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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숨은 주역(3)

신한청년당 100주년 –기념식 및 심포지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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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8.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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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숨은 주역(3) 신한청년당 결성 100주년 심포지움 


주제 발표 변은진 몽양 여운형- 2. 신한청년당 창당과 독립청원

늘 세계 정세 변화를 주시하고 그동안 상하이 독립운동단체들과의 관계, 한인사회 속에서의 신뢰를 바탕으로 1918년 신한청년당을 창당한다. 

1918년 중순 경, 몽양은 조만간 유럽에서 전쟁이 끝날 것임을 예측하고,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는 조선의 독립운동에서 청년들의 조직화는 특히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장덕수도 이런 의견에 적극 동조하였다. 그래서 여운형은 인식을 같이 한는 장덕수를 비롯하여 조동호, 신석우, 선우혁, 김철, 한진교 등 6명과 매주 토요일마다 정세토론 모임을 갖고 세계대전 이후 활동을 논의하였다. 

이런 와중에 9월 기독교 노회를 명분으로 국내에 들어와 이승흔, 이상재 등을 만나 국내외 정세와 국내의 역할을 합의한 후 10월 상하이로 돌아온다. 그리고 11월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여운형은 전후의 강화회의가 조선의 독립운동에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 판단, 구체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1918년 11월 28일 신한청년당이 결성되는데 기관지인 ‘신한청년’의 기록에서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결성의 주요 인사들은 주로 동제사의 소장층으로 신한청년당이 한말의 신민회에서 1910년대 초 동제사로, 1910년 후반의 신한청년당으로 민족 운동의 이념과 방략이 계승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신한청년당 창당 배경에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대처하기 위함과 미국의 윌슨 대통령 앞으로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주체의 필요성, 그리고 우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 위한 파견주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 11월 말의 여운형의 바쁜 행보 속에서 추진 배경이 드러나고 있다. 

종전 직후 11월 하순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인 찰스 크레인이 상하이를 방문한다. 여운형은 한인 교민단장 자경으로 11월 27일 환영오찬회에 참석하고, 이 자리에서 파리강화회의가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해결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다. 여운형은 별도의 면담을 통해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해 독립을 호소할 경우 국제적 지원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에 여운형은 크레인이 강조한 민족자결주의, 피압박 민족의 해방,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 파견 수용 등에 크게 고무되어 열강에 ᄒᆞᆫ국독립을 호소하려는 외교적 방법의 독립운동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기고자 한다. 

몽양은 11월 27일 당일에 장덕수 조동호 등을 만나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하고, 11월 28일 6명의 모임을 개편하여 정식으로 신한청년당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29일에는 재중국 신한청년당 총무 여운형 명의로 크레인에게 편지를 작성하여 28일의 독립청원서와 함께 전달하였다. 이것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크레인을 통해 윌슨 대통령에게 문서를 전달하여 조선의 상황을 알리고자 함이었다.
 
11월 28일 몽양 여운형, 조동호, 신석우, 선우혁, 김철, 한진교 등 6명의 구성원에다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로 정해진 김규식, 형식적으로 당수를 맡았던 서병호를 포함해 8명으로 출발했던 것 같다. 이후 곧바로 청년동지들이 합류하여 3.1운동 직후에는 국내나 일본에서 온 망명자가 늘어나면서 안정근, 김구, 이광수, 송병조, 이유필 등 다수가 참여하여 당원이 50여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창당한 지 1년 뒤인 1919년 12월 1일자로 기관지 신한청년에는 이광수와 박은식이 쓴 창간사가 있다. 기관지 신한청년에는 1919년 신한청년당이 6개 부서에 150여명의 당원을 둔 거대조직임을 알 수 있다. 당의 최상의 목적은 대한독립이며, 그 이념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개혁주의 국제평화주의 등에 기조하고 있다. 당 강령은 아래와 같다.
- 대한독립은 기한다.
- 사회개조를 실행한다.
- 세계대동을 촉성한다. 

신한청년당의 해산과 관련해서는 진술이 엇갈리기도 하지만, 1922년 12월 중순 자진해산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시정부가 생기면서 파리의 김규식은 신한청년당과 임시정부 사이에서 종종 혼동되는 문제가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복합적인 정세 변화에 따라 임시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진 해산을 결정하게 되었다. 

정리하면 신한청년당은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제 1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둔 국제정세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독립운동의 호기를 포착하려는 적극적인 대응책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다. 1917년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 14명이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민족대회 소집을 제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즉각적인 호응이나 적극적인 독립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하자, 이를 계승하는 새로운 시도로 신한청년당이 모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결성과 초기 활동은 도쿄에서의 2.8선언과 국내에서의 3.1독립선언을 거쳐 국내외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었다. 

한편,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프랑스의 우편선을 타고 상하이를 출발하여 3월 13일 파리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한국공보국을 설치하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며 4월 10일에는 공보국회보를 발행하였다. 공보국에는 스위스 유학 중이던 이관용이 사무를 맡고, 5월 초에 상하이에서 온 김탕이 대표관을, 6월에는 황기환이 서기장을 맡았으며, 조소앙 여운홍 등이 합류했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일행의 성과는 미미했다. 일본의 방해와 전승국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의 독립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인이 일본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상황에서 국제사회에 그 부당함을 알리고 조선인이 이에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주겠다는 것에도 목적이 있었다. 조선의 상황과 입장을 널리 알리고 독립을 호소하는 데는 강화회의만큼 효과적인 장은 없었던 것이다. 

정리하면, 조선 독립의 여부를 떠나서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처음으로 조선독립에 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조선사회 내에 가라앉았던 독립의지를 고무시키는 데 파리강화회의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당하고 독립청원서를 윌슨에게 전달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과정은 제 1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읽어내는 여운형의 탁월한 선견지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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