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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을 맞이하는 3ㆍ1혁명의 정신과 몽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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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8.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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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을 맞이하는 31혁명의 정신과 몽양

 

 김삼웅(현대사연구가, 전 독립기념관장)

 

 경장의 시대, 역사관 정립부터

 

 대한민국은 지금 엄중한 역사의 전환기에 처해있다.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반년여 앞둔 현시점은 역사의 정도(正道)와 정맥(正脈) 회복하여 남북화해와 민주공화정의 방향으로 발전하느냐, 식민지 잔재와 남북대결, 각종 적폐를 미봉한 채 전제적 퇴행을 거듭하느냐의 갈림길이다.

 국가도 하나의 유기체에 속한다. 창업수성경장쇠퇴의 과정을 걷게 된다. 자주독립과 반봉건 민주공화제를 기치로 봉기한 31혁명과 이를 바탕으로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창업이라면,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625공산침략 분쇄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는 수성에 해당한다. 지금은 경장(更張)의 시기다. 다른 용어로 말하면 개혁이다. 조선왕조가 병자ㆍ정묘 양란을 겪고도 경장을 하지 못한 채 낡은 봉건체제를 유지하다가 결국 왜적에게 국치를 당하고 말았다.

 1884년의 갑신정변, 1894년의 동학혁명이나 갑오경장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성공했다면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1884년 갑신정변은 1868년 일본 메이지 유신에 불과 16년 차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이 근대적 국가개혁을 실천할 때 조선왕조는 기껏 왕권이나 강화시키는 칭제건원 따위로 미봉하고 말았다. 경장의 시기에 제대로 개혁을 하지 못하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세계문명사의 성장과 소멸과정을 연구한 아놀드 토인비는 명저역사의 연구에서 창조적인 엘리트 집단이 부패하면 그 문명권은 몰락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투쟁으로 창업이 이루어지고, 민주화운동과 산업화로 어느 정도의 수성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일제잔재ㆍ군사독재잔재, 사대주의세력ㆍ냉전분단세력의 발호로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고 이들이 남긴 적폐는 우리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 이들 세력의 공동분모는 조선후기 집권층으로서 결국 망국의 주역이고 식민지의 적자인 노론벽파의 계열이거나 정신적 상속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로 이어진 30년이 넘은 군사독재는 예외로 치더라도 이명박ㆍ박근혜 집권 9년 동안 대한민국의 지배층이 얼마나 부패하고 나라가 어떻게 추락했는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국가권력의 사유화, 남북관계의 극한대결구도, 정보기관의 특수활동비 빼돌려 사복채우기, 정권 연장을 위한 부정선거, 공공기관과 은행 등 채용비리, 교과서 국정화 추진과 역사왜곡에 이르기까지 국가를 총체적인 위기에 빠뜨렸다. 한말 삼정(三政)문란의 현대판이다. 세월호참사는 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세월호의 선장은 배가 침몰되는 데도 가만히 있으라면서 가장 먼저 탈출하였다. ‘가만히 있으면가마니가 된다. 우리 국민은 가만히 있지 않았고 마침내 봉기하였다. 2017년의 촛불혁명은 침몰 직전의 대한민국호()를 건져놓았다. 이를 계기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적폐청산과 일정한 개혁이 추진중이지만, 이 기회에 국가의 총체적인 경장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국가는 다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31혁명의 역사적 의미

 

 우리는 31혁명 100주년을 반년 앞두고 아직도 정명(正名)을 회복하지 못한 채 관제용어‘31운동이란 비칭을 사용하고 있다. 19193~4월 한민족이 왜적의 총칼 앞에 생명을 내던지며 투쟁했던 ‘31혁명의 역사적 의미부터 살펴본다.

 

 첫째, 국치 9년만에 매국노ㆍ친일파ㆍ매판자본가ㆍ일부 종교세력을 제외한 많은 국민이 하나되어 왜정을 거부하자주독립을 선언하였다. 성별ㆍ세대ㆍ지역ㆍ종교ㆍ신분을 가리지 않고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독립시위에 참여한 것은 세계혁명사에서 초유의 일이다.

 둘째, 전통적인 전제군주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민주공화제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이 법정에서 독립하면 민주공화제 국가를 수립할 것이라 진술하,  191931일 시위현장에 살포된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하여 이 해 9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발행된 지하신문은 한결같이 민주공화제를 추구했다. 411일 상하이에서 건국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를 받아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셋째, 여성이 사상 처음으로 역사현장에 등장하였다. 4천년 동안 남성위주의 가부장제도에서  신음해온 여성들이 독립된 주체로서 봉기하였다. 국체보상운동이나 의병투쟁 등에 소수의 여성이 참여한 적은 있으나 자주적으로, 집단적으로 역사현장에 참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넷째, 신분해방의 측면이다. 조선사회의 천민계급에 속해 있던 기생ㆍ백정ㆍ광대 등 하층 민들까지 조국해방투쟁 전선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일제와 싸웠다. 이로써 군왕과  양반중심의 계급사회가 민중이 중심이 되는 평등주의사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

 다섯째, 비폭력투쟁이다. 31혁명의 지도부는 처음부터 비폭력, 일원화, 대중화를 지침으 하였다. 이 사실 역시 세계혁명사의 초유의 일이며, 지난해 촛불혁명의 모형이 되었다.

 여섯째, 세계 피압박민족 해방투쟁의 봉화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중국의 54운동을 비롯하여 인도와 이집트, 중동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반식민지 해방투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곱째, 국치 이래 독립운동 일각에서 진행되어온 존왕주의 복벽운동을 중단시키고, 주권 불멸론 ㅡ 국민주권승계론에 따른 국민주권시대를 열었다. 전근대적인 신민(臣民) 의식에서 근대적 신민(新民) 의식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덟째, 국내 만이 아니라 해외에 나가 살던 이주민과 망명자들까지 하나로 묶어내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이루었다. 한인이 거주하는 세계 곳곳에서 독립 만세에 참여하였다.

 아홉째, 독립의 당위성과 함께 일제의 패권주의와 침략성을 지적하고, 인류가 지향해야 할  국제평화ㆍ평화공존ㆍ인도주의 등 이상을 제시하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코페르니쿠스적인, ‘후천개벽의 대전환을 가져온 것이 기미년 3~4월 한민족이 성취한 31혁명이다. 이를 일컬어 어찌 혁명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시 일본정부와 신문은 폭동ㆍ난동ㆍ소우ㆍ반란 등으로 표현했지만, 중국의 신문ㆍ잡지는 조선혁명ㆍ대혁명ㆍ조선해방투쟁 등으로 썼다.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그렇게 불렀다.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헌헌법 초안에서는 전문에 ‘31혁명으로 명시했던 것을 한민당 계열 일부 제헌의원들이 국회의장 이승만에게 신생정부를 뒤엎는 과격용어라고 진언, ‘혁명운동으로 바뀌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 중의 하나로 꼽히는 에릭 홉스봄이 저서혁명의 시대에서 1789(프랑스혁명)에서 1948(2차 세계대전 마무리)에 이르는 유럽사를 산업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2중혁명으로 파악했는데, 우리의 31혁명은 앞에서 열거한 대로 다중혁명의 가치를 구현하였다. 근대적인 시민혁명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곧바로 식민지로 전락했던 우리 나라가 31혁명을 통해 자주독립과 더불어 근대적 시민혁명의 과정을 동시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31혁명은 어느날 갑자기, 우연하게, 즉흥적으로, 터져나온 역사의 산물이 아니다. 안으로는 동학농민전쟁ㆍ의병투쟁ㆍ독립협회ㆍ만민공동회ㆍ신민회ㆍ의열투쟁ㆍ무장전쟁 등 밑으로부터 전개되어 온 민중운동과, 밖으로는 1917년 레닌의 민족자주론,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론 등의 영향이 있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는 1916년부터 천도교 천도구국단의 무장봉기 준비를 비롯하여 기독교계 일각에서 거사 움직임이 있었고, 해외에서는 1917년 상하이에서 조소앙이 독립운동가 14인의 명의로 발표한 대동단결선언, 1918년 여운형 중심의 신한청년당 창당, 1919년 초 길림에서 역시 조소앙이 작성하고 지도급 독립운동가 39인이 서명한대한독립선언, 같은 해 도쿄 28학생 독립선언이 있었다. 모두 31혁명으로 흘러들어 온 역사의 맥락이었다.

 우리는 31혁명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위대한 31혁명 정신을 국가개혁남북화해ㆍ협력의 정신적 지표로 설정하면서 적폐청산과, 특권이 없고 부패가 없는 민주공화제를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독립시위를 거역한 친일군상

 

 31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벌써부터 학계나 사회일각에서 이를 지나치게 부풀리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해도 팩트는 사실과 진실에 기반해야 한다. 31혁명이 거족적ㆍ범민족적으로 독립시위에 나섰다는 표현은 다소 과장이다.

 당시 인구 1,680만 중에서 연 인원 200만 이상이 독립시위에 참여했으니 거족적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고, 세계혁명사에 보기드문 현상이기는 하지만, 반대하는 자, 외면한 자가 더 많았고, 반대하는 계층도 다양했다. 심지어 무력으로 만세시위를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조선인들도 있었다.

 31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위해서는 이런 분야까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그토록 엄중했던 상황에서, 특히 여성들이 목숨을 내걸고 만세시위에 나섰던 독립ㆍ애국정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193~4월의 독립시위는 2016~17년 촛불시위처럼 평온한 상태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밝혀진 것만, 사망자 7.509, 부상자 15,961, 피검자 52,770, 불탄 민가 715, 불탄 교회 47개소였다. 선열들은 생명을 내걸고 독립 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31혁명을 완강히 거부했던 반대세력이 적지 않았다. 첫 번째 부류는 매국5적을 비롯하여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던 골수 친일매국노들이다. 일제강점 9년 동안 조선사회의 지배층이 된 이들은 31혁명이 발발하자 불안공포에 떨면서 일본으로 피신한 자(백작 이지용과 한상룡)들도 있었고, 총독부에 무력진압을 요청한 자도 있었다. 이완용은 총독부기관지매일신보에 세 차례나 황당한 유언(流言)에 미혹치 말라는 글을 쓰고, 남작작위를 받은 이석주는 힘으로 복종시키지 않으면 독립소요가 더욱 거세질 터이니, 반드시 무력으로 복종시키라고 총독에게 주문했다.

 두 번째 부류는 친일관료 그룹이다. 병탄과 함께 총독부의 고위 관료가 된 이들은 앞장 서서 시위 진압에 나섰다. 함경남도지사 이규완은 일부 불령한 도배의 선동을 가차없이 처벌할 것을 촉구하고, 황해지사 신응희는 독립은 망설이니 경거망동치 말라고 국민을 협박했다. 전북지사 이진호도 유사한 협박성 발언을 일삼았다.

 세 번째 부류는 대지주 등 친일 매판자본가들이다. 호남의 대지주 현기봉은 남도지역을 순회하면서 농민들이 만세시위에 나서지 말도록 선동하고, 대구지역 자본가들은 대구자제단을 조직하여 폭도가 날뛰지 못하도록자제토록 경고하고면서, 회원들에게 만세 부르는 사람들을 밀고하라고 지시했다.

 네 번째 부류는 종교계의 일부세력이다. 동학에서 파생했으나 친일배족에 앞장선 시천교(侍天敎)의 포덕사 김기현은 조선독립을 선언한 자는 천황폐하의 은덕을 망각한 무리라고 망발하고, 병탄 후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일본조합기독교회의 라일봉ㆍ신명균 목사 등은 각종 선전 팜플렛을 제작하여 만세시위에 나선 동포를 사탄이라고 매도하였다. 천주교와 구세군사관학교도 만세를 거부하고 반대 측에 섰다.

 다섯 번째 부류는 일제로부터 은사금을 받은 유생들, 일본유학생 출신 등 지식인 계층, 찰ㆍ공무원 등 상류층이다. 이들은 만세시위에 나선 이웃들을 갖은 감언이설로 겁박하였다. 경찰에 밀고하기도 하고 소작에서 제외시키기도 했다. 31혁명은 이와 같은 어려운 상태에서 두 달 동안 조선 8도에서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여성들이 독립만세시위에 나선 배경

 

 ‘31혁명이란 용어가 정명인 데에는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더욱 확인하게 된다. 31혁명 당시 피검자 중 학생과 교원이 2,355명이고 그중 여교사ㆍ여학생이 218명이었다. 1919년 당시 여자들의 취학률이 남자들의 100분의 1 수준도 안 되는 비율에 비하면 대단히 높은 수치가 아닐 수 없.

 3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될 때 경기여고보생 최은희 등 수십 명의 여성들이 선언식에 참석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종로를 지나 서대문방면으로 행진하면서 여성 32명이 검거되었다. 당일 1.000여 명의 여학생이 YMCA 등과 연계하여 만세시위에 나섰다. 33일에는 개성 호수돈 여학생들이 개성 시내에서 시위 행진을 하다 전원 구속되었으며, 회령에서는 남녀학생 5천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경기여고보생 이선경은 수원에서 혈복단(血復團)을 조직하여 시위하다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이화학당 고등과 1년 유관순은 충청도 목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1혁명 중 여성들의 항일투쟁으로 가장 현저했던 것은 정신여학교 교원 김마리아, 동경유학생 황에스더,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이정숙 등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들 수 있다. 100여 명의 회원을 포섭하여 전국 13도에 조직망을 설치하고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사은 여성독립운동사와 더불어 여권신장운동사의 신기원이기도 하다.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시골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는 어김없이 여성들이 참여하고, 붙잡힌 여성 중에는 갖은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룬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철산에서는 일본 군경이 임신부의 복부에 칼을 찔러 난자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는 유관순 열사를 토막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외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만행이 전국 도처에서 자행되었. 외국 선교사들의 기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돌이켜보면 반만 년의 가부장제의 남성중심사회에서 사회참여와 국권회복 투쟁에 여성이 등장것은 31혁명이 계기가 되었다. 이같은 현상만으로도 31혁명은 기존체제와 가치를 전복한 세계사적인 레블레이션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여성들이 31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경제사회적인 배경이 있다. 총독부의 가혹한 조세와 일제가 병탄 직후부터 31혁명 발발 직전까지 10년 동안 실시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을 들 수 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농지와 임야를 조선총독부가 멋대로 측량이라는 명분 아래 갈취하고, 조선농민들은 소작인 또는 중세 유럽형 농노로 만들었다. 조선 농민들은 7~80% 수준의 소작료로 수탈당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에 거미줄처럼 설치한 각종 경찰관서와 주재소의 순사ㆍ헌병들의 천인무도한 여성학살과 강간이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정절을 생명처럼 중히 여기던 여성들이 이에 맞서 자위의 깃발을 들고 일어난 것이다.

 또한 한국민족을 말종시키기 위해 일본 남자에게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결혼 또는 첩으로 보낸다는 소문이 나돌면서(뒷날 성노예와 정신대로 현실화되었다) 여성들은 시골장날 장바구니를 던지고 만세시위에 나섰다.

 국권을 되찾기 위한 여성들의 활약은 눈부스게 전개되었다.대한독립여자선언을 필두로 도쿄 28독립선언서에 참여한 여학생들,여학생 파리강화회의 청원서,열강국 부인회윌슨 미국대통령 부인에게 청원서,구국부인회 발기문,송죽결사대,대한민국애국부인,조선애국부인회등 많은 여성들이 각종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국제기구에 청원하고 일제와 부단하게 싸웠다.

 인도의 초대 수상이 된 네루는 항영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조선 여성들의 독립투쟁 소식을 듣고 딸에게 편지를 썼다. “너도 조선 소녀들을 본받으라.세계사 편력에 들어 있다.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31혁명 후 국내외에서는 몇 갈래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시도되었다. 국치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먼저 해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시도하였다. 1914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ㆍ이동휘 등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1917년 상하이에서 신규식ㆍ조소앙 등 17인이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창한 바 있다. 본격적인 임시정부의 수립은 31혁명 직후에 전개되었다.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으니, 이를 대변하는 민족의 대표기구를 설립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치 이래 희망을 잃고 노예처럼 살던 한민족은 31혁명을 계기로 근대적 민족의식에 눈 뜨게 되고, 수 많은 지사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내에서 또는 해외 망명을 택해 독립전선에 서게 되었다.

 19193~4월에 국내외에서 도합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고려공화정부, 간도임시정부 등은 수립 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채 전단으로만 발표되었다.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 상하이, 한성의 임시정부였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1919411일이다. 일제로부터 국토와 주권, 국민을 완전히 되찾아 정식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임시로 세운 정부였다. 상하이에서는 국내외에서 모여든 조선의 각도 대표 29인이 4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임시헌장 10개조와 정부 관제를 채택,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비록 망명정부일 망정 유사 이래 처음으로 민주공화제 정치체제를 채택한 것이.

 임시헌장의 10개 조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1),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2),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ㆍ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3),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ㆍ언론ㆍ저작ㆍ출판ㆍ결사ㆍ집회주소이전ㆍ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4) 등 근대적 민주공화제의 헌법 내용을 담았.  

 상하이 임시정부는 최고 수반인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심한 논란이 일었다. 내정된 국무총리 후보 이승만의 적격성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회영ㆍ신채호ㆍ박용만 등 무장독립운동계열 인사들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하고, 의정원에서 이승만이 선출되자 이들은 회의장에서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절대독립을 방해하는 사람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이승만은 상하이로 오지 않고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한성정부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 사이 31혁명 이후 여러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각 정부가 추대한 정부 수반이나 각료가 상호 중복되어 있고 또 국내외 각지에 떨어져 활동하고 있어 미취임 상태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각각의 임시정부는 기능이 공백상태에 빠져들었고 원활한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단일정부로의 통합이 모색되었다.

 상하이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이며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8월말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 및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의회 정부와의 통합과 정부개편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수차례의 논의 끝에 963개 정부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정부 수반의 호칭을 대통령으로 하는 새 헌법과 개선된 국무위원 명단이 발표되었다.

 통합 임시정부가 정부 수반을 국무총리에서 대통령으로 바꾸게 된 것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의 줄기찬 요구 때문이었다. 국무총리로 선출되고서도 부임하지 않고 미국에서 활동해온 이승만은 국무총리 아닌 대통령으로 행세하였다. 그는 대통령 호칭에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미국식 정치와 문화에 깊숙히 젖어 있어서 미국 정부의 수반 프레지던트란 호칭이 의식에 각인된 것이다.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 직제에 대통령 직함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무총리 직제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한글로 대통령, 영어로 프레지던트를 자임한 것이다. 사소한 문제라 여길 지 모르지만 그는 헌법 위에 군림하는 오만함을 보였다. 해방 뒤 집권하여 몇 차례나 헌법을 뜯어고치고, 헌법을 무시하면서 멋대로 통치한 것은 따지고 보면 이때부터 헌법 위에 군림하는 태도에서 발원한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정부령 제1호와 제2호를 반포하여 내외 동포에게 납세를 전면 거부할 것(1), (일제)의 재판과 행정상의 모든 명령을 거부하라(2)는 강력한 포고문을 발령하였다. 그리고 국내조직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한 데 이어 해외에는 거류민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관리하에 두었다. 연통제는 지방행정조직이고 교통국은 비밀 통신조직이었다. 국내의 무장ㆍ사상투쟁을 위하여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두고 1개 면에 1개의 교통소를 설치하도록 하고, 연통제는 각 도와 각 군에 지방조직을 갖춰나갔다. 그러나 1920년 말부터 일제의 정보망에 걸려 국내의 지방조직이 파괴되고, 31혁명의 열기가 점차 사그라지면서 국내의 독립기금 송금과 청년들의 임시정부 참여가 크게 줄어들었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이승만 대통령 선임을 둘러싸고 외무총장 박용만과 교통총장 문창범이 취임을 거부한 데 이어 이회영ㆍ신채호 등 무장투쟁 주창자들이 상하이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가버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가 러시아 정부가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을 독자적으로 처리하여 물의를 일으키다가 1921년에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동녕 신규식노백린이 차례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정부를 이끌만큼 불안정한 상태로 운영되었다.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1920125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이승만이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반만에 왔으니 임시 대통령으로서 무슨 방책을 준비해 온 것으로 믿고 기다렸으나, 아무런 방안도 내놓지 못하였다. 이승만에기대를 걸었던 임정 요인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떠나는 이들을 붙잡아 포용하려대신 신규식ㆍ이동녕ㆍ이시영ㆍ노백린ㆍ손정도 등을 새국무위원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고자 하였다.

 당시 만주, 간도, 연해주 등지에서는 민족독립을 위한 무장독립전쟁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항일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대한광복군, 광복군총영, 의열단, 군부, 대한신민단, 혈성단, 신대한청년회, 복황단, 창의단, 청년맹호단, 학생광복단. 자위단 등이 결성되고, 특히 1911년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강력한 군사훈련을 통해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하였다.

 만주 각지에서 조직된 무장독립군 세력은 연대하여 봉오동전투(19206)와 청산리전투(192010)를 통해 국치 이래 최대의 항일대첩을 이루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독선과 독주로 요인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실현성이 취약한 외교독립론에 빠져 있었다.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되고, 이를 이유로 이승만은 19215월 상하이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의 1년 반 동안 임시정부의 활동은 이로써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떠났다. 얼마 후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하였다.

 이런 분란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일제패망 때까지 27년 동안 항일민족해방투쟁의 본거지로서 독립전쟁을 지휘하였다.

 

 몽양 여운형과 31혁명

 

 여운형은 1918820일경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선우혁ㆍ한진교ㆍ장덕수ㆍ김철ㆍ조동호와 한국근현대사에서 최초의 근대적 정당으로 평가되는 신한청년당을 창립하였다. 창립취지서에서 먼저 독립을 완성하고 독립을 회복한 다음에는 문화적 도덕적으로 민족을 개혁하여 신대한민족을 만들며 학술과 산업을 일으켜 실력을 양성해서 대한민족의 신문화가 전인류에게 위대한 행복을 주도록 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신한청년당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개혁주의, 국제평화주의를 내세우고, 상해 대한인민단ㆍ대한인거류민단 등 민단사업에 주력하면서 기관지로신한청년을 발간하였.

 초창기에는 당원이 극소수이므로 부서를 정하지 않고 여운형이 대표 겸 총무로서 당의 모든 사무를 담당하였으나, 당원이 증가하고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게 되자 191811월 하순에 당헌을 제정하고 강령을 문서화했으며 조직을 체계화하는 한편 부서를 정하였다. 이때부터 여운형ㆍ서병호ㆍ김인전 3인이 당무를 전담하는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여운형이 신한청년당 창립을 서두른 것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191710월혁명으로 러시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고, 1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11월 전후처리의 일환으로 민족자결주의를 포함하는 14개 조항의 원칙을 제시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은 본지와는 상관없이 한국을 비롯 각국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반제투쟁의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윌슨의 성명 제5항의 식민지에 관한 요구를 공평히 조절할 것. 이것을 행할 때 식민지 인민의 이익을 존중할 것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식민지의 해방이 아니라 독일 등 패전국의 식민지를 재분배하려는 의도였다. 여운형미국에 유학중인 동생과 서신을 통해 그곳의 정보를 듣고 행동에 나섰다. 신한청년당을 창설한 배경이다.

 1차 대전이 종결되면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자신의 특사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을 중국에 파견하여 종전 후의 강화회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중국도 대표를 파견하도록 권고케 하였다. 191811월 크레인이 상하이에 도착하자 중국 정부는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크레인은 지금 파리에서 개최되고 있는 세계평화회의는 각국 모두 중대한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 그 영향력도 또한 큰 것이다.() 피압박 민족에 대해서는 그 해방을 강조함에 따라 피압박민족에게 있어서는 그 해방을 도모하는데 최적의 기회이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대표를 파견해 피압박 상황을 말하고 그 해방을 도모해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여운형은 강연을 듣고, 그의 숙소를 방문하여 한민족의 시민지 사정을 설명하고 한국민족 대표의 파견도 가능할 것인지의 여부를 물었다. 크레인으로부터 미국정부의 의사는 알 수 없으나 개인적으로는 지원하겠다는 응답을 얻었다.

 숙소로 돌아온 여운형은 장덕수와 만나 중요한 두 가지 사항을 결정하였다. 조선독립의 청원서 작성과 누군가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키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은 3일 간에 걸쳐 장덕수의 숙소에서 두 통의 청원서를 영문으로 작성하였다. 하나는 윌슨 대통령에게, 또 하나는 대표 파견이 어려울 경우, 상하이에서 활동중인 미국언론인 밀라드를 통해 전달하려는 계획이었다. 청원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은 4천년의 역사를 가졌고, 동양의 문화에 적지 않게 공헌을 했던 나라이지만 한일합병 후는 민족의 정치적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정치, 경제, 교육, 종교상의 압박을 받아, 동양문화는 물론 20세기 문화에 공헌할 수도 없게 되어 동양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특히 일본, 중국, 러시아 3개국 간의 균형이 깨져서 동양평화를 교란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이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이 문제를 잘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운형, 신문조서)

 

 두 사람은 이 문서를 누구의 이름으로 제출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한 끝에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기로 결심한다.

 

 형님은 청원서 한 통은 클레인에게 주어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도록 부탁하고, 또 한 통은 당시 상해에서 발간되던 월간잡지밀러드 리뷰(Millord Revieu)의 사장인 밀러드에게 주어 우리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못 가게 될 경우, 대신 제출해달라고 부탁하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진정서를 작성하고 보니 제출자가 문제였다.

 세계 각국의 대표가 참석하는 국제회의에 개인 명의로 제출할 수 없음은 상식 이전의 일이었다. 리하여 상해에 머물고 있던 여러 동지들을 모아 벼락정당을 조직하고 그 당명으로 보내게 되었다.(여운홍, 증언)

 

 신한청년당은 비록 벼락정당으로 조직되었지만, 김규식의 파리 파송,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국내의 31혁명,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운형은 동지들과 상의 끝에 파리에 파견할 대표로 톈진(天津)에 머물고 있는, 영어에 능숙한 김규식을 입당시킴과 동시에 이사장에 추대하여 신한청년당의 대표이며 한국대표로 파견키로 하고, 경비는 여러 채널을 통해 마련하였다. 장덕수는 부산 백산상회 안희재로부터 2천 원, 김철은 천도교에서 3만 원, 김규식이 1천 원을 내놓는 등 모두 10만 원의 활동자금이 마련되어서 김규식의 파리행이 이루어졌다.

 김규식은 191921일 프랑스 우편선 편으로 상하이를 출발하여 313일 파리에 도착, 시내의 불라베라는 시인 부부의 집에 사무실을 차리고 타이피스트와 통역을 구하여 한국공보관을 설치하는 등 즉각 활동에 들어갔다.

 

 당시 국내외 각처의 지사들은 모두 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미국과 하와이에서,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에서, 그리고 중국 광동성에서 대표 파견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여운형이 파송한 김규식만이 회의 중에 파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규식 파송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여운형의 장래의 갈림길이 되었다. 각처의 단체들이 하고자 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일을 성공적으로 이룩하므로 해서 전도사 여운형은 무명 씨의 신분에서 일약 독립운동가 여운형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사람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는데 이 칭호는 그에게 천금의 무게를 안겨 주었다.(이정식,김규식의 생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파견 문제는 국내외 한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큰 희망이고 당면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각처에서 대표파견을 시도했으나 모두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국과 하와이의 국민회에서는 이승만과 민찬호를 파송하려 했으나 여권발급이 되지 않아 무산되었다. 중국 광동성에서 활동하던 신규식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규식은 파리로 떠나기에 앞서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이것이 국내로 전해져 31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될 줄은 떠나는 김규식도, 거사를 주도한 여운형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의 증언.

 

 김 박사가 상하이에서 파리에 가기로 결정하고 여러 가지 문제들을 토의하던 중 그는 어떻게 하면 한국 민족의 주장과 청원이 보다 더 효과적으로 전 세계에 선포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했는데 김 박사는 다음과 같은 소견을 말했어요. “내가 떠나가기는 가되 세계 각국의 대표들이 내가 누군지 알 리가 없다 .지도상에 보더라도 조선 반도는 쌀알만큼 밖에 나타나 있지 않고, 코리아란 나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내가 만일 정식 대표라면 회의석상에서 좌석이 있고 발언이 있겠지만 나는 방청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가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겠다. 그러나 나 혼자의 말만을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신한청년당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며 독립을 선언해야 되겠다. 가는 사람은 희생을 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고, 우리나라의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다.(이정식,김규식의 생애)

 

 김규식을 파리로 파송한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의 촉발과 자금마련을 위해 각처로 당원을 파견하였다. 국내에는 김철ㆍ서병호ㆍ선우혁을 보내고, 일본에는 몇 차례 나누어 파견하였다. 1차 조소앙, 2차 장덕수, 3차 이광수였다.

 여운형 자신은 1919120일경 상하이를 출발하여 만주와 해삼위로 갔다. 도중에 베이징에서 손문을 만나 국제정세를 논의하였다. 손문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여운형은 만주 동삼성과 해삼위에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신한청년당 창설과 김규식의 파송을 알리고, 지금이 독립운동으로 총궐기할 적기임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기금의 마련은 여의치 못하였다.

 여운형이 만주, 해삼위를 방문하기 직전인 19181113일 국치 이후 최초의 독립선언서인대한독립선언이 만주 길림에서 발표되었다. 여준ㆍ김동삼ㆍ유동열ㆍ신채호ㆍ김좌진ㆍ신팔균ㆍ서일ㆍ김규식ㆍ이동녕 등 중광단(重光團) 인사들을 중심으로 만주ㆍ러시아ㆍ미국을 비롯하여 해외에 있던 망명 독립운동가 39명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조소앙이 집필하였다.

 내용은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ㆍ강박ㆍ불법ㆍ무력을 통한 것이며, 일본의 합방 결과는 정치 경제적 압박으로 종족을 말살하고, 종교를 압박하고,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문화를 저해하는 것으로 인류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합방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정의의 칼로 나라를 훔친 적을 도결(屠決)하여 운명을 개척하자고 호소하면서,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이니 목숨을 아끼지 말고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수할 것을 주창하였다.

 여운형은 1919120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먼저 만주 지린성 지방으로 가서 여준을 비롯하여 이 지방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파리강화회의가 기회임을 설명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였다. 여운형은 이어 노령 연해주로 가서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이동녕ㆍ박은식ㆍ조완구 등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의 파견을 알리고 노령의 한인대표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권고하였으며, 이것이 독립운동 봉기의 절호의 기회임을 역설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들 중 다수가 상하이로 와서 함께 독립운동을 대폭 강화할 것을 약속하였다. 여운형은 이곳에서 1개월간 체류하는 동안 김약연ㆍ정재면을 만나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했으며 일부는 상하이로 오기로 약속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었다.

 여운형은 또한 당시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군사령관 가이다(체코인)을 찾아가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협조를 얻고,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고 한국독립을 주창하는 선전물을 영문으로 작성하여 수만 매를 연합군들에게 배포하여 독립운동의 홍보활동을 수행하였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191811~19192월의 활동은 191931혁명 봉기와 독립운동의 비약적 고양에 하나의 진원을 이루고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여운형은 하얼빈에서 고국의 31혁명 발발 소식을 듣고 발길을 재촉하여 191938일 상하이로 돌아왔다. 귀로에 일본경찰과 밀정의 추격을 재치 있게 따돌리면서 무사히 상하이 프랑스 조계로 귀환할 수 있었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이 도쿄의 28독립선언과 국내의 31혁명 발발에 깊숙이 작용하였다는 최근의 연구 평가가 따른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은 동경의 28독립선언과 국내의 31운동에도 깊숙이 관계했다. 신한청년당의 장덕수는 중국인 유모(劉某) 씨로 위장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접촉해 그 상황을 상해로 보고 했고, 여운홍은 여운형의 지시로 1919114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말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했다. 그는 동경 28독립선언의 주도자인 최팔용을 만나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움직임을 전해듣고 28일 동경 YMCA회관에서 독립선언이 행해지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여운홍은 장덕수를 만나 여운형의 지시를 전한 후 국내로 잠입했다. 여운형의 지시에 따라 여운홍이 31 독립선언의 민족대표인 이승훈ㆍ최남선ㆍ함태영ㆍ이갑성과 만난 것은 227일이었다.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일이며, 동경에서 목격한 28독립선언의 진상을 전한 여운홍은 그날 상해로 탈출했다. 한편 장덕수는 220일경 재차 서울에 돌아온 후 인천에 잠복해 있다 경찰에 검거됐다.(정병준,몽양 여운형평전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창당을 전후하여 은밀히 국내로 들어왔다. 1918813~19일까지였다. 평북 정주에서 열린 장로교회 제14차 총회에 상하이 대표로 참석키 위한 것이다. 는 여기서 1917년 말에 기각되었던 목사 파견을 청원하고, 이것은 받아들여졌다.

 그가 대단히 분주한 시점에 국내에 온 목적은 또 있었다. 장로파의 실력자 이승훈과 양전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구체적 대담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국제정세를 알리고 국내에서 기회를 보아 거사할 것을 의논하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6개월 여 뒤 이승훈과 양전백은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31혁명에 참여하였다. 여운형은 서울에 잠입하여 이상재 등과 만나 내외 정세를 논의하고, 9월 말에 상하이로 돌아갔다. 그는 31혁명의 불쏘시개 역할을 수행하.

 

김삼웅 프로필

 

 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주필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7대 독립기념관장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

 

 주요 저서

 

몽양 여운형평전4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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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을 맞이하는 3ㆍ1혁명의 정신과 몽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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