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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말모이
    [영화] 말모이 일제강점기 시기, 매국노를 제외한 민중들의 삶은 노예로 전락해 고통스럽다. 저항하지 못하고 노예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말을 지키려는 극소수의 학자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우리말을 훌륭하게 읽고, 쓰고, 말하고 있다. 말과 글이 곧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지만, 그것을 지켜온 지난 역사가 얼마나 고되고 험난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화는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조선의 우리말 학자들의 활약을 그렸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역사에서도 유명하고, 해방 뒤에 우리말 사전이 곧바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에서도 우리말과 글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학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화에서는 '판수'라는 무지한 민중과 류정환으로 대표하는 학자들이 나온다. 건달에 소매치기로 세상을 살아가는 판수는 아들과 딸이 있고, 두 아이를 끔찍히 생각한다. 판수에게는 아내가 없고, 두 아이에게는 엄마가 없다. 엄마가 없다는 사실은 영화에서 끝내 나오지 않는다. '엄마'는 바로 '조국'이기 때문이다. 조국을 빼앗긴 민족에게 '나라'가 없는 것처럼, 여기서 '엄마'는 곧 조국, 모국이다. '나라'는 흔히 '모국, 어머니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판수의 아이 덕진과 순희에게 '모국' 즉 '엄마'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판수는 동료와 소매치기를 하다 류정환을 만나게 되고, 이 인연은 돌고돌아 결국 판수가 '조선어학회'에서 일하게 되는 결과에 다다른다. 글을 읽지 못하는 판수는 눈뜬 장님이다. 무지하고 무식한 민중을 대표하는 판수는 당시 일제강점기의 민중을 은유한다. 세상 물정에 어둡고, 일제의 폭력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목구멍에 풀칠을 하려고 동족의 주머니를 훔치는 저열한 인간 판수는 그러나, 글을 배우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는다. 글을 배우는 것은 곧 정신이 깨어나는 것을 뜻한다. 글자를 읽고, 자기가 말하던 것을 글로 쓸 수 있게 되면서, 해가 있어도 어둡던 세상이 밝아지는 것을 느낀다. 판수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어학회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대단한 신념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그가 몽당연필을 꾹꾹 눌러 쓴 마지막 편지에서 볼 수 있듯, 자신이 한글을 지키는 것은 자식들(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조상)가 되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기적인 인간에서, 자식과 후손을 생각하는 이타적인 인물로 발전하는 판수는 말과 글의 힘을 기록하는 우리말의 정신을 통해 변하는 인물이다. 판수가 사전 원고를 들고 도망하다 어렵게 가방을 숨기고 일제의 총에 맞아 죽을 때, 그가 입고 있던 하얀 와이셔츠에 피가 흐르는 것은, 일제의 총칼에 죽은 조선의 백성을 상징한다. 하얀옷은 조선민중의 상징이며, 피는 민중의 피, 조선역사의 피, 조선언어의 피다.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다룬 영화들이 드물게 나오는데, 이 시기를 다룬 영화를 만드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관한 대중의 관심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 대중은 일제강점기에 관해 거의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것은 독립운동이고,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본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재의 어려움이 있고, 관객을 동원할만큼 매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지나친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시기를 그리다보면,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원한과 증오가 사무치고, 일본놈들보다는 거기에 자발적으로 매국노가 되어 같은 민족을 착취하고 괴롭힌 조선인 매국노들에 대한 원한이 크기 때문에, 더 강렬하게 복수하거나 처단해야 하는, 그래서 민족주의 관점을 부각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 면에서 독특한 소재와 캐릭터를 만든 영화 '놈놈놈'은 일제강점기를 무대로 하는 영화에서 매우 특별하다. 최근 몇 년 사이 '암살', '밀정', '군함도', '라디오데이', '박열', '동주', '귀향', '아가씨', '아니키스트' 같은 영화들이 관객을 찾았고, 훌륭한 내용으로 흥행에 성공한 작품도 있고, 실패한 작품도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는 앞으로도 더 많이 나올 것이고, 나와야 한다. 36년의 일제강점기에서 벌어진 일은 몇십 편의 영화로 담아낼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은 대개 고통스러운 민중의 역사겠지만, 이 영화처럼 끈질긴 승리의 역사도 들어 있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겪은 수난의 역사를 지금도 꾸준히 영화로 만들고 있다. 유대인이 역사에서 겪었던 어려움이 있고, 나치에 의해 많은 유대인이 학살당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이 지금 이스라엘을 세우고, 팔레스타인에게 하는 짓을 보면 그들이 '당했다'고 말하는 주장에 설득력이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36년, 또는 그 이상의 역사에서 일본에게 당한 역사의 기록이 생생하게 남아 있고, 우리 민족은 일본의 강압에서 벗어나 역사, 경제, 문화, 예술 모든 분야에서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민족이 유대민족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주장해도 좋겠다. 글을 업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이 영화가 조금 더 특별하다. 우리의 글-한문이 아닌 한글-을 지키려는 학자와 민중의 노력이 헛되지 않고, 일제의 만행으로 죽어간 훌륭한 조상이 있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영화였다.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은 곧 우리의 역사와 민족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은 지극히 당연하고 옳다. 그래서 말하고 글 쓰는 것에 더 조심하고, 자부심을 갖고, 행복하게 여긴다. 우리에게 '한글'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것인지를 정작 우리 스스로 잘 모르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닐까. 감독 엄유나는 영화 '택시운전사'의 각본을 쓴 이다. 이 영화는 그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푼수같은 판수(유해진)의 연기가 돋보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어린 순희(박예나)의 모습에서 이 영화가 30년대 영화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순희는 그 어린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1930년대를 떠올리게 되는 신비한 매력이 있다. 30년대 얼굴이라니. 감독은 무거운 소재에 가벼운 이야기를 곳곳에 배치해 웃음과 눈물을 함께 흘리게 만든다. 우리글을 지키려 목숨을 바친 한글학회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잘 만들어서 반갑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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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20
  • [영화] 배드 타임즈 : 엘 로얄에서 생긴 일
    [영화] 배드 타임즈 : 엘 로얄에서 생긴 일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았다는 건 퍽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의 분위기는 '쿠엔틴 타란티노'를 떠올리게 한다. 감독 드류 고다드에게는 퍽 미안하고, 그 자신도 자존심 상하는 말이겠으나, 쿠엔틴 타란티노 이전과 이후의 영화는 영화의 형식미가 뚜렷하게 갈린다. 타란티노 영화는 헐리우드에서 혜성처럼 등장했고, 그의 연출 스타일은 독보적이다. 따라서 타란티노보다 늦게 나온 영화들은 뛰어난 연출과 잘 만든 영화임에도 타란티노와 '닮았다'는 씁쓸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늦게 나타난 재능 있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매우 훌륭하다. 시나리오는 물론 미장셴까지 흠잡을 곳이 거의 없는 탁월한 영화여서 보는 즐거움이 상당하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그 단순한 이야기를 날줄과 씨줄로 엮어 나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드류 고다드는 영화 '마션'의 시나리오를 썼으니, 실력은 이미 검증되었다.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주 경계에 있는 '엘 로얄' 호텔은 세월이 흘러 낡고 퇴락하는 3류 호텔이다. 한때는 유명인사들-헐리우드의 배우, 유명 정치인-도 묵어 가던 호텔이었지만 지금은 찾아오는 손님이 거의 없다. 이 호텔은 특이하게 호텔 가운데를 주경계선이 지나가고 있어서-어쩌면 일부러 그렇게 건물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1950년대 전성기를 지나 60년대 말이 되었을 때, 네바다주의 도시 리노에 가는 사람들 가운데 돈이 없는 사람들이 가끔 묵을 뿐인 이 호텔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영화가 시작하면, 중년의 남성이 호텔방으로 들어온다. 그는 주위를 경계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과 몸짓을 보면 이 남자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남자는 소리를 내지 않고 침대와 탁자를 옮기고, 바닥에 깔린 카펫을 말고, 바닥을 뜯어낸 다음 마루 아래 공간에 가방을 숨긴다. 그리고 다시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놓았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다. 남자는 감시경으로 외부인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는데, 그 사내가 쏜 총에 맞아 죽는다. 그리고 10년이 흐르고, 호텔 로비에는 네 명의 손님이 거의 동시에 도착한다. 진공청소기 판매원, 가톨릭 신부, 흑인여성 가수, 백인 여성이다. 이들은 모두 저마다 이유가 있어 이 호텔에 들어왔고, 서로를 전혀 모르는 상태였지만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물고, 반전에 반전이 일어난다. 객실과 로비에 있는 흑백 텔레비전에서는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을 왜 끝내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 나온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대학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린다. 건장한 중년 남자인 진공청소기 판매원이 가장 먼저 정체를 드러낸다. 그는 가장 좋은 방을 배정받고, 그 방에서 도청기를 무려 20개 가까이 찾아낸다. 그렇게 많은 도청기가 숨어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그렇다면 그 방 뿐아니라 호텔에 뭔가 거대한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객실을 전부 뒤집어 엎어 도청기를 다 찾은 남자는 객실에 있는 커다란 유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바깥에 나와 객실의 너비와 건물의 너비를 발걸음으로 잰다. 건물의 너비가 객실 너비보다 넓다면, 거울 뒤쪽에 공간이 있다는 걸 뜻한다. 그리고 그 유리는 모든 객실에 달려 있고, 비밀통로를 통해 모든 객실을 감시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다른 투숙객의 비밀까지도 순식간에 알게 된다. 결국 모든 비밀을 발견한 중년 남자는 공중전화로 달려가 전화를 하는데, 그곳은 FBI 본부. 남자는 FBI 요원이었다. 하지만 본부에서는 주어진 미션만 하라고 명령을 내리는데, 요원은 그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독단으로 납치범을 잡으러 들어간다. 이렇게 영화는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호텔에 묵는 사람들은 저마다 깊은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우연히 이 호텔에 묵으면서, 사건이 벌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그나마 행복한 사람이 마지막에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 내내 들리는 음악이 상당히 좋고, 음악과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미국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약간 빛바랜 영상과 복고적 풍경이 영화를 더 아름답게 한다. 70년대 이야기지만, 영화의 무대는 여전히 서부의 사막에 가까운 곳이고, 여기 모인 사람들은 서부개척시대에 사막에 있는 한 작은 호텔에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무법지대에 서 있는 것과 같다. 미국은 여전히 법보다는 총이 가깝고, 사막 어딘가에는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시체들이 무수히 많고, 그와 함께 돈가방도 또한 그만큼 많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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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20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영화는 관객에게 딜레마를 안긴다. 비참한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가. 아니면 비참한 삶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온당한가. 이 영화는 어린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6살 무니(moony)는 엄마와 살고 있다. 무니가 사는 집은 모텔인데, 이 건물은 집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매주 방값을 지불하며 사는 단기 임대 주거공간이다. 즉, 이 건물에 사는 사람들은 길거리로 쫓겨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상태에 놓여 있는 빈민들이다.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무니는 아랫집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무니와 그의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갈 곳이 없어 마을을 배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불과 1마일 떨어진 곳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멋진 놀이시설인 '디즈니랜드'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 어린이들의 일상은 '꿈과 희망이 있는' 세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밝고 명랑한 무니의 일상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어른의 일상에 이르게 된다. 무니의 엄마 핼리는 아직 어린 여성이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대학에 다닐 나이지만, 핼리는 딸 무니와 함께 모텔에 살며 방값을 마련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돌이켜보면, 핼리는 17살에 무니를 낳았다. 그 어린 나이에 출산을 하고, 세상에 외돌톨이로 떨어져 살아가는 핼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가 아직 어린 나이지만, 살아온 환경과 과정이 얼마나 힘겨웠을까를 짐작할 수 있다. 핼리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는 예전에 스트립댄서로 일한 경험이 있고, 그 일을 계속하고 싶지만 상황이 안 되고 있다. 아랫집에 사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가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어 그곳에 일자리가 나기를 기다리지만 그것 역시 만만치 않다. 경쟁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돈을 벌지 않으면 당장 방값을 낼 수 없고, 그러면 딸 무니와 함께 모텔에서 쫓겨나게 되니 그것만은 어떡하든 모면하려 애쓴다. 싸구려 향수를 도매로 사서 관광객들에게 길거리에서 팔아 돈을 벌기도 하고, 심지어 온라인에서 성매매까지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핼리에게는 가족이 없을까. 그의 어린시절과 청소년 시기는 어땠을까 궁금하다. 그가 17살에 임신을 하게 된 것은 그가 '날라리'였기 때문인지, 나쁜 남자를 만나서인지 알 수 없지만, 남자가 임신한 핼리를 떠난 것은 분명하다. 핼리는 돈이 없어 늘 고달픈 나날을 보내면서도 태평하다. 돈이 없으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덕적 갈등을 겪지 않는다. 무엇보다 딸 무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충만하게 보낸다. 핼리와 무니가 함께 지내는 생활을 보면, 둘은 모녀라기 보다는 자매에 가까워 보인다. 엄마는 철이 없고, 어린 딸은 조숙하다.  이 모텔-놀랍게도 이름이 '매직 캐슬'이다-에는 빈민을 돕는 단체에서 정기적으로 빵과 음식을 싣고 오는데, 무니는 눈치껏 빵을 얻어낸다. 엄마가 길거리에서 싸구려 향수를 파는 것도 도와주고, 심심하면 밖에서 친구와 함께 모텔 근처를 돌아다니며 관광객에게 돈을 얻어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빈집에 불도 지르고, 구호단체에서 얻은 빵을 친구와 나눠 먹으며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런 무니를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은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으로 뜨거워질 뿐이다. 핼리의 처지가 더욱 곤란해지고, 아동보호국에서 무니가 '건전한 가정'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입양을 보내려는 결정을 한다. 당연히 핼리와 무니는 아동보호국의 결정에 반발하고, 무니는 어른들을 피해 친구와 함께 마을을 떠나는데, 그들이 도착한 곳은 '디즈니랜드'다. 핼리와 무니 같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외부모 가족을 지원하는 방식이 엄마와 아이를 떨어뜨리는 것이라면 문제가 많다. 물론 여기서는 핼리가 돈을 벌기 위해 한 행동 가운데 아이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이지만, 빈민 가족에게 생활할 수 있는 기본 생활비를 지원하고, 저렴한 임대주택을 공급한다면 이들이 매주 방값을 내기 위해 애를 태우지 않아도 될텐데, 미국사회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로 굴러가고 있어 핼리와 무니처럼 가난한 처지의 빈민들은 사회에서 도태되고 있다.  사회에서 여성과 어린이는 장애인과 노인 다음으로 사회적 약자다. 핼리와 무니는 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핼리는 (아마도)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을 것이고, 의지할 부모나 가족도 없거나 절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살아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써도, 할 수 있는 일과 벌어들이는 돈은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어린이 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울 때, 잘 쓰면 훌륭한 결과를 만들지만, 자칫하면 영화가 어색해진다. 이 영화에서 무니를 연기한 배우 브루클린 프린스는 매우 재능 있는 배우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빔 벤더스의 영화 '도시의 앨리스'에서 앨리스 역을 했던 어린이 배우 옐라 로틀랜더 역시 영화를 빛낸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영화는 무니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뒤에 드리운 어른들의 어둡고 괴로운 삶의 장막은 관객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라고, 감독은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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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15
  • [영화] 그 땅에는 신이 없다
    [영화] 그 땅에는 신이 없다 1880년대 뉴멕시코주의 라벨이라는 작은 광산 마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서부극. 7부작 미니시리즈로 긴 이야기지만 보는 내내 흥미진진하다. 기본 설정은 라벨 마을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남자들 약 80여명이 광산에서 사고를 당해 한꺼번에 몰살당했다는 것, 그래서 라벨 마을에는 몇 명의 남성 외에는 모두 여성들만 남았다. 여기에 프랭크 그리핀이라는 강도단의 두목이 이끄는 떼도둑이 뉴멕시코주 일대를 다니며 마을 주민을 몰살하고, 건물을 불태우며, 열차강도, 은행강도 등 온갖 악행을 일삼고 있었다. 라벨 마을과 프랭크 강도단이 이어지는 계기는 프랭크 강도단에 있던 로이 구드라는 사람이 강도단을 이탈하면서부터다. 로이는 열차를 약탈하는 강도단에서 빠져나와 그들을 공격해 자신을 추격하도록 한다. 강도단이 갖고 있던 5만 달러를 가지고 도망친 것이다. 로이는 총에 맞은 채 도망치다 엘리스의 농장으로 들어오게 되고, 다시 엘리스의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진다. 엘리스는 부상당한 로이를 마굿간에 재우며 부상을 치료한다. 엘리스도 우여곡절이 많은 여성으로 매우 독립적인 인물이며 뛰어난 미모에 강단이 있고, 그와 함께 사는 인디언 할머니가 주술사라는 소문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한다. 마을 보안관 빌 맥뉴는 연방보안관이 찾아와 프랭크 일당을 잡으러 간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혼자 나서는데, 그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는 마을사람들에게 비겁한 보안관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데, 결국 홀로 프랭크 강도단을 뒤쫓기 시작한다. 빌 맥뉴의 여동생인 매리 맥뉴가 오빠의 두 아이를 돌본다. 보안관인 오빠를 대신해 마을 치안을 담당하는데,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능력을 가진 여성이다. 큼직한 몸집과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다니며, 오빠보다 총을 더 잘 쏘고, 씩씩한 맥뉴는 확실하진 않지만 레즈비언이다.  로이는 엘리스의 총에 맞았지만 엘리스의 치료와 도움으로 살아나고, 엘리스가 기르는 말을 돌보는 일을 한다. 엘리스의 아들-두번째 남편이 인디언이어서 아들도 인디언의 피가 흐른다-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치고, 사냥하는 법도 가르친다. 로이를 추적하던 프랭크 일당은 결국 로이가 라벨 마을에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고, 라벨 마을로 쳐들어온다. 로이는 자기 때문에 라벨 마을이 공격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마을을 떠나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다시 라벨 마을로 돌아간다. 여자들만 남아 있는 라벨 마을을 지키기 위해 매리 맥뉴를 비롯한 마을의 모든 여성이 무장하고, 건물 안에 숨어 프랭크 일당이 마을로 들어오길 기다린다. 최후의 전투가 벌어지고, 여성들과 프랭크 강도단과의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진다. 보안관보 와이티는 허무하게 칼에 맞아 죽고, 여성들도 여럿 죽지만, 결국 여성들은 프랭크 강도단을 전부 사살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프랭크는 도망가지만 뒤를 쫓은 로이와 대결을 하다 죽는다. 정통 서부극이면서도 여성의 비중이 높고, 여성 캐릭터를 잘 살렸으며, 여성을 주체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서부극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남성인 로이가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목장주인 엘리스와 보안관의 여동생 매리 맥뉴가 실질적 주인공이다. 이들 여성의 매력은 관객에게 멋진 여성의 모델로 인식되고, 이 여성들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현대여성의 전형에 가깝다.  19세기 서부는 법과 규율, 질서가 거의 없던 무법천지로 알려진다. 보안관이 있지만 집단으로 다니는 강도단을 당하기 어렵고, 법보다는 총이 더 빠르고 강하다는 점에서, 법을 집행하는 쪽에서도 총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악한 자들이 날뛰기 좋은 환경이었고, 보통의 남자들이 주눅들어 살았다면, 여성들은 더 나쁜 상황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거나 남성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이 시기의 여성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은 흑인, 인디언과 동양에서 이민 온 동양이민자들이었다. 특히 중국인들이 대량 이주했는데, 동부에서 서부로, 서부에서 동부로 이어지는 철도공사장의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중국인이었다. 이들은 과도한 노동과 사고로 그들의 시체를 레일 밑에 묻으며 철로를 건설했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이 공사장에서 죽어갔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사실이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라벨 마을에서 광산 노동자 80여 명이 사고로 매몰되어 죽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도 주나 연방에서 어떠한 사고 처리나 보상은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 속에서 살았으며, 주나 연방의 힘이 작은 마을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힘의 공백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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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6
  • [책] 음식의 제국
    [책] 음식의 제국   이 책은 음식으로 살펴보는 세계 문화, 역사, 문명, 식품의 역사다. 말하자면, 세계 문명사 전반을 다루고 있는 것과 같다. '음식의 제국'이라는 제목 때문에 기대를 한 책이지만, 결과는 좀 실망스럽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은, 내가 이 책의 의도와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저자들이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내가 이 책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맞겠지만, 그럼에도 내 수준에서 드는 의문은 이렇다.   저자들은 왜 '음식' 또는 '식품'을 '주체'로 상정했을까? 이 의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어나가기가 매우 불편했다. 이 책이 다루는 역사의 범위는 수메르 제국(기원전 7천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약 1만년의 역사다. 그리고 중국,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대륙, 중동, 아시아를 아우르는 지구 전체의 역사를 크거나 작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는 '미시사'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거시사'와 함께 지역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내용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않고 있다. '음식' 또는 '식품'을 주체로 상정한 것은 내가 보기에는 명백한 오류라는 생각이다. 이유는, 그로 인해 역사를 '결과론'으로 시작해 '결과론'으로 끝내게 되는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이런 함정을 모르지 않을텐데, 왜 역사를 '결과론'으로 몰고 가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저자들의 오류를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저자들은 중세 유럽에서 농업의 혁명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났다고 했다. 수도승들이 농업에 종사하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품종을 만들면서 잉여 농산물이 생겨나고, 그것은 곧 수도원 주위의 농토를 매입하고, 농부들을 소작농으로 만들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역사의 극히 단편만을 묘사한 것이다. 중세는 갑자기 생겨난 시대도 아니고, 이미 그 이전 시기부터 쌓여 온 역사의 한 과정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중세의 농업 혁명-신기술의 발달-을 수도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절대 왕권과 종교의 위세에 눌려 살면서도 농업생산성을 키워온 그 시대의 농부들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이 당연하고 기본적인 순서라고 생각한다. '음식' 또는 '식품'을 역사의 주체로 상정한 순간, 거기에는 '인간'이 배제되고 소외된다. 음식을 만들고, 식품을 가공하고, 농어업, 축산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농부, 어부의 노고는 사라지고 만다. 이 책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노동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또 하나의 의문은 '무계급성'이다. 적어도 역사를 다루는 저자라면, 인간의 역사는 곧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마르크스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계급투쟁 이론'이나 '사적 유물론' 또는 '변증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유사 이래의 역사가 계급으로 분화하고, 계급 사이의 갈등이 사회와 세계를 바꿔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음식이나 식품을 다루는 문제 역시 지극히 당연하게도 '계급성'은 어느 한 순간도 배제할 수 없는 핵심이다. 이 책에서는 유럽의 제국들이 식민지를 착취하는 과정에서 지배계급의 폭력은 말하지 않고, 중세나 현대에서도 자본가와 노동자 또는 자본가와 농민의 갈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을 '식량폭동'이라고 격하한다. 식량이나 식품에 관한 생산성의 증대는 많은 부분 착취와 관련되어 있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노예 노동이나 농노를 통한 생산성 증대는 말할 것도 없이 계급적 폭력의 결과였다. 이런 내용들이 이 책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전자 조작 식품(GMO)에 관한 것이다. 저자들이 의도적으로 빼놓은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다루기에는 이 책의 내용이 적당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음식의 제국'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당연히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해 다뤘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가장 실망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는데, 유전자 조작 식품을 다루지 않음으로 해서, 이 책은 반쪽짜리 책에 불과하고, 명성이 있다면, 스스로 먹칠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해 다루지 않으려면, 이런 책도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용기도 없이 음식으로 보는 세계문명사를 다루겠다고 나선 것이라면 만용이거나 사기에 불과하다. 이 책은 나름대로 배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책에는 없는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 아는 내용을 집대성한 것으로, 이 책만이 갖는 훌륭한 장점을 추려내기는 어렵다. 게다가 책의 구성이나 집필 내용이 너무 산만하고 복잡하게 되어 있어,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음에도 책을 읽어나가기가 어렵다. 무려 24쪽에 달하는 미주가 있지만, 그 많은 참고 문헌이 있음에도 내용은 뛰어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식품 제국'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저자들이 말하는 '식품 제국'의 실체는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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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3
  • [영화] 바그다드 카페
    [영화] 바그다드 카페 이 영화를 오래 전에 보고,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기억나는 것은 음악이다. 영화에서 울려퍼지던 그 몽환적인 노래는 아마도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자리잡았으리라. 시간이 많이 흘러 감독판으로 재개봉한 영화를 다시 봤다. 낯익은 얼굴이 반갑다. 독일에서 온 야스민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동행했던 남자-남편일 수도 있다-와 도로 위에서 헤어진다. 아마도 남자가 짜증나게 했기 때문이리라. 아니면 훨씬 오래 전부터 두 사람에게 문제가 있었고,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아마도 바로 그 시점에 두 사람의 감정이 폭발했으리라. 야스민은 옷가방을 트렁크에서 꺼내고, 남자는 차를 가지고 떠난다. 야스민이 내린 도로 위는 트럭들이 주로 오가는 퍼시픽 트레일 하이웨이로, 그녀는 물론 몰랐지만, 로스엔젤레스에서 라스베가스로 가는 길에서도 곁길로 빠진 한적한 도로다. 이 길을 오가는 차는 거의 대부분 트럭들이고, 어쩌다 드물게 승용차가 지나갈 때가 있다. 날씨는 덥고, 정장을 하고 무거운 트렁크를 끌면서 야스민은 도로 옆 허름한 카페에 도착한다. 바그다드 카페다. '바그다드' 지명은 실재한다. 황량한 사막같은 곳에 낡은 건물 몇 개가 전부인 바그다드는 사람이 살기에 그리 좋은 곳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도 카페 주인은 흑인이다. 억척스러운 여성 브렌다는 남편을 닥달하고, 손자-아들이 너무 이른 나이에 사고를 쳐서 얻은 아이-를 기르며, 피아노만 치는 아들과 밖으로만 나도는 딸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면서도 카페와 주유소와 모텔을 운영한다.  모텔에는 장기 투숙자가 있는데, 자신을 헐리우드 배우 겸 무대미술가라고 말하는 루디-잭 팰런스-와 문신을 해주는 데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파일리스가 카페의 손님이기도 하다. 브렌다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늘 바쁘고, 늘 화가 나 있으며, 온갖 잔소리와 불평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악랄하거나 품성이 나쁜 여성은 아니다. 브렌다는 지쳤다. 먹고 살기 위해 카페와 주유소와 모텔을 운영하지만 생각만큼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니고, 남편은 성격이 너무 느긋하고 게을러서 일을 거의 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 아들은 어떤 여자애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 데려왔는데, 젊은 나이에 이미 할머니가 되어 버린 브렌다는 자기 인생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늘 우울하고 초조하며, 불안했다. 딸도 학교에 가는 것보다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트럭 기사들 차를 얻어타고 모하비 사막으로 놀러갈 생각이나 하는 철없는 아이여서 제럴드의 걱정은 커지기만 한다. 그러던 어느날, 인적 드문 이곳 카페에 낯선 이방인이 나타난다. 날씨는 더운데 정장을 입고, 무거운 트렁크를 끌며 도로를 걸어온 그 여성은 영어도 유창하지 못한 외국 여성이다. 그녀는 하룻밤 묵겠다고 말하고 여행자수표로 결재한다. 객실에 들어와 트렁크를 열어본 야스민은 가방이 바뀌어 남자의 트렁크를 가져왔다는 걸 알게 된다. 바그다드 시내가 어디냐고 묻는 야스민의 질문에 브렌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기가 바그다드라고 말한다.  투숙객인 야스민은 늘 바쁘기만 한 브렌다를 위해 사무실을 정리, 정돈하고 카페 건물도 청소한다. 하지만 브렌다는 그런 야스민의 행동에 화를 내고, 자기의 권리와 영역을 침범하는 야스민의 태도에 의구심을 품는다. 돌이켜보면, 야스민의 가방에 마술도구가 들어 있던 것은, 야스민의 남편 또는 남자친구 또는 남자 동료가 마술을 했고, 야스민은 그를 돕는 보조자의 역할로 라스베거스로 가서 일자리를 찾으려던 것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다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리거나 감정적 다툼이 있었고, 야스민은 이 황량한 곳에 외톨이로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잘못 가져온 가방에서 나온 마술도구와 남자옷 때문에 난감했지만 야스민은 곧 그 도구를 이용해 스스로 마술을 배운다. 그리고 아주 가볍고 간단한 마술을 카페에서 선보이며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다. 브렌다와 야스민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장기투숙객들과 친해지며, 브렌다의 아들과 딸도 야스민을 좋아한다. 바그다드 카페는 마술을 하는 카페로 알려지고, 매일 저녁 카페에서 마술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트럭운전수들이 공유하면서 카페는 손님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외진 곳에 있는 낡고 허름한 카페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라스베가스보다 훌륭하다는 마법쇼가 펼쳐지면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고, 모두 행복하게 되기까지 야스민의 헌신이 있었다. 야스민은 대체 누굴까. 그녀는 뚱뚱해서 세속의 시선으로 보면, 아름답다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루디(헐리우드의 배우이자 무대미술가)는 야스민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야스민의 외모가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다. 재미있고 행복한 마술쇼를 펼치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카페가 된 바그다드 카페에서 모처럼-아마도 인생에서 처음이었을 게 분명한-행복한 시간을 보낸 사람들-브렌다와 그의 아이들, 장기투숙객들, 트럭운전수들, 일부러 마술쇼를 보려 온 사람들-은 야스민이 불법체류자로 체포되면서 그 행복한 추억을 더는 만들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간 지나고, 덥고 황량한 퍼시픽 트레일러 하이웨이의 도로 저쪽에서 하얀 옷을 입은 야스민이 다시 나타난다. 이야기는 해피엔드로 끝나고, 브렌다와 야스민의 따뜻한 우정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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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0
  • DMZ 인근에 한반도 횡단 도보여행길 생긴다
    DMZ 인근에 한반도 횡단 도보여행길 생긴다- 강화에서 고성까지 456km‘DMZ, 통일을 여는 길’조성 - 비무장지대(이하 DMZ) 인근에 분단의 현장과 뛰어난 생태‧문화‧역사자원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는 한반도 횡단 도보여행길이 조성된다.행정안전부(장관 김부겸)는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한반도 평화‧번영의 전진기지로 주목받고 있는 DMZ와 인근 접경지역의 관광 자원을 활용하여 한국판 산티아고길인 ‘DMZ, 통일을 여는길’(가칭)을 조성한다. DMZ 인근 접경지역은 65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은 생태계의 보고(寶庫)이자 선사시대부터 6.25전쟁까지 다양한 역사‧문화‧안보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관광 자원으로 가치가 높은 곳이다.‘DMZ, 통일을 여는 길’은 2019년부터 2022년까지 4년간 총 286억 원(국비 200억 원, 지방비 86억 원)이 투입되어 인천시 강화군에서 강원도 고성군까지 접경지역 10개 시‧군에 걸쳐 456km로 조성된다.농로, 임도 등 기존 길을 활용하여 단절된 구간을 연결하고, 지역의 대표 생태‧문화‧역사 관광지와 분단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도록 노선을 설정한다.이와 함께 10개 시‧군 중심마을에 거점센터(10개소)도 설치한다. 거점센터는 폐교, 마을회관 등을 새단장하여 게스트하우스, 식당, 카페, 특산물 판매장 등으로 사용될 예정이며, 이를 통해 체류형 관광을 유도하고 주민 소득증대도 도모한다는 방침이다.아울러, 안내 표지판, 거점센터 등에 ‘DMZ, 통일을 여는 길’ 공동브랜드와 통합디자인을 적용하여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또한, 위치기반시스템을 활용한 민통선 출입 간소화 및 여행객 안전관리 등도 관계부처와 함께 추진한다.행정안전부는 내년 초 지방자치단체의 신청을 받아 ‘DMZ, 통일을 여는 길’ 거점센터 우선사업 대상지를 선정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국민디자인단(주민디자인단)을 구성하여 지역별 관광지와 연계한 노선을 설정하고 공동브랜드 대국민 공모도 추진할 예정이다.행정안전부는 ‘DMZ, 통일을 여는 길’이 조성될 경우 한국의 산티아고길이 될 것으로 기대하며, 연간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해 2,500억 원의 경제효과를 창출하는 등 일자리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807km) : 연간 600만명 방문, 경제효과 1조원김현기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분권실장은 “‘DMZ, 통일을 여는 길’을 세계인이 찾는 도보 여행길로 만들어 접경지역의 경제 활성화와 주민 소득증대에 기여하는 한편, 한반도 평화‧번영의 상징적인 장소로 육성하겠다.”라고 밝혔다. 기사출처 : 행정안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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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6
  • [영화] 파리, 텍사스
    [영화] 파리, 텍사스 좋아하는 영화는 시간이 흘러도 기억에 남고, 다시 찾아보고픈 마음이 든다. 그런 영화들이 꽤 많지만, 어제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로마'를 보고나서 그 영화와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가 떠올라 영화를 다시 찾아봤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의외로 많다. 제목에서부터 두 영화는 '동명이역' 즉 이름이 같지만 지역은 다른 지명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람마다 생각하는 머리속 나침반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을 뜻한다. '파리, 텍사스'에서 지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주인공 트레비스의 엄마가 태어난 곳이 텍사스에 있는 파리였고, 트레비스의 부모가 사랑을 한 곳도 파리였으며, 트레비스는 파리가 자신이 '만들어진 장소'라고 굳게 믿고 있다. 즉 엄마가 자기를 임신한 곳이 텍사스에 있는 파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트레비스가 한때 여유가 있을 때, 텍사스의 파리에 있는 넓은 공터를 우편판매로 매입했다고 동생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말한다. 이 영화가 1980년대 초반에 만들었으니 벌써 30년도 훨씬 넘은 영화인데, 그때 텍사스 파리는 지금보다 더한 시골이었을텐데, 지금의 텍사스 파리는 한국과 비유하자면 시골의 한적한 면소재지 비슷한 마을이다. 요즘은 구글 지도가 있어서 미국이라면 어느 지역이든 마치 실제 걸으면서 보는 것처럼 풍경을 자세히 볼 수 있는데, 대도시인 달라스에서 조금 떨어진 작고,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동네에 불과하다. 그곳에 땅을 매입한 것은 오로지 트레비스 엄마의 고향이고, 부모가 그곳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고향이자, 나중에 가족과 함께 그곳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트레비스의 꿈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는 느리게 진행한다. 텍사스의 황량한 사막을 걷는 한 남자. 남루한 옷과 지저분한 턱수염, 쾡한 눈과 거칠고 더러운 피부. 누가 봐도 부랑자이고 노숙자 같은 모습이다. 갈증이 심한 남자는 물을 찾아 다니다 작은 식당에서 얼음을 퍼먹고는 쓰러진다. 그가 깨어난 곳은 지역의 병원이고, 마침 그 식당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의사여서 그는 운 좋게 살아난다. 하지만 의사가 묻는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는 남자. 의사는 남자의 지갑에서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거는데, 마침 그의 동생 월트가 받는다. 월트는 로스엔젤레스에 살고 있고, 형과 연락이 끊긴지 4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만난 형제는 월터의 집으로 가기 위해 나서지만,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트레비스 때문에 이틀을 걸려 자동차로 집에 도착한다. 처음에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있던 트레비스도 동생의 보살핌과 아늑한 동생의 집에서 생활하자 예전처럼 정상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동생 월터의 집에는 그가 잊고 있었던 어린 아들 헌터가 있었다. 헌터는 이제 8살이 되는 아이로 잘 생기고 똑똑하다. 월터는 헌터를 친자식처럼 키우고 있었지만 친아버지가 나타나자 헌터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두 사람의 어색한 만남을 없애기 위해 그들 가족이 행복했을 때 찍었던 수퍼8밀리 비디오 영상을 함께 본다. 그 영상 속에서 두 가족-트레비스와 월터의 부부와 아이-은 여행을 떠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 헌터는 이제 겨우 4살의 어린 아기로, 두 부부에게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영상을 바라보는 트레비스와 헌터는 행복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슬퍼진다. 함께 있어야 할 아내이자 엄마인 제인이 그 자리에 없기 때문이다. 트레비스와 헌터는 아버지와 아들이면서도 어색한 사이로 지내고,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헌터가 학교가 끝나 집으로 가려고 나올 때, 길 건너편에 서 있던 트레비스와 만나고, 두 사람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며 걸어서 집까지 걸어온다. 트레비스가 움직이는 모습을 헌터가 따라하고, 말없이 그렇게 오래도록 걸어서 집 근처에 다다르자, 트레비스는 도로를 건너 헌터에게 다가가고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집으로 돌아간다. 이 장면은 아버지와 아들이 심리적으로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잘 드러낸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버지와 아들은 손을 잡지 않고, 조금은 어색한 마음의 공간을 남겨두고 있다. 월터의 아내는 트레비스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제인이 연락을 했으며, 매달 헌터의 은행계좌로 돈을 입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트레비스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제인을 찾으러 가겠다고 말한다. 로스엔젤레스에서 돈을 입금하는 은행이 있는 휴스턴까지 아들 헌터와 함께 차를 몰고 떠나는 트레비스. 매달 15일이면 돈을 입금하는데, 그 날에 맞춰 은행 앞에서 기다리다 제인을 만나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두 사람은 15일에 휴스턴 시내에 있는 드라이브 쓰루 은행에 도착하고, 입구와 출구 쪽에서 머물며 들고나는 자동차를 보며 제인을 찾는다. 그러다 두 사람 모두 잠이 들고, 막 잠에서 깬 헌터 앞에 빨간색 쉐비를 운전하는 금발의 여성이 보인다. 헌터는 본능적으로 그 여성이 엄마라는 걸 느낀다. 잠자고 있는 트레비스를 깨워 겨우 빨간차를 뒤쫓아 가는데, 휴스턴 외곽의 허름한 동네에 있는 건물 앞에 도착한다. 트레비스가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은 성매매를 하는 곳이었다. 직접 몸을 팔지는 않지만, 창문을 통해 여성의 몸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제인은 그곳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 헌터에게 돈을 보내고 있었다. 트레비스는 4년만에 아내 제인을 만나지만, 제인은 창문 너머의 남자를 볼 수 없고,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트레비스는 제인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와 헌터에게 엄마가 그곳에 있음을 알린다. 그리고 다음날, 트레비스는 녹음기에 아들 헌터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녹음하고, 다시 제인을 찾아가 그가 겪었고, 생각했던 제인과의 이야기를 천천히, 조용히 말한다. 제인은 창문 너머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다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설움이 복받쳐 눈물을 흘린다.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까지, 관객은 두 사람이 왜 헤어졌고, 트레비스가 왜 사막을 헤맸으며, 제인이 왜 사창가에서 몸을 팔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하지만 트레비스의 말을 듣고, 다시 제인의 말을 들으면서-이것은 영화 속에서 헤어진 부부가 서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트레비스와 제인이 관객에게 직접 하는 독백이기도 하다-앞에서 했던 주인공들의 모든 행동을 납득하게 된다. 트레비스와 제인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이었다. 제인은 매우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었고, 트레비스는 그런 제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너무 사랑해서 직장도 다니지 않고 제인 옆에만 있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것은 집착이고 소유욕이었을뿐,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었다. 트레비스는 자기가 일하러 나간 사이에 제인이 바람을 피고 있다고 믿기 시작했고, 의처증으로 발달해 제인을 괴롭혔다. 다른 여자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제인을 함부로 대했다. 그럼에도 제인은 트레비스를 사랑했고, 그를 걱정했으며, 그를 믿고 기다렸다. 그러다 제인이 임신하고, 아들 헌터를 낳으면서, 상황은 바뀐다. 제인은 자신의 인생이 망가졌고, 아이를 낳아서 자신을 구속하려한 트레비스를 미워했다. 반대로 트레비스는 헌터가 태어나자 다시 제인을 사랑하고, 자신이 잘못했던 행동을 반성하며 용서를 구했다. 제인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짜증을 부리고, 집을 뛰쳐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트레일러에 불이 나고, 트레비스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마음 상태로 무작정 집을 떠나 달리기 시작했다. 왜 집을 나왔는지, 왜 제인과 헌터를 버리고 부랑자가 되어 거리를 헤매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 이후 트레비스는 제인을 처음 만나는 것이다. 제인은 그렇게 떠난 트레비스를 오래 기다렸지만 결국 트레비스를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그것이 헌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헌터를 트레비스의 동생 부부에게 맡기고 집을 떠난다. 두 사람의 독백을 들어보면, 제인의 행동은 출산을 하고 나서 임산부가 겪는 산후우울증일 확률이 높다. 다만 임신 전과 임신 상태에서 트레비스가 보인 타락한 모습에 몹시 실망하고, 절망한 상태였다가 출산과 함께 그 절망적인 감정이 폭발해 남편과 아이를 포기하고 어디론가 도망가고픈 욕망이 솟구쳤다고 해석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아직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지만, 트레비스는 여전히 제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알면서도 정작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에는 깊은 반성을 하지 않는 이중의 모습을 보인다. 제인은 자기가 했던 과거의 행동이 잘못이었고, 그로 인해 트레비스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빌지만, 트레비스는 아들 헌터와 엄마 제인이 함께 있기를 바라면서도 자신은 다시 길을 떠난다. 영화가 두 사람-부부-만의 이야기였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을 울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어린 아들 헌터가 존재하면서, 개인과 가족의 슬픔은 더 깊어지고, 울림은 커진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미혼이었는데, 그때는 주로 두 사람의 관계만을 중심으로 보았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키운 다음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부부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사람이 바로 8살 헌터임을 알게 되었다. 행복했던 시절에 찍었던 비디오에서 4살의 아기 헌터는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그리고 4년이 흘러 이제 초등학생이 된 헌터는 아름다우면서도 슬픔을 간직한 아이가 되었다. 헌터는 부모의 이별로 작은아버지, 작은엄마를 친엄마, 친아빠로 알고 지냈으며, 그에게 친아버지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겪었을 마음의 갈등과 혼란을 생각하면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느낀다. 그나마 헌터는 좋은 양부모 아래서 행복하게 자라 퍽 다행이었고, 친아버지를 이해하는 속깊은 아이였다. 호텔에서 혼자 기다리며 떠나간 아빠를 생각하고, 엄마를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는 헌터를 찾아온 제인,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가가 말없이 끌어안는다. 엄마와 다시 만나지만, 아버지와는 다시 헤어져야 하는 헌터. 가족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다. 밤길을 운전하며 어디론가 떠나는 트레비스의 옆모습에서 반짝거리는 건 아마 눈물이었으리라. 이 영화에서 붉은색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사막을 걷는 트레비스가 쓰고 있는 모자는 빛바랜 붉은색 모자였고, 트레비스가 동생네 집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아들 헌터와 관계가 좋아지면서, 다시 아내 제인을 찾아나서는 길에 붉은색 옷을 입고 있다. 아들 헌터도 마찬가지. 게다가 휴스턴의 드라이브 쓰루 은행 앞에서 헌터가 발견한 엄마의 차도 빨간색 쉐비였고, 트레비스가 몇년만에 만나는 아내 제인이 입고 나온 옷이 붉은색 옷이었다. 결정적 순간마다 등장하는 붉은색은 붉은피 즉 혈연을 뜻한다. 이들이 한 가족으로, 서로 피를 나눈 사이임을 암시하며, 가족이 흩어졌다 다시 만나면서 피가 통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드러낸다.  영화는 긴 여운을 남기며 끝나는데, 트레비스와 아들 헌터가 만났다 헤어지고, 제인과 아들 헌터가 만났으니 이제 다시 트레비스가 돌아오면 가족은 완전하게 결합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트레비스와 제인은 만나지 않더라도 헌터가 중간에서 부모 사이를 오가며 만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가족이라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헤어지고,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사이가 될 수 있다.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증오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길을 떠나야 할만큼 마음의 상처가 깊다면, 그것을 치유하도록 시간을 주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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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6
  • [영화] 로마 ROMA
    [영화] 로마 ROMA 이 영화는 그가 만든 '그래비티'보다 흥행이 낮을지 모르지만, 그의 작품-앞으로 만들 작품까지 포함해서-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 아닐까 예상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쉰들러 리스트'가 생각났다. 두 작품은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데-있다면 딱 한 가지, 영화가 흑백이라는 점-왜 '쉰들러 리스트'가 떠올랐는가 생각해보니, 이유를 알 것 같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멋진 영화를 만들면서 세계적인 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자신의 검증된 연출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고자 했다. 반면 스티븐 스필버그는 유명한 흥행감독으로 성공하자, 상을 타고 싶은 욕망으로, 오로지 '예술성 있는 감독'이라는 이름을 얻고 싶어서 '쉰들러 리스트'를 연출했다. 두 사람의 출발점이 처음부터 다르다. 유대인이자 시오니스트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핍박당하는 유대인을 구출한 독일인 쉰들러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그렇다고 지금 스티븐 스필버그를 '예술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영화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그저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 아니라, '예술영화'도 잘 만드는 뛰어난 감독임을 보여준다. 이전의 영화들이 대중성과 흥행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적어도 이 영화는 그런 관객의 시선에서 초연하다.  무려 134분이나 되는 런닝타임은, 대단한 사건이 없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길어야 하는지,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더는 줄일 수 없다는 감독의 의지를 반영한다. 그리고 흑백필름은 단지 멋을 부리기가 아니라, 1970년대 멕시코의 시대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훌륭한 수단임을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된다. 이 영화가 컬러필름이었다면 오히려 영화의 몰입과 집중에 방해가 되었을 터이고, 영화의 격도 낮아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흑백필름을 적절하게 쓰면 영화는 더욱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본같은 영화다. 이야기는 매우 평범하다. 오히려 너무 평범하고 단조로워 지루할 것 같은 내용이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호흡을 이어간다. 멕시코의 한 도시 이름이 '로마'다. 이탈리아의 로마라면 너무 당연하겠지만, 이 영화에서 '로마'는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의 중심부에 있는 한 지역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동명이역(이름이 같은 다른 지역)으로 유명한 영화 '파리, 텍사스'가 있다. 미국 텍사스에 있는 '파리'에서 벌어지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빔 벤더스 감독의 이 영화 역시 걸작이다. '로마'와 '파리, 텍사스'는 헤어진다는 소재가 같다. 다만 그 방식이 다를 뿐, 가족의 해체, 사랑하는 사람과 결별, 후회, 안타까움 등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다. 텍사스의 로마지역에 사는 한 중산층 가족과 그 집에서 일하는 멕시코 여성 가정부 클레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중산층 가족이지만 이들은 미국인이다. 미국인이 멕시코에서 중산층으로 살아가며 멕시코인을 하녀로 부리고 있다는 것은, 멕시코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을 암시한다. 미국에 종속된 멕시코는 자신들이 분명 멕시코의 주인이면서도 미국의 하인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약자의 처지에 놓여 있다. 미국인 부부는 네 명의 아이가 있다. 집에는 두 명의 가정부가 있고, 남자는 아마도 의사인 듯하고, 여자는 생화학자로 교사로 일하는 것으로 나온다. 넓은 집에 두 대의 차를 보유하고, 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는 이 가족과 가정부 클레오는 주종 관계이면서도 사이가 퍽 좋다. 클레오는 전형적인 멕시칸으로 외모만 봐도 멕시코 사람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멕시코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 집에서 일하는 두 명의 젊은 여성 가정부는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임을 외모부터 보여준다. 조신한 몸가짐, 부지런한 몸놀림, 집안일을 두루 하면서 아이들도 돌보는 유모같은 가정부들이다. 미국인 부부는 두 명의 가정부를 믿고, 아이들까지 맡긴다. 집주인이나 아이들에게서 갑질이나 선민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고, 상식을 갖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느날부터 이 행복한 집안에 균열이 생긴다. 캐나다 퀘벡으로 출장을 떠난다는 남자는 돌아오지 않고, 클레오는 남자친구와 동침하고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남성은 무책임하고, 폭력적이다. 어린 자식을 네 명이나 남겨두고 출장 간다고 속이고 집을 떠난 백인 남성은 실제로는 같은 멕시코 시티에서 다른 여자와 살고 있다는 것이 발각된다. 클레오의 남자친구는 클레오가 임신했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도망친다. 남자들은 대책없이 한심하고, 어이없는 속물에다 역겨운 인간들이다. 클레오의 집주인인 백인여성이 '여자는 언제나 혼자였어'라고 말하는 건, 자신의 처지는 물론이고 클레오의 난처한 상황까지 아우르며, 여성 일반의 삶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클레오는 임신한 사실을 밝히면서, 자기가 해고될 것을 걱정하지만, 여주인은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집주인으로서의 배려일 수도 있고, 같은 여성으로서 동지적 입장으로 배려하는 것일 수 있다. 덕분에 클레오는 임신하고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는데, 그는 충격적 사건을 겪으면서 결국 아이를 사산한다. 아이들과 여행을 떠난 곳에서 두 아이가 파도에 휩쓸려 죽을 뻔한 상황에서 클레오는 성치 않은 몸으로 바다에 들어가 두 아이를 살린다. 하마터면 클레오도 죽을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모두 살아서 바다 밖으로 나오고, 이때 클레오는 자신의 속마음을 처음으로 드러낸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어요.' 이 말은 한때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남자에게서 받은 심한 마음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음을 뜻하며, 데모하는 학생을 총으로 쏴죽이는 사람이 자신의 아이 아버지였던, 한때 사랑했으나 매몰차게 임신한 자신을 버리고 떠난 바로 그 남자라는 것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던, 그래서 그 폭력적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클레오의 여주인 역시 자신이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심한 충격을 받지만, 네 명의 아이를 키워야 하는 어머니로, 생화학자이자 교사인 지성인으로, 남자의 배신을 결연하게 극복한다. 그녀는 아이들과 클레오에게 새로운 모험을 떠나자고 말하고, 앞으로 함께 더욱 뭉쳐서 잘 살자고 다짐하고 격려한다.  이 영화는 결국 여성의 이야기이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사랑했던 엄마, 이모, 누나들의 이야기다. 1970년대 초반의 여성이라면 멕시코나 한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들이 놓인 사회적 환경이나 억압은 나라를 떠나 비슷하며, 여성 일반이 겪는 고통의 역사는 인종과 국경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욱 보편적인 영화이며, 시대를 훌륭하게 반영하고, 여성의 삶을 드러내며, 평범하지만 비범했던 여성들을 기억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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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5
  • 무료로 보는 한국고전영화
    무료로 보는 한국고전영화   인터넷에서 무료로 한국 고전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인터넷을 활용하는 방법은 많지만, 오래된 한국영화를 편하게 볼 수 있어 옛날 영화를 좋아하거나, 옛날을 추억하고픈 분들에게 좋은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요즘은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고, 어지간한 곳에는 무선인터넷이 개방되어 있어 인터넷만 연결이 되면 수백 편의 한국고전영화를 쉽게 볼 수 있어 한국고전영화 채널을 소개한다. 유튜브(youtube)에 '한국고전영화' 공식 계정이 있는데, 이 주소는 아래의 링크와 같다. https://www.youtube.com/user/KoreanFilm/videos 이곳에 들어가면 현재까지 약 288편의 한국고전영화가 올라와 있는데, 1950년대 영화부터 1980년대 영화까지 다양하다. 흑백영화도 많고, 한때 톱스타였던 유명배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특히 나이든 사람은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여기 올라온 영화는 모두 영화관에서 상영한 영화들로, 오래된 영화는 디지털 복원을 통해 화질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 보기도 좋다. 드물게 1930년대 영화와 1940년대 영화도 몇 편 있다.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훌륭한 자료의 역할도 하고, 영화를 통해 그 시대의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사회적 가치도 있다.      양평에 사는 많은 주민들은 영화관에 쉽게 찾아가기 어려운데, 마을회관에 큰 텔레비전이나 빔프로젝트를 연결해 마을 어른들께 고전영화를 보여드리면 좋은 문화 활동이 되지 않을까.   주의할 점은, 스마트폰으로 여기 있는 영화를 볼 때는 '와이파이(wifi)에 연결하고, 데이터는 꺼놓는 것이 필요하다.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라면 '와이파이'를 켜고, '데이터'를 끈다는 것을 젊은이에게 물어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 와이파이(wifi)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자동으로 연결되는 공개 와이파이와 비밀번호가 있는 보안 와이파이가 그것이다. 도시의 공공 장소나 전철 등에서는 공개 와이파이를 쓸 수 있고, 마을회관에도 공개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 있다.  보안 와이파이는 각 집마다 쓰는 무선 인터넷에 비밀번호를 입력해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 놓은 것이다. 카페에서도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무선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양평의 각 마을회관에 공개 와이파이를 설치해 노인들이 '데이터'를 적게 쓰고, 무선 인터넷을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의미 있는 사업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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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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