아이기에 대상자들의 눈높이에 맞는 놀이를 통한 지도가 이루어지는 보육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다양한 놀이 방법이 제시되는 등 현장감 있는 교육이 진행되었다.    강의에 나선 김지연 강사(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객원교수)는 “보육교사의 자존감이 높아야 영유아의 권리를 존중 할 수 있고 보육현장에서의 다양한 문제 발생을 극복할 수 있다”며 “사명감을 가지고 행복한 어린이집을 만들어 보자”고 현실감 넘치는 강의를 펼쳤다.   군 관계자는 “늦은 시간까지 교육에 참석하는 보육교직원의 열정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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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5
  • 경기미래교육 양평, 파주캠퍼스 현판식 개최
    경기도평생교육진흥원(이하 평진원)은 5일 경기미래교육 양평캠퍼스 현판식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경기미래교육캠퍼스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창의적 글로벌 인재양성을 위한 도 대표 공공 교육기관으로 기존 명칭인 “체인지업캠퍼스”에서 도의 정체성과 캠퍼스 주요사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 명칭인 “경기미래교육 캠퍼스”로 지난 8월 6일 변경됐다.   경기미래교육캠퍼스는 양평과 파주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숙박 및 일일체험 영어교육 ▲영어뮤지컬 공연 ▲평화교육 ▲창의교육 ▲인성함양을 위한 공동체 교육 등 미래인재 양성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이날 현판식에는 조학수 경기도 평생교육국장, 전승희 경기도의회 의원, 변영섭 양평 부군수, 한선재 평진원장을 비롯해 평진원 임직원 등 30여명이 참석하여 경기미래교육 양평캠퍼스의 새로운 출범을 반겼다.   한선재 평진원장은 “경기미래교육캠퍼스는 양평과 파주 각 캠퍼스별 특화과정을 추진하여 교육 콘텐츠의 차별화를 통해 운영할 것이며, 도 공공기관으로서 앞으로도 공익적 사업을 적극 추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경기미래교육 파주캠퍼스는 오는 6일 파주에서 현판식 행사를 개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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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5
  • 해외로 간 양평의 독립운동가
    <응답하라 해외로 간 양평의 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 박 준 현   -목 차- 1. 머리말 2. 해외로 간 독립운동가들-박동완과 한봉철(한진)  1) 박동완 목사의 재만한인 지원과 미국행  2) 한봉철의 독립운동-만주로의 진출 3. 미국에서의 독립운동-변준호의 무장투쟁론에 대하여  1) 성장과 미국으로의 이주  2) 다시 무장투쟁론으로  3) OSS NAPKO PROJECT와 해방 이후의 삶 4. 맺음말     1. 머리말    1920~30년대의 일제가 펴낸 대표적 잡지 중 하나인 [朝鮮及滿洲]에서 경기도 일대를 개괄한 소개한 글이 있다. 그 중 양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북으로는 가평, 서로는 양주, 동으로는 강원도가 연결되어 있다…동부 및 한강 유역으로 가는 배들은 대부분 양평을 거쳐야만 한다.’ 이렇게 양평은 수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면서, 육로와 수로가 겹치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변화가 전파되기 위해서는 교통의 편리함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 기사대로 양평은 과거부터 정치·행정·군사 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선조 때 柳成龍의 감독 하에 지어진 파사산성이 좋은 예이다. 이 산성은 상류 요충지로 지정되어 수도 방위 임무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양평은 한강유역을 방어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양평은 이른 시기부터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될 자양분을 얻기 유리한 위치에 놓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양평은 구한말 시기에 의병운동의 중요거점으로 이름을 알렸다. 양평이 의병운동에서 중요한 격전지가 된 이유에 대해 선행연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양평 의병은 1896년에 화서학파의 이춘영·안승우가 조직한 지평의진이 유인석의 휘하에서 핵심으로 활동했고, 1907년에는 용문산을 근거지로 한 권득수·조인환의 의병조직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지정학적으로 용문산이 자리 잡고 있어 유격전에 유리했다. 때에 따라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는 은신처가 되었다. 그리고 홍천-여주로 연계할 수 있다는 교통적 특성으로 의병 모집·보급에서도 상당한 강세를 보였다. 실제로 일본군은 양평 의병의 기세를 꺾기 위해 용문사에 숨겨둔 의병의 물자를 색출해 파괴했다. 워낙 의병운동이 거세게 전개된 지역이라 양평 출신의 유력한 독립운동가들은 이른 시기부터 계몽운동에 투신하거나, 강력하게 일제에 항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양평은 국내 활동을 넘어 해외로 진출하여 독립운동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다. 대표적인 인물을 정리하면 몽양 여운형, 그리고 3.1운동 33인 중 한명인 박동완 목사, 양평 3.1운동에 적극참여하고 이후 만주로 넘어간 한봉철, 그리고 미국에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위원장을 역임한 변준호를 손 꼽을 수 있다.  위 언급한 네 명의 지사는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실제적 투쟁을 추구했다. 탁상공론에 머물지 않고 현장에 뛰어 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진보적인 시각과 주의를 견지하고 있었다.  오늘의 주제가 해외로 넘어간 양평의 독립운동가라는 초점에 맞추어 그 동안 몽양에 비해 활동상이 덜 알려졌던 박동완과 한봉철(중국, 만주)의 활동을 간략히 정리하고, 가장 먼 미국에서 여생을 보낸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장 변준호의 무장투쟁론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2. 해외로 간 양평의 독립운동가-박동완과 한봉철(한진)  1) 박동완 목사의 재만한인 지원과 미국행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으로 3.1운동에 참가한 근곡 박동완(1885. 12. 27~1941. 2. 23)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에서 출생했고 본관은 함양이다. 그의 가계는 아버지대부터 조선 후기 양반가에 속했다. 그 또한 어릴 때부터 서울에 유학하여 한학을 기반으로 근대 학문을 빠르게 접했다. 특히 배재학당에서 수학한 시절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3.1운동 당시 체포된 기록에서는 예수북감리교 전도사로 표기되었다. 기독교 대표 중에 한명으로 3.1운동 당시에도 큰 영향을 받았던 박동완은 3.1운동 이후 한동안 [기독신보]와 [신생명]주필로 활동했다.  그런데 박동완은 단순한 목회자로서 교인을 양성하는데 머물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힘으로 무기력에 빠진 조선사회를 구원해낼 것으로 믿고, 민족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따라서 3.1운동 이후 문화통치 시절에도 일제의 허황된 정책을 믿지 않았으며, 조선사회과 당면한 문제점을 기독교정신의 바탕에서 해결하자고자 했다. 박동완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당시 유행했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모두 뼈있는 비판을 가했다.    자본계급과 노동계급에서 일어나는 사회투쟁은 서로 상조하는 정신과 사회봉사의 근로적 정신이 일어나서 자본주의자는 사리와 사욕을 채우는 불완전한 사회조직을 변경하며 노동계급은 투쟁으로서 파괴만을 주장하지 말고 진실로 이타주의의 상애정신이 내측으로부터 진인간성을 발군할진대 사회에는 계급투쟁이 없는 이상적 새 사회를 이룸에 이를 것이라 하노라.    이 글에서 보이듯 박동완은 보통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일방적인 자세로 서로를 비난하는 것을 지양하고, 양 사조가 가지는 배타성에 대해 비판하며 상생을 추구했다. 또한 박동완은 1920년대 중반부터 민족협동전선 논의로 탄생한 신간회 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면서 기독교계 인물 중 손에 꼽을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다.  1920년대 후반에 일제의 만주 침략이 노골적으로 가시화되면서 만주에 있는 한인들의 박해 문제가 대두되었다. 박동완은 이미 1927년 12월 9일 ‘재만한인옹호동맹’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후 한인 권익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실제로 만주 봉천과 길림지역으로 답사를 떠나 실태를 조사했다. 이때에 박동완은 천도교계의 김기전과 사회주의 계열의 홍명희 등과 함께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어떤 특별한 계파에 구애 받지 않고 사회활동의 측면에 있어서 항상 연대를 같이했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성향을 근거로 전개된 그의 국내 활동은 1920년대 후반까지도 지속되었고, 이러한 활동은 그가 하와이로 활동 근거지로 옮긴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는 1929년 10월 8일 하와이에 도착, 국내에서 흥업구락부와 연관된 인연으로 동지회 계통의 독립운동에 헌신한다. 하와이 이주 후 박동완은 오하후 섬에서 목사로 재직하면서 한인 2세들의 국어교육에 힘을 썼다.   오하우섬 농장 각 곳에도 우리 국어학교가 설치되어 2백 50명생들을 가르치는데 와히아와 기독학교 박동완 목사 앞에 90명 동 지방 미감리교회 학교 안창호 목사 앞에 50명이 되며 또한 와이누하 학교 교사 안악선 부인 앞에 50명 와히파아 학교 교사 최병수 부인 앞에 40명이 있다더라.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들의 자녀는 본국과의 떨어진 생활로 국어와 역사에 대한 인식이 낮아지는 추세였다. 3.1운동과 재만한인운동에 헌신한 박동완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모국의 역사를 잃는 것을 두려워해 교회당을 빌려 국어 및 역사 교육을 펼쳐나갔다. 박동완은 이후 하와이 한인협회에 가입하여 미국 내 한인 통합운동에도 가담하는 등 1941년 2월 23일 하와이 호놀룰루 병원에서 사망할 때 까지 끊임없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의 유해는 사망 한달뒤 국내로 돌아와 3.1운동 당시 고난을 함께한 함태용 목사의 주도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 현재의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모역으로 이장되었다.     2) 한봉철의 독립운동-만주로의 진출  한봉철은 京畿道 楊平郡 葛山面 楊根里 154번지 출생으로 그의 독립운동 공적에 비해 현재까지 단독 연구가 정리된 바 없다. 따라서 발굴된 자료에서 언급된 자료 및 공훈록을 근간으로 그의 약력과 공헌을 간단하게 정리하도록 하겠다. 한봉철의 독립운동은 앞서 언급한 박동완과 비슷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바로 3.1운동이다. 박동완은 33인의 일원으로 중앙 지도자의 입장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반면 1919년 3월 24일 한봉철은 양평 군중의 일원으로 양근리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생생한 현장의 열기를 경험하고, 이로 인해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다음은 판결문 상에 등장한 한봉철의 만세운동시 행적이다.   (상략) 피고 韓昌鎬·金慶星·徐象錫·金石鳳·韓奉喆은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함으로써 정치의 변혁을 꾀하였다. 많은 군중과 함께 불온한 행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려고 기도하여 이 날 전기한 葛根里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이 동리 안을 광분함으로써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행동을 하여 동 지방의 안녕을 방해한 자이다. (중략) 수백 명의 군중은 同里에 있는 葛山面事務所·楊平郡廳·楊平郵便所 및 朴熙英의 집에 몰려갔다. 그 중 수십 명의 군중은 제멋대로 각 사무실 또는 방 안에 난입하여 극도로 소란을 피우고, 군청에서는 마음대로 뗄 수 있는 창문의 유리 수 매와 동 군청에 보관된 國稅에 관한 往復綴·제세금부징수 정리부 각 1책을 파기하였다. 면사무소에서는 면장 金讚濟를 사무소 밖으로 끌어 내어 때렸을 뿐만 아니라 동 사무실의 뗄 수 있는 창문의 유리 수 매를 파괴하였다. 양평우편소에서는 뗄 수 있는 창문의 유리 수 매를 부쉈고, 또 朴熙英집에서는 ‘군수와 면장이 잠복하였을 것이다’고 하면서 각 방을 수색하였으며, 소요를 피우는 군중이 봉기하자 피고 韓奉喆·韓昌鎬·金慶星·徐象錫·金石鳳은 그 사정을 알고서도 그 군중에 참가하여 소요에 참가하고 따라다녔다. 피고 韓奉喆은 위 우편소의 사무실에, 피고 金慶星·韓昌鎬·徐象錫은 면사무소의 사무실에, 피고 金石鳳은 위 朴熙英의 집에 모두 침입하여 함께 소요를 피움으로써 동 지방의 靜謠를 해친 자이다. (하략)    경성지방법원은 한봉철에게 소요죄를 적용하여 징역 10월을 선고했다. 한봉철은 이에 불복하고 계속해서 상고했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상고 기각,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어 옥고릴 치뤘다. 그럼에도 한봉철은 일제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920년 경기도 양평에서 상해[독립신문]대한독립단 명의의 군자금요구 협박문을 일제에 충성한 유지들에게 배포하여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후 양평에서 활동하기 어렵게 된 한봉철은 해외로 나아가 새롭게 독립운동에서 전환을 꾀한다.  1923년 만주로 건너가 고려공산청년회조직위원이 되었고, 1928년에는 길림성 林省 磐石縣으로 이주했다. 조선인 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재만농민동맹 결성에 참가했다. 이 때부터 한봉철은 한진이란 가명을 사용하여 만주의 항일전선에서 활동한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사회주의인명사전]의 설명을 참조하겠다.    한진(韓震 1900~1936 :) (중략) 조선공산당 만주총국(ML파) 지도간부로서 남만지역의 공산주의운동을 위해 노력했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31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33년 출옥했다. 출옥 후 樺甸縣 八道溝 일대 중공 지하공작에 참가했다. 9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獨立師 결성에 참가하여 군대 내 당사업에 종사했다. 1934년 11월 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 군수부장이 되였다. 桓仁․本溪 지구에서 유격근거지 창설사업을 담당하여 10여 개의 비밀숙영소, 주둔지를 건설했 다. 1936년 2월 延吉縣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한봉철은 1936년 연길현에서 일본군과 싸워서 전사했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사망날짜와 장소 등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 동안 만주지역 사회주의 운동 및 중국공산당 계통 지하공작에 참여한 이들에 대해서는 연구가 진척되기 힘든 환경이었다. 하지만 만주 운동가들 중 상당수는 사회주의를 세계사적 흐름에서 독립을 위한 전략으로서 취한 경우가 많았던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 실현을 원한다면 그 사조를 절대적 가치로 숭상하면서 본인이 가진 기존의 민족의식까지도 지워야만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독립운동가들 중 상당수는 소련과 중국의 지도를 거절하고 자생적인 방식으로 지하운동을 전개한 경우가 많다. 한봉철이 실제현장에서 일본군과 싸워 교전․순국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3.1운동 및 독립문서 배부 때부터 키워온 그의 항일 의식은 더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위해 만주로 나아가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박동완과 한봉철의 경우 국내의 경험이 해외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3.1운동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박동완은 근대 교육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문화운동 방면으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반면 한봉철은 만주로 건너가 일제와 정면승부를 택하는 길을 걸었고, 실제 교전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이어나갔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인물인 변준호는 앞서 소개한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일찍부터 미국에 건너갔으며,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실천방략에 몰입함으로써 미주 한인 독립운동사에 독자적인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할 수있다.     3. 미국에서의 독립운동-변준호의 무장투쟁론에 대하여    보통 해외에서 활동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정보 문건에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의 시각에서 작성된 정보는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폭도로 매도하고, 엄연한 독립운동의 쾌거를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 따라서 한국인의 시선에서 작성된 정보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해외에서 한국인이 발간한 신문 중 영향력이 컸던 건 상해의 [독립신문]과 미국에서 발간된 [신한민보]였다. 특히 미국에 살았던 한국인들의 활동을 파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자료는 [신한민보]이다. 이 신문은 일제강점기 부터 해방 후까지 발간되었고,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과 같이 미국에서 활동한 유명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소상히 기재했다. 또한 일본의 감시에서 자유로웠던 적에 이 신문은 당시의 국제 정세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예컨대 검열을 피해 조선인이 억울하게 죽었던 관동대지진의 실체를 다룬 것도 이 신문이었다.  한편 상해 [독립신문]과 혼동되지만, [독립]이란 신문은 1943년 10월 6일터 로스앤젤레스(LA)에 본부를 두고 발간된 신문이다. 이 신문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라는 단체의 기관지였으며, 중국에서 결성된 김원봉·김규식이 주도한 조선민족혁명당의 소식을 주로 다뤘다. [독립]은 독립전쟁론을 줄곧 주장했으며,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기회로 조선의 자주 독립의 중요성을 강하게 외쳤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이 [신한민보]와 [독립], 두 신문의 지면에서 줄기차게 독립전쟁을 주장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그 인물이 卞俊鎬(1895. 11. 1.-1966. 2. 20)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그가 1938년 12월 15일 [신한민보]에 게재한 「대표대회를 앞두고 몇 가지 제의 조건」이라는 글의 일부를 살펴보겠다.   (상략) 중일전쟁 중에 중국에 대하여 우리 한인은 명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조선민족 해방운동에 제일 중요하다 믿는다. 중국의 항전은 중국 민족의 혁명전쟁이 될 뿐만 아니라 조선민족의 혁명전쟁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한중 양 민족의 연대적 혁명의식을 가지고 물력과 인력을 내여서 동맹적 항일을 하여야 장구히 싸울 수 있고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이다. (중략) 더욱 오늘같이 우리 조선민족혁명전쟁 시기에 있어 조선 여자에 참정권 평등권을 주는 것은 우리 민족 혁명과 해방운동을 이끄는 중요한 길이 되는 줄로 믿는다. (중략) 나의 관찰로는 우리 대표가 워싱턴이나 평화회의에 가서 우리 독립을 따온다는 사람이 아니면 우리 사회에 대표자격이 있는 줄 믿는다.    1937년 일본의 도발로 시작된 중일전쟁으로 세계 질서는 급변했고, 중국과 연합하여 조선도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모았다. 그래서 미국의 한국인들은 중국인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각지에서 후원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위 사설을 쓴 변준호는 중국이 수행하는 이 전쟁이 곧 조선민족의 혁명전쟁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실 중일전쟁 초기의 전황은 중국에게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변준호는 반일의식이 충만한 중국과의 동맹은 필수라고 언급하는 한편,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고, 조선 민족의 단결을 추진해 전쟁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전쟁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외교론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을 국제연합에 파견대표로 보낼 것을 간청했다. 이렇게 변준호는 한중합작을 통한 무장투쟁을 거듭 강조했다. 이러한 논리를 펼쳤던 변준호는 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1) 성장과 미국으로의 이주    변준호는 1895년 11월 1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 304번지에서 변세영·이희 부부의 둘째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고향 양평은 한말 의병들이 치열하게 투쟁한 곳이었다. 즉 유년 시절을 양평에서 보낸 변준호는 의병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변준호의 학력에 대해서는 흥사단 이력서의 기록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유년 시절에는 한학을 수학하다, 1910년에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다음해에는 같은 마을의 박씨와 혼인을 했다. 이어서 1912년에는 간이농업학교에 진학하여 2년간 수학했으며, 1914년부터 장로교 계통의 경신중학교에 입학했다. 경신학교에서 수학하던 변준호는 1916년 중국 南京으로 망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흥사단 이력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처음 망명지는 그의 활동 무대였던 미국이 아닌 중국 남경이었다.  하지만 왜 남경을 망명지로 선택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당시의 상황을 추론해보면 다음의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5년에 조선총독부는 「改正私立學校規則」을 시행하여 기독교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 사립학교가 타격을 입었고, 경신중학교도 그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더 이상 국내에선 제대로 된 학업을 이어갈 수 없음을 느낀 학생들 중 상당수는 남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남경에는 기독교 사립명문이었던 金陵大學과 그와 동일 재단이 운영한 金陵神學이나 金陵中學과 같은 학교들이 있었다. 또 한가지로는 몽양이란 존재의 위상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안타깝게도 여운형과 변준호를 직접적으로 연결할만한 자료를 찾지는 못했다. 다만 여운형이 이미 그 이전에 중국 남경 금릉대학에서 수학한 적이 있는데, 청년들의 우상이면서 양평의 선배격인 여운형의 행보가 변준호에게 미쳤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고 생각된다.   즉 1910년대 당시에는 중국 남경이 새로운 문물과 사조를 받아들이기 적당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여운형을 비롯한 청년들이 몰려들었으며, 자연스레 변준호도 그러한 소식을 듣고 영향을 받았을 거라 추론된다. 변준호가 수학했던 금릉대학은 미국의 기독회·북장로회·감리회 등 개신교 계통의 지원을 받았으며, 학생 중에서 미국 영사의 증명을 받거나 중국인 성명을 사용하여 미국 유학을 떠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아마도 변준호도 짧은 남경 생활 중에 미국유학의 가능성을 접했고, 더 나은 공간에서 새로운 출발을 위해 도미 행을 결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변준호는 1917년에 8월30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大韓人國民會(Korean National Association 이하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이주 한인 관리에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북미지방총회장인 姜永韶는 항구에 나아가 직접 한인들을 만나볼 정도로 의욕이 넘쳤고, 그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헌신했다. 미국 이주후 변준호는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지방회의 서기를 맡아 활동했다. 변준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하면서도, 독립운동 의연금과 교회설립금을 성실하게 납부했다.   서서히 변준호가 샌프란시스코 생활에 적응해 가던 중 국내에선 3·1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보고 독립을 기대한 미주 한인들은 3·1운동을 지원하는 여러 단체를 조직했다. 변준호는 그 중 하나인 청년혈성단에 가입했다. 1919년 5월 31일 창단된 청년혈성단은 출범 1주일 만에 50명이 넘는 회원을 모으는 쾌거를 이뤘다. 국민회는 청년혈성단의 빠른 성장을 인정하여, 정식 단체로 승인했다. 청년혈성단은 단장인 黃思宣이 “춍과 칼로 샹죵하는 날에야 우리의 독립이 셩공될지며” 라는 주장을 펼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무장투쟁을 지향한 단체였다.   3·1운동을 지원했던 미주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파악한 국민회는 1919년 12월 22일부터 在美韓人國民大會를 소집했다. 이 대회에서 국민회는 미주 한인들에게 군사교육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安昌浩는 《독립신문》을 통해서 “여러분 獨立戰爭을 하자하자 하지만 말고 獨立戰爭에 必要한 金錢을 準備하시오. 政府의 發行하는 公債人口稅所得稅同胞들의 愛國熱誠으로 내는 願納金或은 外國에 對한 借隸等이 우리의 財源이 될 것이오.”라 하여 한인들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렇게 3·1운동 이후 미주 한인들 사이에서 무장투쟁에 대한 긍정적인 분위기가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혈성단은 오래 지나지 않아 활동이 흐지부지해졌고, 변준호는 興士團에서 새출발을 도모했다. 1920년 3월 7일 흥사단에 가입하여 102번 단우가 된 변준호는 千世憲·金炳堧 등과 서신을 통해 여러 단우들의 근황을 전하면서 의연금을 수납했다. 이 곳에서 변준호는 새로운 단우 모집에 능력을 발휘했다.     2) 다시 무장투쟁으로    1920년대 중반부터 변준호는 1924년 Wesleyan University, 1927년 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변준호가 다녔던 이 두 대학 모두 시카고와 가깝고 한인유학생들이 많았던 학교 중 하나였다. 1920년대 유학생들은 1910년대 유학생들에 비해 학력 수준과 대학 졸업률이 높았으나 미국 이민법의 통제를 받았다. 미국은 늘어나는 일본인 이주와, 자국 내의 배일분위기를 의식하여 이민법을 개정했고, 조선의 유학생들은 이로 인한 불이익을 피할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여권을 가진 학생 신분으로 입국했기 때문에 학적을 이어가지 못하면 미국 이민국에 의해 추방되었다. 반면에 변준호는 여권 없이 1910년대 국민회의 보증으로 입국하여 이민법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1920년대 유학생들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한편 시카고는 미국의 유명한 공업도시로, 한인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특히 강영소가 1924년 9월 金昌俊 목사를 초빙해 시카고 한인감리교회를 재건한 이후, 한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또한 시카고는 미국공산당의 주 활동지로, 사회주의 급진 운동이 빈번했던 곳이다.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진 이도 있었으며, 이에 대한 한인 학생들의 찬반 토론이 뜨거운 곳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미주 한인들은 국제적인 비난이 일본에게 쏠린 것을 목격하고 독립운동 연합 전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그 결과 미주사회에 여러 통일연합이 조직되었고, 한인들 사이에서는 침체되어 있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이러한 때를 맞아 연구회는 사회주의 선전과 더불어 만주사변을 이용한 독립운동의 중요함을 알린 것이다. 1931년 11월 26일의 [신한민보]에 의하면 변준호도 연구회에 참가해 만주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했다. 즉 변준호의 연구회 활동이 늘어나게 된 배경에는 시기적으로 침체된 흥사단과는 달리 연구회가 만주사변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중국과의 연대를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유학 초기에 신진 단체인 청년혈성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할 정도로 변준호는 무장투쟁에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변준호는 연구회가 주장한 한중합작을 독립전쟁을 위한 방략으로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35년에 변준호는 새로운 활동지로 뉴욕을 택했다. 뉴욕은 만주사변 이후 촉발된 북미 한인사회 통합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도시였다. 특히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지원과 한인연합을 촉구하는 단체인 한인공동회가 가장 먼저 조직된 도시가 바로 뉴욕이었다.   이렇듯 뉴욕 한인들은 1930년대에 미주 내의 독립운동에 있어 가장 앞선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변준호의 흥사단 동지들이 모두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Alexander Hurh(허진업), Young R. Kim(김영륙), K. Cho(조극), James C. Penn(변준호), 이 4명은 단우 모집에 성실했다는 평가를 받은 흥사단 동부의 단우들이었는데 모두 1935년에 뉴욕에 거주했던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변준호가 시카고를 떠나 뉴욕으로 이주해 새로운 활동을 도모하게 된 배경에는 한인 통합운동의 열기가 강했던 뉴욕의 특징과 흥사단의 절친한 단우들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이렇듯 변준호는 미국유학 직후 국민회와 흥사단에서 주로 활동했음에도 시카고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사회주의를 자신의 독립운동방략으로 삼았다. 그런데 당시 흥사단 시카고 지방회가 침체기를 겪었던 반면에 연구회는 사회주의 선전 외에도 중국과의 연대를 통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변준호가 연구회 이후 사회주의 단체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것도 그가 투철한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변준호는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중일전쟁의 피해를 입은 중국인들을 지원하자는 취지로 뉴욕,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의 세 도시를 순차적으로 순방했다. 각 도시에서 변준호는 중일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중국인을 후원하자는 연설을 했으며, 흥사단의 젊은 단우들이 그의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흥사단은 1932년 12월 안창호가 일제 경찰에 검거된 이후 활동이 뚜렷하게 위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도부는 보수 성향으로 굳어가는 중이었다. 이에 대해 불만을 품은 젊은 단우의 수는 상당했으며, 변준호가 흥사단 소속임에도 중국후원회의 진보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이 단우들에게 공감을 샀던 것으로 보인다.  변준호는 이경선·김강·이창희·최봉윤·선우학원과 같은 진보 성향의 단우들과 활동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가 1937년 말의 中國後援會(The China Aid Society)였다. 중국후원회는 ‘조직적인 반일선전’을 한인이 아닌 외국인에게 펼침으로서 다른 단체와 차별성을 두었다. 지도부는 트럭을 구입해 도심을 돌며 반일구호를 외쳤고, 장개석의 부인인 송미령에게 후원금을 전달하기로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중국후원회는 국민회 회관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포럼을 개최해 한인사회주의자들을 소집했다. 회원들은 앞으로의 독립운동 방략을 토의함과 동시에 사회주의 스터디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금요일 포럼의 주요 이론가는 변준호, 김강, 이경선 세 명이었다. 포럼 멤버들은 일본에 대한 국제적 보이콧을 강조했고, 젊은 학생들은 미군에 입대하여 중일전쟁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변준호는 193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대한인국민회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여했다. 이 회의에서 변준호는 일화배척과 중국후원을 실행하며 중국인 각 단체에 연락하여 한중합작에 노력할 것’을 요구했다. ‘일화배척과 중국후원’은 중국후원회의 목적이었으며,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변준호가 국민회의 기반을 활용하여 중국후원회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금요일 포럼의 장소가 국민회 회관이었다는 점을 볼 때 그들의 활동은 국민회의 양해하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변준호는 사회주의 단체에서 활동했음에도 기존 단체와 단절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무장투쟁을 한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변준호가 소속된 중국후원회 회원들은 오래된 망명생활로 경제적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미국에서 한중합작을 선전하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朝鮮民族革命黨(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이하 민혁당)의 朝鮮義勇隊 결성과 활동 소식을 듣게 되었다. 1938년 중경에서 개편된 민혁당은 ????앞길???? 등의 잡지를 발간하면서, 무장투쟁 선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의용대의 활동은 중국후원회가 생각한 한중합작에 의한 무장투쟁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중국후원회는 조선의용대의 활동을 후원하기로 결정하고 중국영사관을 매개로 삼았다.  1939년 6월 변준호는 국민회에 조선의용대 후원을 위한 교포소집을 요청했으나, 국민회는 중앙상무위원회를 열어 변준호의 요청을 거절했는데, 중국후원회의 활동이 미주한인의 역량집중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국민회의 이러한 반응을 들은 중국후원회는 내부 회의를 거친 후 1940년 4월에 로스엔젤레스를 중심으로 朝鮮義勇隊後援聯合會(The Korean Volunteers Corps Aid Society in China: 이하 의용대후원회)를 만들었고, 여기에 한인사회 내의 중립성향의 인물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다.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단체인 국민회와 동지회가 조선의용대 후원을 거절했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의용대후원회의 성립은 미주 한인사회주의의 확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의용대후원회에서 변준호는 최능익, 한길수와 함께 조선의용대를 선전하는 임무를 맡았다. 변준호는 시위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는데, 1941년에는 최능익과 함께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반일 시위를 기획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 이 때 변준호는 일본 국기를 태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강론하고, 미국 기자들에게 일본의 만행이 적힌 선전문을 배부했다.   한편 1942년 5월 15일 중국군사위원회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통합명령을 내렸고, 임시정부는 김원봉을 광복군 총사령부의 부사령으로 임명했다. 이에 1942년 6월 1일 金元鳳은 의용대후원연합회 대표 안석중에게 전보를 보내어,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에 의해서 조선의용대는 광복군과 통합되었으니, 의용대후원회를 재조직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통합은 1941년 4월 19일부터 29일까지 북미와 하와이 단체 9개가 참가한 해외한족대회에서 절실히 요청되었던 사항이었다. 그들은 독립전쟁 준비와 한인결집을 위해서는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는 형태로 통합되었으므로 의용대후원회라는 명칭도 바꿀 필요가 생겼다. 중경 민혁당 역시 의용대후원회가 재조직되어 독립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 의용대후원회는 朝鮮民族革命黨 美洲總支部(North America Branch of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이하 미주총지부)로 전환되었다. 1942년 6월 30일 경 조직된 미주총지부는 민혁당의 후원활동을 넘어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고 조직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반영할 새로운 신문제작에 착수했다. 그 결과 진보적 성격의 신문인 [독립]이 1943년 10월 6일 창간되었다. [독립]을 기관자로 삼은 미주총지부는 미주의 대표적인 정치 단체 중 하나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변준호는 바로 이 미주총지부의 위원장을 맡아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집결한 한인 사회주의자들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으며, 재미한인 연합기관인 在美韓族聯合委員會(The United Korean Committee in America, 이하 연합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1940년대는 한인단체 연합을 외치면서도 한인단체들 사이의 불신이 팽배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연합회에 참가한 각 단체 간에는 분열의 조짐이 극명해지고 있었다.이를 심각하게 여긴 임시정부는 1944년 8월 12일에 미주지역 여러 독립단체에게 ‘(각 단체는)미주한인의 결집을 위한 준비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주미외교위원부 개조에 관한 계획을 논의하라’는 훈령을 전달했다.   임시정부의 목표는 문제의 핵심인 이승만과 동지회를 전체회의에 참석시킨 상태에서 조직을 개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훈령에 따라 1944년 10월 28일부터 11월 6일까지 연합회 전체대표회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표회의는 이승만을 제외하고 국민회가 중심이 된 주미외교위원부를 조직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따라서 민혁당의 입장을 대변하여 군사위원회 설치를 중요하게 여긴 미주총지부와 다른 단체 사이에 마찰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변준호는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현 시점의 독립운동에서 무장투쟁이 우선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지금 연합군이 불란서(프랑스) 해방에는 군정부를 세우지 못하엿다. 그 이유는 불란서(프랑스)는 그 민중이 지하운동을 하야 연합군을 맞여들여 같이 싸운 까닭이다. 그런즉 조선도 지하운동과 비밀공작 하지않으면 위임통치나 군 정부 통치를 받게 될 것이다. 결국 최후의 해결은 내지에서 비밀 공작에서 나올 것이다. 앞으로 일아 전쟁이 나게 되면 러시아 세력이 만주로 나올 것이고 현재 영미도 또한 조선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러시아 통치도 원치 아니하고 영미의 통치도 원치 안는다. 우리는 공산정치도 사용할 수 있고 또 민주정치도 사용할 수 있다. 하여간 우리의 주장은 군사 운동을 첫째로 해결하는 것이라고 본다.    위의 발언은 변준호의 독립운동 방략과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 그리고 해방 후 독립국가구상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이다.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우선 변준호는 프랑스에 군정이 세워지지 않은 이유를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연합군과 협력하여 승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변준호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같은 무장투쟁을 해야 하며, 연합국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워야 함을 강조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러시아, 영국, 미국이 속한 연합국 통치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즉 변준호는 연합국의 위임통치나 군정이 아닌 독립국가 건설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공산정치도 사용할 수 있고 또 민주정치도 사용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볼 때 변준호가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한 것이 아님은 알 수 있다. 그는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임시정부가 무장투쟁을 독립의 중심방략으로 삼아 군대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했는데, 아래의 사설이 그것이다.     해외에 잇는 우리들은 적으나 크나 우리가 가진 총역량 정신적 지식적 물질적을 합하여 원동전션에서 피를 흘리며 우리의 적과 싸우고 잇는 우리 광복군에게 탄환 한 개라도 더 살 수 잇게 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본국 안으로 드러가 적을 몰아내게 하기 위하야 우리는 최후의 노력을 아끼지 않어야 할 것입니다.    변준호는 적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광복군을 지원하고 최종적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시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중국후원회 시절 한중합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아가 무장투쟁을 독립운동 방략으로 설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변준호는 광복군이 통일적 무장투쟁의 상징이며, 그것이 실제 성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미주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해 군비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변준호는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가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연합국에 인정받았던 사례를 소개하고 김원봉이 티토와 같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의 드골,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군사적 성과를 내야만 독립에 가까워진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당시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실제 행동을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3) OSS NAPKO PROJECT와 해방 이후의 삶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한인을 활용하는 작전을 계획했는데, 그 중 하나인 NAPKO PROJECT(이하 NAPKO)에 변준호가 발탁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 정부는 미국 내 한국인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1943년 5월 7일 한국문제 관련 정보당국의 실무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미주한인 문제에 대한 비공식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의 결과 ‘비공식적으로 한인들에게 접근하여, 한길수의 입지를 좁히고, 이승만은 명예적으로 대우하고 실질적으로 미국을 도와 임무를 수행할 한인이 필요하다’는 목표가 정해졌다. 이것은 사실상 한길수를 배제하는 동시에 이승만의 영향력 또한 제한하자는 조치였다.  또한 미국의 입장에서 작전에 목숨을 바칠 정도로 반일사상이 투철한 한국인들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FBI는 한인사회에 정보원을 침투시켜 그들의 사상과 행동을 관찰해 전쟁투입에 적합한지를 조사했다. FBI의 정보원들이 연합회 3차 회의를 다룬 보고서에는 ‘전체적인 업무가 지역의 한국단체들을 통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결론지었다. 연합회 회의는 당시 전쟁에 참여할 요원을 모으는데 급했던 OSS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회의에서 한반도 진공작전과 무장투쟁을 꾸준하게 주장했던 인물이 변준호였다.  따라서 OSS는 변준호를 작전에 적합한 인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변준호가 단체 운영을 통해 한인사회에 일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면서도 반일시위 활동을 이어나간 점을 평가했다. 변준호도 연합국과의 국내진공작전을 실천할 수 있는 OSS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김강, 이근성, 유일한과 함께 1월 4일 OSS FEU(Field Experimental Unit)에 민간인 신분으로 참가하였다.  OSS의 NAPKO는 공작원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정보수집과 국내 지하조직과의 연결, 사보타주, 연합군 선전활동 등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 작전에 배치된 한인은 변준호를 포함하여 총 19명이었고, 그들은 훈련을 위해 캘리포니아 남부의 산타카리나 섬으로 이동했다. NAPKO 요원들의 출신은 다양했다. 버마전선에서 탈출한 학병들과 맥코이 수용소의 한인 포로(박순동, 박형무, 이종실, 김필영, 김현일, 이종흥), 그리고 미 육군에 복무 중이었던 장교와 병사(박기벽, 이태모, 이초, 장석윤, 최창수) 그리고 미주에 오래 거주한 민간인들(유일한, 최진하, 이근성, 차진주, 하문덕, 변일서, 변준호, 김강)이었다.   이들 가운데 사회주의자로 구분된 이는 변준호와 김강 둘 뿐이었다. 이 명단을 통해 OSS는 NAPKO가 한인 지도자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지 않게 요원 선발에 신중을 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원들 대부분은 미주 한인사회내의 정치 동향에 중립적이거나, 미 육군 소속의 군인, 그리고 서류상으로 언제든 파기할 수 있는 포로들이었다.   변준호는 1945년 1월 18일부터 FEU 특별훈련소에서 정탐과 첩보에 관한 훈련을 받았다. NAPKO에는 서울 침투가 목적인 Einec Mission과 진남포-평양 침투가 목적인 Charo Mission이 있었다. 변준호는 이근성, 김강과 함께 Charo Mission에 배치되었다. Charo Mission은 ‘공작원 A(이근성), B(김강), C(변준호)를 서해안의 진남포에 침투시켜, 그들을 평양방면으로 진출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Charo Mission은 작전 지휘자인 아이플러가 소속된 Einec Mission을 지원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우수한 요원들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NAPKO는 OSS 중국 지부의 EAGLE PROFECT와 여러 가지 갈등을 겪었다. 두 작전은 종전을 위해 협력을 하면서도 많은 전공을 위해 경쟁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의 NAPKO도 초기보다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다. 이 때 Charo Mission은 Chamo Mission으로 변경되었고 하문덕이 새 요원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작전은 ‘중국에서 비행기를 통해 낙하산으로 침투하여 이근성과 김강은 평양으로 진출하여 지하조직망 건설, 변준호와 하문덕은 활주로를 건설할 것’으로 수정되었다.   NAPKO는 실행 직전까지 갔으나 8월 15일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불발로 끝났다. 작전이 실행되지 못한 이상 요원들의 거취는 모호해졌다. 이로 인해 변준호를 비롯한 민간인 출신 요원들은 계약해지를 당했다. 비록 NAPKO는 실패했지만, 고령에도 불구하고 최전선에 배치되어 군사작전훈련을 수행했던 변준호의 경험은 독립운동사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독립]의 멤버들은 해방 후 조국의 변화에 기대감을 품었지만, 통치자로 들어선 미군정의 정책에 실망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변준호가 쓴 사설들은 1946~1948년까지 미군정 통치기에 집중되어 있었고, 당시의 사설을 통해 변준호는 해방 후 남한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통제하는 미군정의 정책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조선에서 미군정 당국은 조선의 진정한 인민의 혁명을 박멸하였다. 각 정당의 결사 자유권을 허락지 아니하며 진보적 출판 자유를 금지하였다. 그 반대로 반동적 매국적 행동을 하는 신문을 장려하며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와 왜놈의 산업을 압수하여 오직 반동파들에게만 주어서 다수 민중을 압박하는 앞잡이들의 수는 많이 늘게 되었다. 그래서 농민은 농작 후에도 왜놈이 있을 때와 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기아에 빠지게 되었고 노동자들은 실직하여 방황하며 보통 시민은 경제적 혼돈으로 말미암아 남조선은 생지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남조선을 혼돈 상태에 빠뜨려놓고 있는 중에 미소전쟁이 나면 조선은 노서아를 공격하는 전쟁 근거지가 될 것이다     변준호는 미군정이 정당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일본으로부터 압수한 조선의 토지와 산업기관의 권리를 민중에게 정당하게 분배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그런데 여기서 변준호는 친일파들의 존재를 중요하게 비판했다. 그는 해방 후 미군정이 실무 경험을 이유로 이전의 친일 관료들을 재등용했기 때문에 민중이 경제적으로 도탄에 빠졌다고 보았다. 변준호는 남한이 혼돈에 빠진 상황에서는 전쟁이 발발할 우려가 있다고 예측했다.  변준호가 미군정 정책으로 변동하는 남한 상황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변준호는 이를 통해서 미국의 정책은 아시아를 후원하는 가면을 쓴 후에 조선을 시작으로 아시아 전체를 제3차 세계대전을 위한 군사기지를 만드는 것이라 예측했다. 1949년 4월 13일 변준호는 로스앤젤레스 단체연합 대표 중 한 명으로 유엔총회와 미국 정부에 공개서한을 제출했는데, 여기서 통일정부 수립 문제가 큰 화두였다.    우리가 의미하는 통일 민주 조선졍부라는 것은 남북조선을 통일 시킬 수 잇는 능력을 가진 졍부를 말하는 것이며, 남북조선을 통일하기 위하야는 이 정부는 반드시 조선 민족 대다수의 절대적 존경과 신임을 받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며, (중략) 이 정부는 조선 민족의 민주적 의사를 토대로 하고 수립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며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킨 조선 애국자들로써 구성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위의 기사에서 변준호는 먼저 통일 민주조선정부의 등장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5월 10일에 남한 총선거가 실시된 이래 통일정부의 희망은 빛이 바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통일 민주조선정부를 이야기 한 것은 친일파 숙청이 실패했고, 그들이 주도로 이루어진 분단정부를 비판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해방 후 조선애국자들이 정부 구성의 주도권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통일정부가 성립되지 못했으며, 민주적의사와 인민의 이익을 위한 정부의 출현이 실패하게 된 것이었다.그리고 변준호는 ‘조선인의 피와 땀이 기초가 된 새로운 조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동족 상잔의 내란을 배격해야 함’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리 한반도의 상황이 불안정하지만 내란이라는 최대 비극만큼은 피해야함을 간절히 원했다. 1950년대는 한반도 전쟁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시기였다.  해방 후 변준호가 남긴 글을 살폈을 때, 미군정이 남한에서 조선애국자들의 활동을 탄압하고, 귀국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조국이 분단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좌절이 컸음을 알 수 있었다. 1956년 [독립]이 폐간된 후 변준호의 활동은 파악되지 않는다. 변준호는 1966년 2월 20일에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에 대해 [신한민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었다.    청년시절에 학생으로 도미하여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고적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던 변준호씨는 노환으로 인하여 롱비취 「엘세리트」병원에 입원 중이던 바 지난 2월 20일 새벽 4시경에 별세하였다하며 장례식은 오는 3월 1일 하오 2시에 「리드브라더스」 장의소에서 거행된다 한다.    변준호의 죽음을 아쉬워한 김창만이 추모시를 [신한민보]에 올렸다. 추모시는 ‘왜젹성토 시위대엔 번번이 선봉이고 미국군무 비밀대에 자원출젼 하였고나’ 라는 표현을 통해 변준호가 다방면으로 한국을 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했음을 알렸다. 이후 그의 유골은 동지인 김혜란에 의해 본국으로 보내졌고, 1997년 미주 독립운동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질 때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4. 맺음말    해외로 진출한 양평의 독립운동가들은 실천과 투쟁을 미덕으로 삼고 자신의 위치에서 해방의 순간까지 일제와의 대결을 피하지 않았다. 오늘날 소개한 이 3인의 삶은 양평이란 지역을 넘어 자라나는 세대에게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끝없는 투쟁으로 미래를 쟁취한 선각자들의 자랑스런 역사로 기억될 가치가 있을 것이다.
    • 쟁점
    • 3.1혁명
    • 특집
    2018-12-23

실시간 쟁점 기사

  • 2021 양평혁신교육포럼 1차 기획위원회 실시
      ◦다양한 교육주체들의 공동실천 공동책임의 양평 교육자치 실현 목적 ◦기획위원회는 공동위원장(3인), 부위원장(3인), 분과장(4인)으로 구성  경기도양평교육지원청(교육장 김현철)은 2021년 6월 21일(월) 양평혁신교육포럼 제1차 기획위원회를 통해 “교육거버넌스, 협치는 그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다. 어른들이 서로 협력하는 모습의 혁신교육포럼이 되자”고 당부하였다.  2021양평혁신교육포럼은 지난 4월~5월 홍보기간의 거쳐 5월 20일 1차 분과위원회, 6월 8일~10일동 2차 분과위원회를 통해 협의된 분과별 지역교육현안들을 6월 21일(월) 1차 기획위원회에 상정하여 논의하였다. ▲양평혁신교육지구 사업 방향과 추진 방식에 대한 제고▲학부모 자치 활성화 및 진로 진학 지역박람회▲ 마을과 함께 돌봄교실 확대 방안▲양평에서의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교육공동체의 철학 공유를 제안하였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물맑은 고장 양평의 교육인프라가 더 확대되어 전국 최고로 우뚝 설 수 있기를 기대하며 양평 교육현안들을 발굴하여 실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전진선 양평군의장은 “양평교육을 위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의 변화를 요구하는 주민의 소리를 경청하고, 군청과 교육청과의 협업을 약속하겠다”라고 하였다.  담당 장학사 강묘숙은 “『2021양평혁신교육포럼』은 4개의 분과위원회에서 발굴한 지역교육현안을 기획위원회로 상정하여 협의하는 상향식 정책결정을 통해 공동실천, 공동 책임의 지역교육 자치를 실현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밝혔다.  
    • 쟁점
    • 교육
    2021-06-24
  • 박현일 의원, 경기동부권 응급의료시스템 특별지원 건의
    “경기동부권 광역응급의료센터 설치해주오” 양평군의회 박현일의원, 김성주 국회의원 방문 경기동부권 응급의료시스템 특별지원 건의   양평, 여주, 가평, 이천 등 경기동부권 내 취약한 응급의료시스템 구축을 위해서는 양평군 소재 국립교통재활병원과 연계한 응급의료센터 확충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양평군의회 박현일의원은 지난 2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간사인 김성주 국회의원을 방문해 양평군내 국립교통재활병원 인근에 광역 응급의료센터 설치 추진 및 산부인과 확충지원 등 지역현안을 적극 건의했다.   박의원은 “경기동부권역 뿐 아니라 홍천, 횡성 등 강원 서부전역을 포함한 경기동부·강원서부 광역응급의료 시스템 구축을 위해 양평에 소재한 국립교통재활병원에 응급의료센터 설치를 국가차원에서 검토할 때” 라며 “최근 양평지역 아파트 신규 입지와 더불어 지역민들의 절실함을 국회와 해당 정부부처에 전달토록 건의했다”고 밝혔다.   국립교통재활병원을 지난 2019년 10월부터 위탁운영하고 있는 서울대병원(교통병원장:방문석)측은 재활병원에 응급의료센터 설치가 불가한 이유에 대해 첫째,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에 응급의료 업무를 추가하는 등 관련법 개정이 선행 돼야 하며, 총350억원에 이르는 광역 응급의료센터 설치 및 운영비(연150억원)에 대한 국비 지원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앞서 정동균 양평군수 건의시에도 국토교통부 및 보건복지부 또한 “인구 50만명 당 1개소이상 응급의료센터 설치 검토가 가능하나 국립교통병원설립 목적상 근본적인 애로가 많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에 대해 박의원은 “ 양평을 비롯한 경기동부권 응급의료센터 검토는 팔당수계 주민의 생존권적 차원의 호소이며 특히 물이용부담금 증액 배정을 통한 특별재원 마련 및 의료미충족 지역인 인근의 가평과 여주, 이천 등을 광역으로 묶는 방안과 국토부, 서울대병원측의 재활병원과 응급의료 센터 직영 검토 등 합의점을 도출할 여지가 있는 만큼 국회에서 힘을 실어달라”고 주장했다.   양평군내 응급 의료기관인 양평병원 응급실은 전문의 3명이 근무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평일에는 20여명, 주말에는 150~200여명 등 연간 2만여명의 환자가 찾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박의원은 양평군내 분만산부인과가 전무한 실정인 만큼 응급의료센터내 산부인과 개설 건의 및 서울~양평 고속도로와 곤지암~양평 등 3개 노선 국가철도망 정책사업 반영에 대한 현안을 건의해 김의원으로부터 “양평관련 사항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밝혔다.
    • 쟁점
    • 과제
    2021-03-26
  • '양평 청년들이여 딴짓하자!’, 청년공간 딴딴회관 문 열어
     - 지역의 생태적 감수성과 청년 인적자원이 성장하는 공간 ‘딴딴회관’개소   양평군 서부권역의 청년공간인 딴딴회관이 지난 19일 개소식을 개최했다.   ‘청년공간 딴딴회관’은 지난해 행정안전부 마을 공방육성 공모사업에 선정돼 국비 1억, 군비 1억 등 총 2억 원의 사업비 투입해 조성됐다.   구 양수5리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해 공유오피스(윗딴), 다목적실(아랫딴), 공유 부엌 및 공유창고(간딴)의 세 공간으로 구성되었으며, 청년들이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는 딴딴한 토대가 되겠다는 의미의 ‘딴딴’과 마을 사람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인 ‘회관’을 조합해 이름을 지었다.   딴딴회관은 양평군 서부지역 청년 공간으로 역할을 하게되며, 지역에서 이어오던 청년 활동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청년 공간으로 민과 관의 성숙한 협업을 보여준 사례로 무엇보다 지역의 생태적 가치를 발굴하고 키워나가는 청년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공간으로써 확장해 나갈 것이다.   송혜숙 양서면장은 “지난해 지역 청년들을 만나며 군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다”며, “앞으로 청년들이 딴딴회관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며 양서면, 양평군에 뿌리내려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따뜻한 공간되 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열정과 의지를 가진 분들이 모여서 따뜻한 공간이 잘 만들어졌으니, 앞으로는 어떻게 사람들을 오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며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보약같은 지식을 나누는, 딴딴회관을 찾는 사람들과 따뜻한 동행을 이루어내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딴딴회관에서는 나학교(글쓰기 수업, 영상콘텐츠 기획 및 제작 수업, 브랜딩 수업), 서로학교(취미공유회, 청년정책공유회), 마을학교(마을정원사양성과정, 공동체 정원 만들기, 마을기록단)와 같이 청년들이 지역을 탐색하고 스스로, 그리고 관계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며, 프로그램은 딴딴회관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신청하면 된다.
    • 쟁점
    • 교육
    • 교육
    2021-03-06
  • 정의당 경기도당 당대표 성추행사건 입장문
    [정의당 대표 성추행 사건에 대한 정의당 경기도당 입장문]        존경하는 당원 여러분과 도민 여러분, 먼저 참담하고 부끄러운 소식을 전하게 되어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입니다.    성 평등 실현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 온 정당에서 불미스럽고 참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정의당은 원칙에 입각해 철저하고 단호히 사건 해결에 나서겠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성폭력에 단호히 대처하고 성 평등 실현을 위해 더욱 노력하고 성찰해나가겠습니다.    정의당을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신 당원 여러분과 도민 여러분께 큰 실망을 안겨드린 점 거듭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2021년 1월 25일   정 의 당 경 기 도 당
    • 문화
    2021-01-26
  • 양평경찰서장 이은애 총경 취임
        양평경찰서장에 2021년 1월 이은애(75년 생) 총경이 취임했다. 이은애 총경은 경찰대 행정학과(13기)를 나와 서울대대학원 행정학 석사 및 영국 캠브리지대학에서 범죄학을 전공했다. 2000년 4월 총경에 임명되어 경찰청 수사국 수사구조개혁팀을 시작으로 동대문경찰서, 경찰청 등에서 수사구조개혁에 대한 업무를 맡았으며, 2000년 2월부터 행정안전부에 파견되어 수사권조정 후속조치 업무를 맡은 바 있다. 아래는 경력사항이다.   - ’00. 02. 경찰청 공보관실 공보담당관실  - ’07. 01. 국가인권위원회 침해조사과(파견)  - ’10. 02. 경찰청 수사국 수사구조개혁팀  - ’13. 02. 서울 동대문경찰서 여성청소년과장  - ’15. 02. 경찰청 감사관실 피해자보호계장  - ’19. 01. 경찰청 수사구조개혁단 수혁1팀장  - ’20. 02. 행정안전부 파견(수사권조정 후속조치TF)  - ’21. 01. 양평경찰서장
    • 쟁점
    2021-01-26
  • 양평소방서, 공동주택 옥상출입문 자동개폐장치 설치 홍보
    양평소방서(서장 조원희)는 공동주택 화재 발생 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고 안전한 피난을 위한 옥상출입문 자동개폐장치 설치 홍보에 나섰다.   옥상출입문 자동개폐장치란 평상시에는 닫힌 상태로 방범기능 역할을 하고, 화재가 발생하면 감지기의 신호를 받아 자동으로 옥상 문을 열어 유사 시 옥상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전시스템이다.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 16조의2(출입문)에 따르면 2016년 2월 이후 건설된 공동주택 옥상 출입문에는 의무적으로 화재 발생 시 자동으로 옥상문이 열리는 자동개폐장치를 설치하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2016년 2월 이전의 공동주택은 설치가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범죄 발생 우려로 옥상 출입문을 폐쇄하는 경우가 있어, 화재 발생 시 옥상으로 대피할 수 없어 인명피해 발생이 우려되는 실정이다.   이에 양평소방서는 관내 공동주택 관리사무소에 옥상출입문 자동개폐장치 설치 안내문을 발송하였으며, 2020년 12월부터 2021년 1월까지 소방패트롤 불시 방문을 통하여 소방시설 폐쇄·차단 단속 및 자동개폐장치 미설치 대상에 대한 설치 지도와 옥상출입문 피난 경로 이탈 우려 대상에 대한 피난환경 개선을 추진하였다.   조원희 양평소방서장은 “공동주택 화재 시 자칫 큰 인명피해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안전을 위해 옥상출입문 자동개폐장치가 설치될 수 있도록 입주민들의 협조가 필요하다”며 “양평군민의 안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홍보활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 쟁점
    2021-01-26
  • 양평군, 전국 상위 1% 복지체계 구축‘도전’
    -미래 양평형 지역사회 통합 돌봄을 위한 조직개편 단행   양평군이 군민들이 체감하는 복지정책을 수립, 본격적인 현장 적용에 나선다. 전국 지자체 중 복지정책 분야에 있어 상위 1% 수준까지 끌어올린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최근 복지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지자체의 역할도 새롭게 변화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양평군은 복지업무가 폭주하는 상황을 감안, ‘양평군 복지모형 조직개편’을 통해 변화하는 복지 패러다임에 맞춰 적극 대응해 나가기로 했다.   올해 1월 1일, 기존 2과 9개 팀으로 구성됐던 조직을 3과 11개 팀으로 개편했다. 조직개편을 통해 ‘양평형 복지 전달 체계’를 구축하는 한편, 지역돌봄과를 신설함으로써 ‘미래 양평형 지역사회 통합 돌봄 모델’로 복지기능을 강화했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양평군 노인 인구가 25.7%의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지역 내 돌봄 욕구가 증가하고 있다”며 “어르신을 중심으로 한 ‘양평형 지역사회 통합돌봄체계 구축’을 통해 지역 현안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복지정책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양평군은 지난해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지역사회보장계획’ 평가에서 충실성, 적절성, 우수성, 지역주민의 참여도 등 우수한 성적을 받아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6년 연속 우수지자체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룬 것.   또한 전국 229개 기초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지역 복지사업 평가 등에서 8관왕의 영예를 안아 총 1억3천만원 상당의 사업비와 포상금을 받았다. 2019년 지역 복지사업평가인 ‘희망 복지지원단 운영’ 분야 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2년 연속 수상한 것으로 우수지자체로서의 입지를 굳혀 의미가 크다. 장기적·거시적인 관점으로 ’함께하는, 건강하게 하는, 품위 있는 양평군 사회보장‘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힘 써온 양평군의 끊임없는 지원과 노력을 복지 분야 8관왕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게 한 원동력으로 보고 있다.   군에서는 금년도 전 세계적 흐름에 따라 ‘자연, 사람, 도시와 함께하는 양평형 100대 뉴딜사업’ 추진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사람 중심 도시 건설을 위한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서비스’를 군민에게 제공할 예정이다. 전 군민의 기초생활을 넘어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사람이 중심인 도시, 함께 잘사는 양평’을 만들어 간다는 계획이다.      모든 연령이 만족하는 생애주기별 복지정책 양평군은 복지 업무의 다양성 등을 고려해 어린아이부터 청소년,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각 연령층에 맞는 특화된 업무체계로 복지정책에 대한 만족도를 높여가게 된다.   양평군은 국공립어린이집·육아종합지원센터 복합시설을 설치해 운영할 계획이다. 양서면 양수리에 위치할 국공립어린이집·육아종합지원센터는 2018년 10월 공유재산 심의를 거쳐 올해 5월 준공을 앞두고 있으며, 7월 중 개소해 운영된다.   어린이집 이용자 증가에 따라 국공립어린이집을 확충해 영·유아에 대한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고, 원스톱(One-stop) 육아 지원 서비스를 제공할 방침이다.   양평군은 미래세대의 주역인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민관협치 기반 지속가능한 청소년시설’을 운영할 계획이다. 1읍면 1개소 이상 청소년 시설 확충을 목표로 금년에 양서·서종·청운·용문면 모두 4곳에 청소년 공간이 조성되며, 총 15개소가 본격적으로 운영된다.   아울러, ▲청소년상담복지센터와 학교밖 청소년지원센터 운영 ▲청소년 생활장학금 지원 ▲지역중심의 민간 유해환경 감시단 운영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학교폭력 예방 사업 등 사각지대 청소년에 대한 촘촘한 보호망을 구축, 양평군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지난해 저소득층 여성청소년을 대상으로 시행됐던 여성청소년 보건위생 물품 보편지원 사업도 올해부터 전체 여성청소년으로 그 대상을 확대한다. 취약계층 가정의 ‘청소년 생활 장학금 지원사업’도 지속 추진한다.   양평군은 어르신들이 급변하는 IT 시대에 소외되지 않도록 더불어 살아가는 고령 친화 환경 조성을 위한 ‘IT 교육’, 노인 맞춤형 일자리 창출을 위한 ‘시니어클럽을 설치·운영’할 방침이다.   돌봄이 필요한 노인분들이 요양기관이 아닌 기존에 살던 곳에서 노후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양평형 지역사회 통합돌봄 체계’ 또한 구축한다.   ‘지역사회 통합돌봄’이란 돌봄이 필요한 주민들이 개개인의 욕구에 맞는 서비스를 누리고, 지역사회와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통합적 지원의 지역주도형 사회서비스 정책이다.   주거인프라를 확충하고 방문 의료 서비스·요양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며, 지역 케어회 추진단을 구성해 운영할 계획이다.    군 최초 ‘공설화장시설 건립’으로 선진장례문화 정착   정동균 양평군수는 복지시설 운영의 투명성 증대와 선진장례문화 정착 도모를 위해 ‘양평군 공설화장시설 건립’을 민선 7기 역점 사업으로 추진한다.   장례문화의 변화로 화장률이 계속 증가하고 있으나 양평군민들은 공설화장시설 부재로 타지역 화장시설을 이용하는 불편함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양평군은 공설화장시설 건립을 통해 군민들의 불편함 해소를 도울 계획이다.   양평군은 지난해 5월 공설화장시설 건립을 위한 ‘양평군 공설화장시설 건립 촉진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공설화장시설은 2024년 말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올해 4월 최종 후보지 선정을 앞두고 있다.   최종 후보지로 선정된 마을에는 마을 발전기금 60억원을 연차적으로 지원한다. 식당, 매점 등 화장시설의 부대시설 운영권 부여와 화장시설 규모에 맞는 기간제 근로자 우선 채용 등의 인센티브가 제공되며, 유치지역 해당 읍·면민은 화장수수료가 면제된다.   정동균 군수는 “공설화장시설 부지선정에 있어 일방적 행정이 아닌 주민이 참여하는 공감행정을 추진해 2개 마을이 유치 신청했다”며 “화장시설이 더 이상 기피시설이 아닌 지역발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주민공감대를 형성해 기존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성과를 이뤘다”고 밝혔다.   정 군수는 “공설화장시설 건립 추진에 있어 지속적으로 군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라며 “군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친환경 화장시설 건립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 지역주민과 동행하는 따뜻한 자활 양평군은 적극적 판로개척을 통한 자활사업단 활성화로 참여자의 탈수급에 기여한다. 자활근로 사업, 지역사회 연계를 통한 지역사회 복지 실현을 위해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자활사업을 펼친다. ▲with you 택배 ▲with you 클린 ▲맛있는 사업단(청년) ▲알콩달콩(영농) ▲수수공방 모두 5개의 사업단과 함께 지역사회 연계를 추진한다. 적극적 판로개척을 통해 자활사업단을 활성화해 참여자가 탈수급 하도록 기여한다는 취지다.   대표적으로 with you 택배와의 ‘코로나19 구호 물품 배송계약’과 with you 클린과의 ‘행복 플러스센터 청소용역 계약’이 있다. 분기별로 참여기관과 단체를 방문해 피드백을 받고, 향후 방향성을 확보해 실효성 있는 사업으로 개선해 나갈 방침이다.  국가 유공자를 위한 따뜻한 보훈 실천 양평군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강화했다. ‘양평군 국가보훈대상자 등 예우 및 지원 조례’를 개정해 지원 방법을 다양화하고, 질 높은 선도적 보훈 정책을 펼쳐 ‘호국보훈의 도시, 양평’의 입지를 확고히 한다.   기존 매월 10~15만원 지급되던 참전 명예수당을 20만원으로 인상하고, 연령 구분을 폐지해 지급대상을 확대한다. 사망 시 지급하던 사망위로금을 15만원에서 20만원으로 인상했으며, 부모를 여의고 힘든 유년 시절을 보낸 6·25 전몰군경 유자녀 복지 수당을 신설해 매월 10만원씩 지급한다.    코로나19 대응에 빛난 양평복지 양평군은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변화한 복지 패러다임에 맞춰 ‘찾아가는 민·관 협력 서비스’를 지원했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에는 매주 수요일 ‘대그룹 대면 서비스’를 시행했지만 위드(with) 코로나 대책으로 매주 2회 ‘개인별 비대면 서비스’로 변화를 줬다.   코로나19 취약계층인 ‘영유아 비대면 1:1 맞춤형 서비스’를 강화하는 등 상황에 적합한 대응 방법을 인정받아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에서 주관한 ‘코로나19 지역복지 우수사례 공모’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아동 양육 한시지원금을 2회에 거쳐 지급했으며, 어린이집 방역물품 지원, 민간·가정어린이집 38개소에 한시적 운영비를 지원하는 등 코로나19에 대비한 복지 대책을 발 빠르게 준비해 나갔다.   코로나19 장기화로 복지 위기가구 발굴을 위한 모니터링의 필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양평군은 올해부터 읍·면 지역 복지사업 평가를 추진한다. 평가를 통해 대외 복지평가 실적·성과 도출이 가능해지고, 성과에 적합한 포상 제공으로 읍·면 지역 복지사업 활성화를 위한 동기 부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지난해 전례 없는 코로나19 상황으로 각종 사회복지·보훈 행사와 사업이 축소되고, 사회복지시설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아 사회복지사업 추진이 부족했던 아쉬움이 남는 한 해였다”며 “올해는 코로나19 확산 등 외부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원활한 비대면 복지사업을 추진하게 된다”고 말했다.   정 군수는 이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비한 새로운 복지사업을 발굴, 추진할 것”이라며 “소외계층에 대한 복지정책의 사각지대가 없도록 각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 쟁점
    2021-01-26
  • 양평군, 21년 민관협력형 산림경영 시범사업 업무협약 체결
    양평군(군수 정동균)에서는 지난 14일 양평군산림조합과 ‘2021년 민관협력형 산림경영 시범사업’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민관협력형 산림경영 시범사업은 ‘임업 및 산촉 진흥촉진에 관한 법률 제6조’에 따라 사유림 경영 활성화를 위해 산림조합의 공적 기능 강화 및 산림법인과의 상생방안 마련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으로 군은 2021년 조림 및 숲가꾸기 사업을 산림조합에 위탁해 시행한다.   양평군산림조합은 총 사업량 1,420ha, 사업비 29억 원의 조림 및 숲가꾸기 사업을 위탁받아 시행 할 예정이며, 그동안 지자체가 해왔던 사업계획 수립, 발주, 계약, 감동, 준공 등의 역할을 산림조합에서 수행하게 된다. 단, 설계, 시공, 감리 등의 직접사업 시행은 배제돼 조합과 법인의 역할을 나눠 산림사업 경쟁관계가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민관협력형 산림경영 시범사업을 통해 양평군산림조합의 전문적인 산림기술을 바탕으로 양평군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효율적으로 경영할 수 있게 됐다”며, “경쟁력 있는 산림자원 조성과 더불어 민관협력 산림경영 시범사업이 더욱 활성화 돼 다른 분야의 사업으로 확대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쟁점
    2021-01-18
  • 정동균양평군수, 이재정경기도교육감 만나 교육현안사항 건의
      정동균 양평군수는 지난 19일 군청 집무실에서 이재정 경기도교육감과 회의를 갖고 양평군 혁신교육 발전방향과 양평군 교육 현안사항에 대해 논의했다.   이날 회의에서 정 군수는 안전하고 쾌적한 학생활동 및 교육공간 마련을 위해 대안교육기관의 교육환경개선과 관내에 중학교 축구부가 없어 관외 학교로 진학을 하고 있는 실정으로 축구하는 학생들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진학이 가능할 수 있게 청운중학교 축구부 창단을 건의했다.   이에 이재정 교육감은 ”경기도에서는 엘리트 체육의 문제점과 합숙소 병폐 등으로 생활체육과 엘리트체육의 선순환 시스템 구축에 중점 둔 G-스포츠클럽을 운영하고 있다“며, ”청운중학교 축구부 창단은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해 체육부서와 검토 하겠다“고 답변했다.   회의에는 이종인 도의원과 전승희 도의원이 함께 자리해 양평교육 발전을 위한 추가적인 건의사항을 전달했다.   이종인도의원은 관내 고등학교에 임야 관련 전문 인재양성을 위한 산림 관련학과 설치를 건의했고, 전승희 도의원은 서종·양서면 학생을 위한 예술고 설립을 건의했다.   한편, 양평군은 교육발전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군비 47억, 교육청 5억 원을 투입해 혁신교육지구 시즌2 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으며, 학교 환경개선사업 17억, 교육협력 사업 27억을 지원하는 등 교육지원청과 협조를 통해 양평교육발전을 위한 지원을 계속 할 계획이다.  
    • 쟁점
    • 교육
    2020-03-24
  • 양평군 평생학습동아리 어린이용 면 마스크 제작 동참
    양평군 평생학습동아리에서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마스크 부족사태를 극복하고자 어린이용 면 마스크 제작에 동참한다.   이번 면 마스크 제작은 주민복지과가 마스크 제작에 필요한 원단 등 재료를 직접 구입하고 평생학습센터 봉재 학습동아리 회원들의 재능기부를 통해 약 5천5백개의 마스크를 제작한다.   평생학습센터에서 평생학습을 실천하고 있는 5개의 학습동아리(북실과 바늘, 봉틀이, 새봄, 햇살, 동동동 행복바느질) 35여 명 회원들의 자발적인 재능 나눔으로 진행되며, 참여 회원들은 한 목소리로 “마스크를 구하기 어려운 현 시점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 의미 있고 보람된다”고 말했다.   면 마스크는 오는 11일 재료가 확보되는 대로 양평군 평생학습센터 봉재 강의실에서 제작되며 관내 어린이집에 무료 배부 될 예정이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어려운 상황을 함께 이겨내기 위해 재능나눔 실천으로 힘을 보태 주시는 학습동아리에 감사드린다”며, “이러한 사회적 동참이 코로나19로부터 조속히 벗어나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쟁점
    • 교육
    202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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