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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숨은 주역(2)

3.1운동 전후 여운형의 활동과 신한청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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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8.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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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숨은 주역, 신한청년당 100주년 –심포지움


1주제,변은진 교수- “3.1운동 전후 여운형의 활동과 신한청년당”  ---1


<<몽양과 상해 민단>>
몽양 여운형(1866-1947)
일제가 패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과 건국준비운동을 전개했고, 8.15 직후 권력 공백기의 혼란 상황을 지혜롭게 이끌었으며, 분단의 위험성을 재빨리 눈치 채고 통일운동에 힘썼던 인물로 알려져있다. 변은진 교수는 이런 몽양 선생의 평가에 참정치인이라는 칭호 하나를 더 부여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도자이자 참정치인 몽양 여운형-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을 위해, 해방공간에서는 통일민족국가를 위해 헌신하다 결국은 1947년 7월 29일 혜화동로타리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통일을 지향한 것이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셈이다.
참정치인 몽양 여운형
몽양 여운형은 해방 이후 매일신보의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고, 우익 성향의 잡지 ‘선구’에서 일제시기 최고의 혁명가에 김구와 이승만을 제치고 1위를 했다. 하지만 그를 참정치인이라 새롭게 칭하는 이유는 정치가로서의 남다른 덕목에 있다.
첫째, 언제나 세계 정세의 흐름을 주시하고 역사의 방향을 꿰뚫어보는 판단력과 실천력을 지닌 인물이며
둘째, 조선의 독립이라는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 적과 아를 넘나들면서 활동하는 외교력과 포용력
셋째, 늘 대중의 곁에서 함께 말하고 행동해가면서 쌓아간 신뢰의 정치력을 일제강점기의 민족지도자들 가운데 누구보다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몽양 여운형의 활동을 네 시기로 구분하면
1.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 국내에서 기독교계 활동을 하면서 계몽운동과 청년운동을 전개한다(1907- 1914)
2. 국내 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검거투옥된 시기이다.(1914- 1932)
3. 감옥에서 나온 후 국내를 무대로 항일운동을 계속하면서 건국준비운동을 전개한 시기이다.(1932- 1945)
4. 8.15 해방 이후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다가 끝내 암살을 당하는 시기이다.(1945- 1947)
특히, 두 번째 시기- 세계 제 1차 대전이 종결된 국제적 환경 속에서 최초의 근대적 정당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여 3.1운동이라는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이끌어내고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동력으로 삼았던 과정을 주목했다.

중국 망명과 상하이 교민사회 활동
중국망명
1914년 12월 재산을 정리하고, 난징의 진링대학(금릉대학)으로 유학한다.
유학을 전후 한 과정에서 몽양은 간도, 서간도 등 만주지역과 그곳의 독립운동 기지 및 독립운동가 이동녕, 이희영 등을 만나면서 만주, 시베리아 지역의 상황 변화를 파악하고, 쑨원에게 관심을 가지며 조선의 독립에 주변국인 중국, 러시아, 미국 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금릉대학
조동호와 함께 떠난 금릉대학 유학은 2년 만에 접고, 상하이의 동제사 등 여러 독립단체에 관심을 갖고 참여했던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상하이에서 몽양은 원래 꿈이었던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금릉대학의 학업을 중단하고 상하이로 이주한다.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의 유일한 5선 단장
1917년 상하이로 가서 잡다한 일자리에서 시작하여 조지 피치라는 상하이 YMCA 총무를 만나는 행운을 통해 출판, 기독청년 등에서 활동하면서 재류동포와 중국인, 구미인 등을 만나면서 독립운동의 국제적 지지기반을 넓혀간다.
1917년 여름 부인과 장남을 상하이로 데려가면서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기독교청년회, 한인교회 활동, 친목단체인 교민회 활동, 인성학교 설립 등 교육활동을 통해 교포사회의 신망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이밖에도 취업과 각종 민원과 분쟁조정, 생활개선 등에 앞장서면서 교포사회 내에서 몽양은 점차 신임이 쌓이고, 덕망 높은 지도자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갔다.
1917년 약 30여명의 교인들과 예배를 보게 된 몽양 여운형은 교민자제들이 중국어를 몰라 입학할 수 없는 사정을 알고 인성학교를 세운다. 또 1917년-1918년 사이에 30여명의 청년들에게 미국유학을 주선하였고, 상해 고등보수학원에서 직접 교편을 잡기도 하면서 점점 존경받는 인물로 성장해갔다.
교민들 자치기관인 한인거류민단을 조직하고 친목단체인 상해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하고, 1919년 이 단체는 상해대한인민단이 된다. 1920년 상해대한인거류민단으로 명칭이 변경된 민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의 지휘감독을 받으며 활동했는데, 몽양은 민단의 단장으로 그 중심에 있었다. 1919년에서 1929년까지 10년의 기간 동안 몽양은 무려 민단의 단장을 5차례나 맡았다. 이런 경우는 몽양이 유일했다. 민단의 몽양에 대한 신임이 어느 정도로 두터웠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그의 정치력은 오늘날의 한 연구에서도 “상하이 임시정부 주변에서 이와 같이 진지하게 당해 지역의 동포를 위해 헌신한 인물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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