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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3.1운동의 전개 과정과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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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8.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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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3.1운동의 전개 과정과 주요 인물

 

 

장원석(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

 

 

1. 머리말

 

3·1운동은 폭압적인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떨쳐 일어나 191931일을 시작으로 약 2개월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과 국외 동포사회로까지 퍼져 나간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항일투쟁이었다. 이렇게 표출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져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헌법 정신의 기초를 이루었다.

하지만 3·1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3·1운동은 중국 상하이에 망명 중이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19181128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윌슨 미국 대통령과 파리평화회의 앞으로 독립청원서를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몽양은 김규식 선생을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는 동시에 신한청년당 당원들을 국내외 동포 사회로 보내 전 민족적 만세시위를 조직하여 조선 독립의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여운형 선생과 신한청년당원들이야 말로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숨은 주역들이었던 것이다.

여운형 선생이 태어난 양평 또한 전국 어느 지역 못지않게 3·1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지역이다. 양평은 개성을 제외하면 시흥군과 함께 경기도 내에서 만세시위운동이 가장 먼저 발생하였다. 310일 시작된 양평의 만세운동은 4월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25회의 시위에 당시 69000여명의 군민 중 21000여명이 참가하여 그 규모면에서 방대했을 뿐만 아니라 총 82명이 검거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시위 양상 면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양평 만세시위 운동의 전개 과정을 발생 순서에 따라 각 지역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 양평 3.1운동의 전개 과정

(1) 서종면

양평의 3.1운동은 310일 서종면 문호리에서 처음 만세 시위가 발생한 이래 약 한 달에 걸쳐 크고 작은 시위가 이어졌다. 수백 명이 참가한 문호리 시위는 천주교인들이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서종면을 비롯한 양근군 일대는 일찍부터 천주교를 수용하여 전국으로 전파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곳이다. 또한 서종면은 개항 전후 위정척사운동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한 유학자 화서 이항로가 태어난 곳이다. 그는 만년에 이곳에 머물면서 후진을 양성하여 화서학파를 형성했는데, 항일의병의 주요 지도자들인 유인석, 최익현 등이 바로 화서 문인들이었다. 서종면에서 가장 먼저 만세 시위가 일어난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평등의식과 항일정신이 이어졌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2) 청운면, 단월면

문호리 시위 이후 한동안 소강상태에 있던 양평 지역에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323일 청운면이다. 청운면 만세운동은 용두리 장날 시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주로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확산되었다.

시위를 주도한 인물은 단원면 덕수리의 신재원과 부안리의 김종학, 양동면 쌍학리의 정경시, 그리고 갈운리의 민주혁 등이었는데 모두 천도교인들이었다. 이들이 미리 준비한 조선독립기(朝鮮獨立旗)”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쳐 시위를 선도하자 200여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시위행진에 호응했다. 이에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주도자들을 체포함으로서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날 경찰에 체포된 시위 주도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신재원 · 정경시는 징역 2, 김종학 · 민주혁은 징역 16개월에 처해졌다.

 

(3) 갈산면(현재 양평읍)

324일에는 양평군의 중심인 갈산면에서 1,000여명이 모이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진행되었다. 이 시위는 연희전문학교 서기인 이진규가 독립선언서 수십 매와 대한독립회 명의로 된 아래의 격문 수십 장을 가지고 양평으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지금에 각 경찰서에서 형벌을 당하는 형제, 자매를 보고, 또 태황제 폐하를 암살하였다. 2천만 동포는 나라 없고 임금 없는 백성이 된 지 이에 10년의 능욕을 당하였다. 나라 없는 노예가 되어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총, 칼 밑에서 죽는 것만 못하다. 독립의 시기는 왔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는 만나기 어렵다. 맹렬히 분기하여 민족자결을 하고 독립기를 높이 게양하여 형벌 속에 있는 형제 자매를 구하고 역적의 무리를 잘게 토막쳐 우리들의 마음 속을 상쾌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동포여! 이 시기를 잃지 말고 독립기를 번득이고 맹렬히 분기하여 독립하라

 

이 날은 갈산면 양근리 장날이었다. 이진규는 장터에 모인 1,000명의 군중들에게 조선민족은 이 기회를 타서 일본 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의 연설과 동시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군중들도 적극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올렸다. 시장을 일주하는 과정에서 곽영준(21세 천도교도), 한창호(23, 기독교도, 자전거 수리업) 김경성(32, 농업), 서상석(19, 양평우편소 사무원), 김석봉(20, 요리점 고용인), 한봉철(22, 농업) 등의 청년들이 적극 호응하여 시위를 이끌어 나갔다. 오후 2시경 일제 헌병이 나타나 이진규와 곽영준을 보안법 위반이라 하며 헌병분견소로 끌고 갔다. 이에 군중은 격분하여 헌병분견소 앞에 가서 만세를 부르며 이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수백 명의 군중은 갈산면사무소, 양평군청, 양평우편소와 박희영의 집에 쳐들어갔다. 이들은 군청과 면사무소의 서류, 장부 일부를 폐기하고 면장 김찬제를 사무소 밖으로 끌어내 구타하였으며, 우편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군수와 면장이 숨은 것을 찾아내고자 박희영의 집을 뒤지기도 했다

이날 일본 경찰에 체포된 시위 참가자들은 재판에 넘겨져 이진규 징역 2, 한창호·한봉철은 징역 10, 곽영준은 징역 8, 김경성·김석봉·서상석은 징역 6월의 형을 받았다.

 

한편 이날 갈산면 공흥리에 사는 이용준(37)도 이와 별도로 4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양근리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갈산면 사무소로 쳐들어가 면장 김찬제, 면서기 서병일을 바깥으로 끌어내어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용준은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3년형을 언도받았다.

 

(4) 강상면

강상면 만세운동은 329일 교평리 나루터에 모인 군중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이날은 5일전 양근리 시위로 인해 장이 제대로 서기 않았으나 교평리 일대에 이미 100여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나루터에 모인 사람들은 조선은 독립은 세계 각국에서 이미 승인하였다”, “일본도 우리나라를 내놓으려고 모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등 정치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러한 말을 들은 송학리 사는 신석영이 우리 나라가 독립이 되었으니 기쁘지 않소!”라며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모여 있던 군중들이 호응하여 순식간에 나루터는 시위장으로 변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강건너 갈산에서 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여 다수가 부상을 입고 해산하였다. 신석영은 체포되어 1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재판정에서도 우리나라가 독립되었다고 기쁨에 넘쳐 만세를 부른 것이 왜 잘못이냐?”며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5) 용문면

330일에는 용문면 광탄리에서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 용문면 시위는 마룡리의 조영호가 오촌리에 사는 김윤구, 신순근 등과 함께 주도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수백명의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때 조영호는 군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우리가 지금 독립하는 것은 하늘의 운수에 의하여 되는 것이다.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겠느냐? 일본인은 모두 자기의 본적지로 돌아가라. 지금까지 두 나라가 합친 것은 무리한 일이다. 예를 들면 1개의 달걀이 쌍란일 경우 이것이 부화하면 두 마리의 병아리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는 일본과 쌍란 속에 들어 있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응당 두 가지로 갈라져야 하지 않겠느냐

 

이에 고무된 군중들은 박수 갈채를 보내고 가두행진에 나셨다. 시위 주도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조영호는 징역 8, 김윤구·신순근은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6) 강하면

331일 강하면 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00여명의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이날 시위는 68세의 노인 최대현이 주도했다. 그는 한말 오위장(五衛將) 출신으로 1907년 군대 해산 후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학생들의 계속된 권유로 27일에 시위에 참가한 이후 앞장서서 시위를 이끌어갔다.

앞서 그는 고종이 사망하자 213일에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셨으매, 그 성은에 보답하기 위하여 능 있는 곳 앞에서 제사를 지고자 하니, 상하의 모든 백성이 그의 자력에 따라 금원을 지출함으로써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만 될 것이므로 각각 분에 맞는 기부를 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문서를 만들고, 그의 양자 최윤식을 시켜 면사무소 등사기를 빌려 인쇄한 후 군내 11개 면장에게 배부하기도 했다.

 

(7) 양서면

1,000여명이 참가했던 24일의 양근리 장날 시위 이후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시위는 4월 접어들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했다. 전날 밤 11시에 강하면에서 시작된 시위가 밤을 세워 다음 날까지 이어져 이웃 양서면으로 이동했다. 41일 오전 4시경에는 양서면 도곡리에 있는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 2,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잇따라 연호하며 열기를 높였다. 이날 시위에는 전날 강하면 시위를 주도했던 최대현이 참여하여 시위를 지도했다.

다음 날인 2일에도 양서면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양서면 시위에는 최대현과 함께 강상면 출신의 이보원, 윤기영과 양서면 출신의 윤기영, 김선동, 신우균, 여광현, 여운긍 등이 긴밀히 준비하여 군중들을 이끌었다. 이 중에서 특히 신원리의 여광현, 여운긍 등 몽양 여운형의 친척들이 주도하여 1,000여명의 군중들이 양서면 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해 나갔다.

 

(8) 고읍면(현재 옥천면)

다음 날인 43일에는 양서면에 이웃한 고읍면에서 양평 3.1운동 최대 규모의 4개면 연합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전날 최대현을 비롯한 지도부는 함께 서울에서 온 학생 2명과 동리민들이 논의하여 43일에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43일이 되자 강상, 강하, 양서, 고읍 4개 면민 4,000명이 고읍면에 모여 만세 시위를 결행하였다.

고읍면 사무소 앞에서 최대현은 군중 앞에 나아가 읍내로 가려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여 양평 읍내로의 진출 여부를 물었다. 군중들은 모두 손을 들었지만 머뭇거리고 행진하지 않았다. 이에 최대현이 읍내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며 앞장서서 이끌자 군중들은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가 고읍면 옹암리(瓮岩里)와 용암리(龍岩里) 사이의 작은 언덕을 지나던 중 출동한 일본 헌병대와 마주쳤다.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최대현의 양자 최윤식을 포함한 3명이 순국하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 8명 가운데 3명도 끝내 순국했다. 그리고 최대현 마저 체포되면서 시위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9) 양동면

43일의 고읍면 시위 이후 양평의 시위 중심 지역이 양동면과 지제면으로 옮겨갔다. 47일 양동면 석곡리 섬실의 양동면 사무소 앞에서 3,000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전석현이 동지를 규합하여 격문을 작성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전석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종성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치자 장날에 모인 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시위 군중들이 양평을 향해 행진하던 중 양평기마헌병대 수십 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10) 지제면(현재 지평면), 개군면

411일 지제면 곡수장터에서 시위군중 3,000여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당시 여주군 개군면에 속했던 김영규, 이철영, 이호승 등의 사전준비에 의해 진행되었다. 시위군중이 행진을 하던 도중 기마헌병대의 총격을 받아 김영규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시위대는 해산했다. 시위 이후 헌병대가 마을을 수색하면서 이호승이 총격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3. 양평 3.1운동의 주요 인물

한 달 이상 치열하게 전개된 양평 3.1운동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했다. 그리고 82명이나 되는 분들이 검거되어 재판을 받고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 중에서 양평 3.1운동에 참여한 공훈으로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현재까지 20명이다.

이 외에도 3.1운동으로 투옥되는 등 희생을 치렀지만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분들이 적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아래는 양평 3.1운동과 관련해서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들의 공훈록 내용이다.

 

(1) 곽영준(郭英俊, 1899.9.22~1932.4.28)

주소 :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창안리 217

서훈 : 애국장(2006)

1919324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葛山面) 양근리(楊根里)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이신규(李藎珪)가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매를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배포하고, 1,0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곽영준은 19197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고, 동년 1023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곽영준은 1920428일 출옥하여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서 활동하던 중 동년 7월 양재은(梁在殷) 등과 회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을 위해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위해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221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7호위반 및 강도죄로 징역 7년을 받았고, 동년 329일 공소기각 되었다. 1931년에는 양평군에서 양평농민조합준비회의 지제지부(砥堤支部) 면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32년 이후 양평적색농민조합에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 김경성(金慶星, 1888.6.10~1950.10.5)

주소 : 경기도 양평군 葛山面 楊根里 339

서훈 : 대통령표창(2006)

1919324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葛山面) 양근리(楊根里)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이신규(李藎珪)가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1,0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김경성은 이 날 오후 3시 경에는 양근리 면사무소에 가서 면장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요구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김경성은 19197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고, 동년 8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기각, 동년 102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기각 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 김상경(金相卿, 1876.6.12.~1919.3.4)

주소 :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망미리 275

서훈 : 애국장(2015)

1919년 음력 3월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곡수리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하였다.

양평군의 만세운동은 310일 서종면 문호리에서 수백 명의 만세시위가 일어난 이후 323~24일경부터 4월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323일 청운면 용두리 시장 만세시위, 324일 이진규(李盡珪)가 주도한 갈산면 만세시위, 330일 용문면 광탄리 만세시위, 331일 강하면 사무소 앞 만세시위 등 크고 작은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이어 41일에는 양서면에서 2,000여 명이, 43일에는 고읍면에서 4,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44일에는 지제면 곡수리에서 주민 2,70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김상경도 이날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양평군내 곳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자, 일본 헌병과 경찰은 군중을 진압ㆍ해산하기 위해 무차별 총격을 퍼부어 5명이 순국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김상경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4) 김영규(金英圭, 1888.11.5~1919.4.11)

주소 : 경기도 楊平介軍161

서훈 : 애국장(1991)

경기도 양평 사람으로, 1919411일 양평 지제면 곡수 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선두 대열에 서서 시위군중을 지휘하며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급거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시위군중이 지켜보는 현장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5) 김윤구(金崙求, 1893.11.5~1950.4.15)

주소 : 京畿 楊平 龍門 梧村 181

서훈 : 대통령표창(2005)

191931일 손병희 등 이른바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한 이래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그는 고향인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심하였다.

330, 광탄리에 군중들이 모이자 주도자의 한 사람인 조영호(趙瑛鎬)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들을 향하여 독립은 천운이니 사람의 힘이 미칠 바가 아니다. 일본인은 모두 본적지에 귀국하라. 예컨대 1개의 계란이라도 쌍계이면 2개의 계란에서 2개의 병아리가 나오는 것이니, 1국으로 함은 쉽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연설하였다. 이는 우리나라가 절대 일본에 병합될 수 없음과 독립의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때 그는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5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6) 김종학(金鍾學, 1876.8.24~미상)

주소 : 京畿 楊平 丹月 富安 407

서훈 : 애족장(2010)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3월 천도교주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 천도교인이었던 김종학은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던 중, 먼저 단월면 덕수리의 신재원(申在元)과 양동면 쌍학리의 정경시(鄭慶時)323일 용두리 시장의 장날에 거사를 일으키기로 하고 시장으로 가던 중, 단월면 부안리의 김종학과 청운면 갈운리의 민주혁(閔周赫) 등을 만나 내물리 어느 다리 밑에서 거사계획을 논의하였다. 김종학 등은 태극기 등을 만들어 시장으로 갔다. 신재원과 김종학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 200여 명이 모여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 일로 김종학은 191962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6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7) 민주혁(閔周爀, 1870.11.17~미상)

주소 : 京畿 楊平 靑雲 葛雲 133

서훈 : 애족장(2006)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로 인해 옥고를 치렀다.

양평군에서는 310일 서종면 문호리에서 시위가 시작된 이후 323일 청운면 용두리에서 천도교인들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민주혁은 1919323일 양평군 청운면에 거주하는 천도교인 신재원(申在元정경시(鄭慶時)가 청운면의 용두리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참여를 권유하자 동참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같이 여물리 무명교 아래에 가서 조선독립기(朝鮮獨立旗)’라고 쓴 깃발을 마련한 후, 용두리 시장에서 15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조선독립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민주혁은 19194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6월을 받았고, 경성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8) 신석영(辛錫永, 1881.2.17.~1960.8.2.)

주소 : 京畿 楊平 江山 松鶴 893

서훈 : 애족장(1990)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329일 양근읍 장터로 장보러 가려고 강산면 교평리(交坪里) 도선장에 나와 있었다. 그러나 324일 양근읍의 만세시위로 이날은 장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때 그는 나루터에 모인 군중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중에 조국이 이미 독립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그는 이에 나루터에 세워놓은 태극기를 들고 "여러분!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었으니 기쁘지 않소?"하며 독립만세를 부르자, 100여명의 군중도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고 나루터는 이내 만세시위장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날의 시위로 일경에 피체되어 이해 5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였으나 613일 경성복심법원과 726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9) 신우균(申祐均, 1889.6.12~1921.1.25)

주소 : 경기도 양평 양서 대심 57

서훈 : 건국포장(2018)

19194월 경기도 양평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궐석재판으로 90를 받았고, 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다 19205월 경기도 양평군으로 돌아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기도 지단을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0) 신재원(申在元, 1860.11.9~1920.8.7)

주소 : 京畿 楊平 丹月 德水 336

서훈 : 애족장(1990)

경기도 양평 사람으로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919323일 청운면 용두리 장날을 이용하여 정경시(鄭慶時김종학(金鍾學민주혁(閔周赫)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31일 천도교 교주 손병희 등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을 한 이래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정경시와 만나 용두리 장날인 323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는 323일 정경시와 함께 용두리 시장으로 가던 중 김종학과 민주혁을 만나 그들의 거사계획을 말하여 찬성을 얻고 여물리(餘勿里) 다리 밑에서 자신이 사 가지고 온 흰 천에 김종학으로 하여금 조선 독립기라고 쓴 깃발 3개를 만들게 하였다. 장터에 이르러 150여 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 해 62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1) 여광현(呂光鉉, 1886.3.2~1962.8.10)

주소 : 京畿 楊平 楊西 新院 496

서훈 : 대통령표창(1995)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그는 1919331일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과 43일 고읍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광무황제의 승하를 당하여 망국의 통한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중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최대현(崔大鉉이보원(李輔元신우균(申祐均) 등과 뜻을 모아 거사일을 331일로 정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비밀리에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들을 포섭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31일 오후 11시에 그는 강상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백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시위는 밤을 세워 다음날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41일에 이들은 이웃 양서면 사무소로 행진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43일에도 고읍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 때에는 고읍면 주민 뿐 아니라 인근의 강상면·강하면·양서면 등지에서 합류하여 시위 군중의 규모가 4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고읍면 만세시위에 이어 양근읍으로 향하였으나,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이 때 윤기영은 만세현장에서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10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2) 윤기영(尹璣榮, 1871.2.17~1941.4.16)

주소 : 京畿 楊平 江上 松鶴 158

서훈 : 대통령표창(1995)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그는 1919331일 양평군 강상면과 43일 고읍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광무 황제의 승하를 당하여 망국의 통한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중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최대현(崔大鉉이보원(李輔元신우균(申祐均) 등과 뜻을 모아 거사일을 331일로 정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비밀리에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들을 포섭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31일 오후 11시에 그는 강상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백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시위는 밤을 세워 다음날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41일에 이들은 이웃면인 양서면 사무소로 행진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43일에도 고읍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 때에는 고읍면의 주민 뿐아니라 인근의 강상면·강하면·양서면 등지에서 합류하여 시위 군중의 규모가 4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고읍면 만세시위에 이어 양근읍으로 향하였으나,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이 때 윤기영은 만세현장에서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10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3) 이보원(李輔元, 1870~1949.12.30)

주소 : 京畿 楊平 江下 屛山 801

서훈 : 대통령표창(1993)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1919331일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면사무소 앞에서 최대현(崔大鉉윤기영(尹璣榮신우균(申祐均) 등과 함께 시위군중 300여 명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43일에도 최대현의 주도로 양평군 고읍면에서 이웃 면 주민 4천여 명을 규합,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절규하는 등 시위행진을 벌여 읍내로 향해 행진하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의해 시위가 중단되고 여러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4) 이신규(李藎珪, 1899.7.22.~1926.1.24.)

주소 : 경성부 崇二洞 123

서훈 : 애국장(2006)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갈산면(葛山面) 양근리(楊根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양근 지역의 만세시위는 연희전문학교 서기로 재직하고 있던 이신규가 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회(大韓獨立會)’ 명의로 된 격문 수십 장을 가지고 1919324일 이곳에 도착하면서 본격화하였다. 이신규는 양평군의 만세시위가 평온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서울에서 특파되었다. 324일은 장날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는 길가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에게 조선 민족이 이 기회에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하지 못하면 큰 일이라는 요지의 연설과 동시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에 모인 군중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장을 행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직후 체포된 이신규는 19191023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출옥 후 옥고 후유증으로 요양하다 28세에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5) 전석현(全錫玄, 1884.5.27~미상)

주소 : 京畿 楊平 楊東 石谷 379

서훈 : 애족장(2012)

전석현은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양동면(楊東面)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전국적인 독립만세시위가 발발했다는 소식은 양평군에도 전해졌다. 용문면 광탄리, 강하면 면사무소 앞, 양서면 면사무소, 고읍면, 청운면 용두리 시장, 양근읍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발했다는 정보를 들은 전석현과 이종성(李鍾聲)은 양동면에서도 속히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각 부락에 배포하는 동시에 많은 동지를 규합하였다. 미리 약속했던 191947일에 양동면사무소

앞에 많은 군중이 모였고 이날은 때마침 석실리(石室里) 양동(楊東)장날이라 장꾼과 합세하였다. 전석현은 선두에 서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종성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군중은 일제히 호응하였다. 군중은 시가지를 돌며 시위하고

양평읍내로 향하였다. 시위대가 각 부락을 지날 때마다 남녀노소가 문 앞에서 손을 흔들며 만세를 따라 불렀다. 그 때 용두리 헌병대가 양평으로 연락하여 불시에 기마헌병대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일사불란한 시위대가 계속 만세를 부르고 행진하니 일병이 총을 쏘아 사상자가 많이 났다. 군중은 목적지인 양평으로 가지 못하고 전석현과 이종성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전석현은 624일 경성지방법원 여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그는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424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6) 정경시(鄭慶時, 1855.9.23~1929.2.24)

주소 : 京畿道 楊平郡 楊東面 雙鶴里 198

서훈 : 애족장(1990)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경기도 광주에 분원의숙(分院義塾)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천도교인이다. 1919323일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 장날에 신재원(申在元김종학(金鍾學)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동년 62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206월에 출옥하였다.

그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출옥 직후인 19206월에 대한독립단 경기도 지단장 한덕이(韓悳履)의 권유로 동단에 가입하여 임시정부의 격문을 양평지방에 배포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양평군수, 양평서 일경등에게 사형집행선고문 등을 우송하는 등 활동하다가 19216월에 다시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7) 조영호(趙瑛鎬, 1882.5.25~1960.6.10)

주소 : 京畿 楊平 龍門 馬龍

서훈 : 대통령표창(2005)

191931일 손병희 등 이른바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한 이래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그는 고향인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심하였다.

330일 광탄리에 군중들이 모이자 그는 독립기를 앞세우고 군중들을 향하여 독립은 천운이니 사람의 힘이 미칠 바가 아니다. 일본인은 모두 본적지에 귀국하라. 예컨대 1개의 계란이라도 쌍계이면 2개의 계란에서 2개의 병아리가 나오는 것이니, 1국으로 함은 쉽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연설하였다. 이는 우리나라가 절대 일본에 병합될 수 없음과 독립의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어 그는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5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8) 최대현(崔大鉉, 1852.1.14~1931.11.6)

주소 : 京畿 楊平 江下 全壽 408

서훈 : 애국장(1995)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한말에는 의병장으로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였으며, 3·1운동 때에는 양평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같은 해 8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최대현은 대한제국 시기 오위장(五衛將) 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331일 양평군 강하면 사무소 앞에서 6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음 날인 41일 양서면 도곡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43일 강상·강하·양서·고읍 등 4면의 주민 약 4천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을 인솔하고 고읍면 옹암리(瓮岩里)와 용암리(龍岩里)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고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 최윤식(崔允植, 1896.2.24~1919.4.3)

주소 : 京畿 楊平 江下 全壽 501

서훈 : 애국장(2014)

19194월 경기도 양평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피살, 순국하였다. 19192월 중순 양평군에서 양부(養父)인 최대현(崔大鉉)이 작성한 고종 황제의 승하를 애도하는 제사를 올리기 위한 기부금 모집 취지문을 인쇄, 배포하였다. 이후 각 곳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최대현은 양평군 강하면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하였다. 그는 331일 양평군 강하면사무소 앞에서 면민 3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41일에는 양서면 도곡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최윤식은 43일 오후 3시에 양부와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강상ㆍ강하ㆍ양서ㆍ고읍면 주민 4천여 명이 모인 대규모의 시위였다. 이들은 고읍면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양평면 양근리로 행진하였다. 이곳에서 시위가 한층 격렬하게 전개되자, 이를 탄압하기 위한 경찰의 발포로 3명이 순국하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자 8명 가운데 3명도 끝내 순국하였다. 이날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최윤식도 일경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 한봉철(韓奉喆, 1898.3.2.~(1936))

주소 : 京畿 楊平 葛山 楊根 154

서훈 : 독립장(2006)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군과 교전 중 희생되었다.

한봉철은 중등학교 시절 기독청년회에 입회하여 활동하였다. 1919324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양평군청과 양평우편소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받았다.

또한 19206월에는 기독교계의 장로인 한진리(韓眞履)의 권유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배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6월을 받았다. 19254월에는 혁청단(革靑團) 선언 강령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속되어 수일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봉철은 만주지역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하여 신활청년회(新活靑年會)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512월 길림성 반석현(磐石縣)에서 남만청년총동맹(南滿靑年總同盟) 창립에 참여하였다. 남만청년총동맹은 192511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결성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단체로 일반대중의 문맹을 퇴치하고 강연회와 토론회 및 신문강독회 등을 통해 청년 학생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신사상을 보급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봉철은 1929년 목릉현(穆稜縣)에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만주비서부(滿洲秘書部) 남만(南滿) 1구역의 조직부장으로 청년운동 및 사회운동을 전개하였고 19339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獨立師)의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341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의 군수부장이 되었다.

만주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한봉철은 1936년 연길현(延吉縣)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독립운동사자료집???? 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한민족독립운동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98,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19,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양평군지???? , 양평군지편찬위원회, 2005

????향맥 제25, 양평3·1운동사????, 양평문화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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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3.1운동의 전개 과정과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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