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07(월)

칼럼
Home >  칼럼

실시간뉴스
  • [기고]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의의(上)
    [기고]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의의(上)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3~5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3.1운동은 신분, 사상, 종교를 넘어선 우리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투쟁이었다. 또한, 3.1운동은 4월 11일 임시정부 설립으로 이어졌고 비로소 헌법이 만들어지게 됐으며, 헌법에는 모든 권력의 주체가 국민임이 명시됐다.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3.1운동은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3.1운동은 종교를 넘어서,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신분을 넘어서 하나가 된 일대 거사라고들 한다. 3.1운동 이후인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정부는 헌법을 제정하고, 헌법에는 그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지향했던 나라, 조선이 원했던 나라가 명시돼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 그런데 과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이 가슴에 절절하게 다가올지는 알 수 없다. 100년 전에는 어떠했을까? 당시에 거리에 나와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 일본헌병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2천만 우리 국민들은 총칼 앞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500여명이 넘게 죽고, 2만여 명 가까이 부상을 입었는데도 3월에서 5월까지 계속 됐다. 무엇이 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총칼의 위협을 넘어서게 했을까? 1910년 황제가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넘기더니, 일본이 왕이 돼 거리에서, 학교에서, 사람이 모이는 모든 곳에서 걸핏하면 잡아가고, 죽이고 때린다. 쌀도 빼앗고, 산에서 긁어다 때던 나무도 빼앗고, 농사에 필요한 물도 빼앗는다. 나중에는 말도 빼앗고, 이름도 빼앗았고, 거의 모든 물자를 빼앗더니 문화 또한 착실하게 뭉개버렸다. 그렇게 10년을 살았는데, 나라를 내 준 황제가 죽었고, 황제가 준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국민이 일어섰다. 독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황제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고 선언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3.1운동은 위대한 평민의 거사였다. 한 줌도 안 되는 양반의 세상에서 90퍼센트의 평민이 상놈이 아니라 국민이 되기 위한 거사였다. 대한독립만세는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는 말의 다른 버전이었다.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를 원했던 평민의 외침. 민주주의를 원했던 평민의 바람이 일으킨 폭발력이 전국으로, 전 세계 모든 동포에게로, 그리고 3월에서 5월로,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반상을 뒤집은 평민들이 선언한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독립선언서 첫 문장의 키워드는 그래서 ‘독립’과 ‘자유’다. 마치 현재완료형처럼 자유민들은 독립이 됐다. 독립된 나라는 정부가 있고, 헌법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여느 나라처럼 군대도 만들고, 행정부도 만들고, 국회도 만든다. 국회는 최초로 헌법을 만들어서 제일 앞장에 반상이 아닌 국민의 정부임을 명시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주인이 바뀌고, 그것이 법으로 인정됐던 것이다. 3.1운동의 위대함은 평민의 거사였다는 점과 실제로 상해임시정부와 헌법제정을 통해 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독립기념일이다. 이러한 3.1운동에는 숨은 주역들이 있다.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신한청년당을 조직해서 파리로 보내고, 동포들이 있는 곳곳으로 보내 김규식을 응원하자고 제안한다. 3.1거사의 기폭제 역할을 한 몽양 선생과 신한청년당은 100주년을 맞으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손병희 선생도 있다. 선생은 국내 3.1거사의 여러 계통성을 하나로 통일시킨 주역이다. 자본금도 거의 선생한테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2017년 만주 길림에서 조소앙 선생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의 바탕엔 바로 평민들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결연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결과적으로 3.1운동의 진정한 주역이 되었다.1919년 위대한 평민들의 독립과 자유의 함성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고, 2019년 100주년을 맞이했다. 100년 전 독립을 원했지만 아직도 반쪽인 우리는 이제 평화의 새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끝 하보균 양평 3.1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칼럼
    • 칼럼
    • 칼럼
    2019-03-06
  • 길위에서 만난 사람
    인터뷰 [길위에서 만난 사람]은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가 '삶'이라는 길 어디쯤에 있고 각자 걷고 있는 길이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지금 꽃길을, 누군가는 신작로를, 또다른 누군가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중일지도 모른다. 3.1운동 100주년기념 4차 포럼에서 이성한 씨를 만났다. 어쩌다보니 나란히 함께 안내를 하게 되었다. 함께 하다 보니, 그가 젊은 나이에 병고(病苦)라는 터널을 막 통과한 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의 얘기가 듣고 싶어 인터뷰를 청했다.
    • 칼럼
    • 인터뷰
    • 길위에서만난사람
    2019-03-05
  • 3.1운동 100주년기념 인터뷰
    3.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두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양평군 토박이 정 복동 어르신입니다. 1930년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배잔 마을에서 태어나 결혼 전까지 그곳에서 사셨고, 해방 후 결혼하여 보금자리를 튼 양평읍에서 현재까지 거주중입니다.      기자 : 양평군 토박이라 들었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나셨나요?    정복동 : 나는 대평리에서 태어났어요. 대평리 알죠? 작은 오막살이에서 태어났어요.    기자 : 그럼요, 대평리 잘 알죠. 대평리에서 어린 시절 겪었던 기억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정복동 : 우리 어머니가 딸만 넷을 낳고 다섯째로 아들을 낳으면 저 동산에 가서 춤을 추겠다 그러셨대요. 그리곤 동생이 태어났죠. 그때 나는 멀리 밭에 일하는 아버지한테 점심도 갖다 드리고 새참도 나르고 그랬어요. 어느 날, 아버지에게 참을 날라다 주고 집에 오니까 울어머니하고 동생하고 마루에 걸터앉아 울고 앉았어. 왜 우냐고 하니까 동생이 밥을 먹고 싶은데 죽을 주니까 먹기 싫다고 울고 있다 하더라구요. 동생은 먹기 싫다고 울고 엄마는 그런 동생이 안되서 울었던 거야.    기자 : 그때 몇 살이셨죠, 동생과는 몇 살 터울이었나요?    정복동 : 나는 그때 열세 살쯤 됐을 거에요. 동생이랑은 여섯 살 터울이었어요. 그 동생이 얼마 전 저세상으로 갔어요.   기자 : 그러셨군요... .... 대평리에서 농사를 지으셨나요?    정복동 : 그럼요, 농사를 지으면 배급을 줘요. 친구는 콩깻묵을 받았는데, 나는 그걸 못 받아서 그땐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기자 : 콩깻묵이요?    정복동 : 네, 콩기름을 짜고 남은 게 콩깻묵인데 친구가 먹으라고 줘서 막상 먹어보면 아주 못 먹겠더라구요. 농사를 지어도 죄다 뺏어가니까 곡식을 감춰요. 죽담이라고 담장 뒤에 독을 묻고 거기에 곡식을 감춰요. 그러면 일본 앞잡이들이 쇠꼬챙이로 담벼락을 푹 쑤셔요. 그럼 흙담이 쑥 들어가거나 독에 묻지 않은 곡식이 쏟아져 나와요. 그럼 다 뺏어갔죠.    기자 : 콩이나 조, 수수 같은 곡식도 농사짓고 또 어떤 작물을 농사지으셨어요?    정복동 : 그때 왜정 때 목화를 심으래요. 목화를 심어서 공출을 해라 그래요. 그러고 나서 목화 나무껍데기를 삶아서 벗겨 바치면 돈 얼마 주고 그랬죠. 얼마나 일본에 들볶였는지 나는 해방이 되어야 시집가겠다 그랬어요. 해방이 안 되면 시집가지 않을 거다 그랬어요. 지금 이 집이 내가 시집온 곳이에요. 나는 진짜 말대로 해방되고 열아홉에 시집왔어요.    기자 : 애써 농사를 짓고서도 뺏길까봐 곡식을 숨기고, 정작 가족들이 배곯고 고단했는데 어떻게 인내하며 사셨는지 말씀해 주셔요.    정복동 : 어머니가 봄이 오면 칼나물을 논두렁에 가서 해와요. 나물을 넣고 밥을 비비면 어머니가 얼른 수저를 놓아요. 나 많이 먹으라고... (한참 있다가) 우리 어머니가 막내 낳을 적에 내가 쌀을 퍼서 몰래 바가지에 감추어 두었어요. 어머니 해산밥 해주려고.    기자 : 그 힘들고 배고팠던 때 어린나이에 참 철이 들었네요.    정복동 : 네, 어머니가 옷이 없어 날마다 행주치마를 빨아 입는 걸 보고 내가 시집가면 어머니 옷 한 벌 해드려야지 그랬어요. 손이 다 닳도록 일을 했죠. 다리방아 아시지? 보리를 다리방아로 찧어 마당에 말렸다 까불러 벗겨야 밥을 해먹어요. 그럼 손이 다 닳아요. 그때 어머니가 힘들까봐 안타까워서 내가 다 방앗간으로 날랐어요. 불을 화르륵 때면 방이 뜨뜻해야 하는데 서늘해지면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시집가면 우리 어머니 뜨뜻하게 살게 해드려야지.’    기자 : 어머니의 자식사랑이 극진하여 또 자녀들의 어머니 사랑도 애틋했나 봐요.   정복동 : 동생이 학교에 갈 때 어머니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생 모습이 모퉁이 뒤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서야 집에 돌아와 밥을 자셨어. 한 삼십분이 지나도록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서 계셨어. 대평리에는 과부 딸이랑 외딸(외동딸)만 학교에 다녔어요. 나도 얼마나 학교에 다니고 싶었는지 몰라요. 언니랑 나랑 그때 일본어를 배우면 내가 금세 깨우쳤어. 나를 공부 시켰으면 참 잘했을 거야. 그때 학교에는 못 다녀도 검은 양말(검은 스타킹)이 너무 신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짚새기(짚신)를 삼아 달라 그랬어. 설날에 명으로 지은 새옷을 입고 짚신을 곱게 삼아서 신고 나갔다 오니 양말 뒤꿈치가 다 구멍이 났어(말씀하시며 소녀처럼 까르르 웃으심^^)   기자 : 일본이 식량을 공출시키고 다른 노역도 시켰을 텐데 대평리에서는 어땠나요?   정복동 : 가마니를 치라고 배당을 줬어요. 우리는 농사를 짓는다고 100장이 분담이 돼요. 면에서는 밤에 일할까봐 조사가 나와요. 할머니가 들킬까봐 까만 치마를 두르고 빛이 새나가지 않게 일을 했어요. 언니하고 나하고 같이 하루 종일 일해도 가마니 세 짝밖에 못 짜요, 나는 매달린 채 배고픈 채로 일을 해요. 가마니를 다 짜면 아버지가 꿰어서 마무리를 지어요. 그럼 1등, 2등, 3등까지 차별적으로 돈을 줘요. 그걸 지고 대평리에서 지평에 가요. 그때는 차도 없어서 걸어서... ... 아버지가 불쌍해요. 우리 아버지 세 살 먹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우리 할머니가 과부로 아버지를 키우셨어. 할머니가 이천이 친정인데 잘 살아서 아버지에게 돈을 줘서 대평리에 땅을 샀지.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일만 하니까 농사짓는 거밖에 모르셨지.   기자 ; 정복동 어르신의 일제 강점기 살아온 얘기를 듣다 보니 가족에 대한 안쓰러움과 애틋함,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 느껴져요. 지금도 참 고우시고 건강해 보이셔요.   정복동 : 아유 나는 기운이 없어요 이제. 아유 내 정신좀 봐. 차를 드린다 해놓구선.    정복동 어르신이 준비해 주신 구수한 차를 마시고 귤도 하나 까먹고, 또 손바닥에 쥐어준 커피사탕도 받아 계단을 내려오며 과거와 현재가 정복동 어르신 내면에서 생명력 있게 작동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 칼럼
    • 인터뷰
    • 3.1만세100주년
    2019-02-11
  • 3.1운동 100주년기념 인터뷰
    대한민국 역사상 짧지 않은 기간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그 시대를 살아낸 분들이 점차 귀해지는 시점에 2019년 3.1만세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양평토박이신문사에서는 양평지역내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갖고자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김옥순 :1931년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에서 태어나 서울(마포, 답십리)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여주와 양평지역에서 70여년 거주, 현재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 구둔역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옥순이는 참 이뻐, 언제 이렇게 언문을 배웠어?'' 이러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더라구요. 그게 얼마나 애절한 마음을 나타낸 거에요. 뭐 나를 봐서 눈물이 났겠어요. 어쩌다 한국사람이 한글도 마음대로 못 가르치고 속국이 되어 이러나 하는 마음에서였겠지요.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나도 눈물이 나요.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기자 : 일제강점기에 유년시절을 보내셨는데 기억나는 구체적 경험을 말씀해주시겠어요?   김옥순 : 제가 그때 아홉 살인지 열 살인지 좀 늦게 학교에 들어갔어요. 왕십리에 있는 배명소학교였어요. 지금은 배명중고등학교가 되었지요. 답십리에서 살았고 교통편이 별로 없던 때라서 왕십리까지 걸어다녔죠. 그때 고무밴드 공장이 있었던지 먼지구덩이, 쓰레기장 같은 곳을 지나 다녔어요. 그 길이 지름길이었거든요. 학교 가는 길에 고무밴드를 주워 손목에 걸고 다녔어요. 그 이후 전철이 다녀서 학교에 가려고 전철역에 줄을 섰어요. 그 당시 일본아이들은 짧은 주름치마를 입고 스타킹을 신고 테두리가 있는 아주 예쁜 까만 구두를 신고 단발머리에 가방을 딱 메고 다녔죠. 우리 조선아이들은, 그때는 조선이라고 했어요, 긴 검정치마에 자주저고리, 머리도 부성하고 보자기에 책을 메고 다녔죠. 우리가 먼저 와서 줄을 서잖아요. 그러면 일본 아이들은 나중에 와도 구두 신은 발로 여기를 차요(발목과 무릎 사이 정강이를 가리키며) 그럼 아주 아프지 그냥... 여기를 팍 차며 ‘’아따야로‘’하면 막 울면서 뒤로 갔죠. 어린 나이에도 울면서 생각했죠. ‘ 왜 우리가 일본아이들이랑 같이 살아서 이럴까’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걸 표현을 못했어요.   기자 : 그런 일이 있을 때 대응하거나 방어하는 한국 학생들은 없었나요?   김옥순 : 아니요. 아무도 그러지 못했어요. 맞고 울면서 길을 비켜주고 뒤로 가 줄을 섰어요. 속으로 억울하고 아파서 울어도 그렇게 할 줄을 몰랐어요.   기자 : 학교에서는 주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말을 했죠, 학교에서의 기억을 나눠주시겠어요?   김옥순 : 저는 외할아버지가 한문도 가르쳐주고 언문도 가르쳐줬어요. 그때는 한글을 언문이라 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한글을 깨치고 학교에 들어갔어요. 한번은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아주 어머니 같은 분이셨어요. (잠시 회상하듯이) 아주 인자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 . 그분이 애국자에요. 그때 한국말을 하면 막 혼이 났어요. 일본말을 잘 못해도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한글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어요. 어느 날 나를 불러내더니 ‘’옥순이는 참 이뻐. 언제 이렇게 언문을 배웠어?‘’이러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더라구요. 그게 얼마나 애절한 마음을 나타낸 거에요. 뭐 나를 봐서 눈물이 났겠어요, 어쩌다 한국 사람이 한글도 마음대로 못 가르치고 속국이 되어 이러나 하는 마음에서 그러셨겠죠.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나도 눈물이 나요.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기자 : 그 마음이 언제쯤 헤아려지던가요?   김옥순 : 애들 키우고 애들 학교 다닐 때는 몰랐어요. 애들 다 커서 내 곁을 떠나고 혼자 있을 때 문들 그 생각이 났어요.   기자 : 학교 분위기는 어땠나요, 혹시 일본인이 감시하거나 그런 일도 있었나요?   김옥순 : 배명소학교에서 여주로 이사와 북내에 있는 학교에 다녔어요. 시골이라 그런지 일본인이 감시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일본말을 잘 하면 사쿠라 뱃지를 하나씩 달아줬어요. 벚꽃이 일본 나무라는 말이 있어요. 되지도 않는 일본말을 열심히 배우려고 기를 쓰고 그랬죠. 누군가 조선말을 사용하면 서로가 ‘’얘 조선말 쓴대요.‘’ ‘’얘 조선말 썼어요.‘’서로가 그랬어요. 지금 같으면 안 그러지. 서로 숨겨주고 가려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기자 : 한참 성장기에 음식도 귀했을텐데 먹거리는 어땠나요?   김옥순 : 땅을 좀 사서 농사짓는데 벼농사를 지으면 다 뺏어갔죠. 밭작물도 맘대로 못 심었어요. 목화를 심어야 했어요. 전쟁의 막판으로 치달을 때였죠. 놋숟가락, 놋그릇까지 다 가져가고 농작물도 모조리 공출했어요. 학교 다니며 공부도 거의 못하고 모심고 풀베고 주로 일을 했지요. 먹을게 없어서 많이 주렸어요. 쑥을 캐다가 쌀을 요만큼(손바닥을 오므려 보이시며) 넣고 쑥을 많이 넣어 쑥밥을 해요. 이게 목에 걸려 넘어가질 않아서 토하곤 했죠. 감자를 심으면 감자가 클새가 없어요. 학교 갔다와 배가 고프니까 감자가 클새도 없이 캐어먹었죠. 배 많이 곯았어요. 여기(여주) 내려와서요.   기자 : 그럼 소학교 이전 더 어린 시기는 어디에서 보내셨나요?   김옥순 : 어려서는 함경북도 두만강 근처에서 살았어요. 거기에서 태어났어요. 일정 때 먹고 살기 힘들 때 만주 어디를 가면 땅도 거저 얻고 농사도 맘대로 짓고 산다고 했죠. 그 당시 양반들은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막노동은 꺼려했어요.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와 동네 청년이었던 아버지를 데리고 거기로 갔죠. 두만강 무산 삼장(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이란 곳에서 비단장사를 했어요. 어릴 때 기억이 생생해요. 가게를 아주 크게 차리고 각종 잡화가 많았죠. 두만강이 겨우내 얼었다 녹으면 집채만한 얼음이 위에서부터 엉켜서 내려와요. 강가에 있던 가게까지 얼음덩어리가 넘쳐서 가게 물건이 다 쓸려간 일도 있었어요. 외할아버지는 거기서 돌아가시고 이모는 두만강 근처 다리를 건너 중국으로 넘어가 아주 그쪽 사람이 되버렸죠. 지금도 두만강 그 푸르던 물이 기억에 생생해요.   기자 :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마포에서 잠시 살다가 답십리를 거쳐 여주까지 오신 거네요. 그리고 지금은 양평에 살고 계시구요.   김옥순 : 그렇지요. 두만강에서 가게가 몇 차례 떠내려온 얼음덩어리에 피해를 입고 마포로 왔던 거에요. 가게서 번 돈으로 집을 두 채 샀어요. 길가에 있던 집이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다 비키라고 하는 바람에 답십리로 갔어요. 그리고 여주로 와서 가장 고생이 심했죠. ‘일본 순사’라고 들어봤지요? 기다란 칼을 허리춤에 차고 무릎까지 오는 신발을 신었는데 걸으면 저벅저벅, 칼이 덜컹덜컹 소리가 나요. 저기만 오명 아이들이 ‘’얘 순사 온다‘’ 소리쳐요. 그러면 얼른 뛰어가 숨어요. 길을 가다 경찰서를 지나다 보면 기다란 막대기로 한국 사람들을 때리는 것도 봤어요. 우리 시대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에 이어 식민치하와 전쟁으로 고생이 많았어요.   기자 : 그 어렵고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에도 훈훈한 추억담이 있으시죠?   김옥순 : 그럼요, 주암에서 북내 학교까지 가려면 몇 십리는 족히 될 거에요. 아버지가 짚새기(짚신)를 삼아주면 그게 하루를 못가요. 게다(나막신)는 어찌나 발이 아프고 무거운지 몰라요. 나무 조각에 못 박아 놓으면 얼마 안 되어 끈이 다 벗겨져요. 불편하고 발 아파서 밤낮 벗어들고 맨발로 다녔죠. 그래서 내가 건강한 거 같아요. 어쩔 때는 달 보고 나가 해지고 깜깜해서 들어왔어요. 학교가는 길에 언덕을 지나며 ‘’우우~~‘’ 하고 신호를 보내면 ‘’우우~~~‘’ 하고 친구가 화답을 해요. 그러면 만나서 같이 학교에 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밤나무에 올라가 밤을 따먹고 놀았죠. 그 먼 길을 고생으로 안 알고 재미로 알았어요.‘’   기자 : 해방의 기쁨은 어떻게 누리셨는지 들려주세요.   김옥순 : 3학년 때 해방이 됐을 거에요.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인제 너희들 모도 안 심고 호미도 버리고 낫도 다 버려라. 해방이 되었다.‘’ 그러시죠. ‘’해방이 뭐에요?‘’ 그러자 ‘’일본놈들이 전쟁에 져서 다 쫓겨가 우리 이제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거야.‘’모두들 ‘’야 좋다 해방이다‘’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질렀어요. 내가 그때 열세 살인가 열네 살 때였어요.‘’   김은주 earlyhumming@naver.com
    • 칼럼
    • 인터뷰
    • 3.1만세100주년
    2019-01-21
  •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2)- 그래서 선거법개정이 필요해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2)- 그래서 선거법개정이 필요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란? 정당 지지율만큼 국회의원이 생긴다. 예를들어 국회의원이 300명일 때 한 정당이 3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면, 연동형 비례대표 국회의원 9명이 배출되는 방식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금처럼 노동자가 죽어가는 노동조건을 진정으로 노동자 편에서 대변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지난 6.13 지방선거도 있었지만, 군수든 군의원이든 한 명에게 표를 몰아줘야 된다는 “고민”이 있고, 실제로 연대를 하면 표가 분리되지 않고 당선될 확률이 높아진다. 야당이 둘로 나뉘어서 졌다는 말이 나온다거나, 삼자구도가 여당에세 유리하다는 분석이 당연했던 이유이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적용되면- 각 당에서 골고루 국회의원이 배출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소수정당인 야3당이 적극적이다. 국회의원을 300명으로 놓고, 3퍼센트면 9명, 5퍼센트면 15명, 10퍼센트면 30명의 국회의원이 비례로 되는 것이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 것이다.   승자독식 지금의 선거제도는 아무래도 1등이냐, 꽝이냐는 방식의 독점구도이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적용하면, 내가 찍은 사람이 1위 후보가 아니어도 한 표, 한 표가 유의미하다. 그야말로 소중한 한 표가 말이 아니라 현실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될 놈 찍는다거나, 하나로 밀어야지 갈라지면 죽는다거나, 그래서 결국은 양당구조가 되고 정치적 다양성이 사라져서 국민의 고충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무능국회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것이라 하겠다.   상상 이상의 연대 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막아보자는 것인지 민주당과 자한당이 손을 잡은 모양이다. 그걸 막자고 정의당 이정미 대표와 바른정당 손학규 대표가 국회에서 단식을 하고 있다. 벌써 일주일인지, 9일 정도 됐다. 손학규 대표는 소신을 위해 죽어도 좋다는 강력한 표현도 서슴치 않았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인데, 손학규 대표는- 촛불로 일어선 민주당이 촛불로 망한 자한당과 손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더민주당의 대선 공약이었다. 민주당이 집권을 한 이후에 말을 바꾼다는 비난을 면치 못 할 것으로 보인다.   양평에도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지지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런데 그냥 검은 것은 글자인 듯 내 삶과 연결되는 지점 없이 바람에 나부끼는 듯하다. 하지만 잠깐만 생각해보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되면 양평군에도 비례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양대정당에 이어 지지율이 5-10퍼센트 사이를 오가는 정의당의 경우,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된다면 15명에서 30명 이내의 비례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은 양평에 국한해서 생각해도 적지 않은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불러올 수 있다. 양평에만 국한해서 생각해도 진보 대 보수라는 양대구도가 훅- 무너지고? 무조건 큰 정당은 살고, 작은 정당은 맥을 못 추는 경향도 희박해질 것으로 보인다. 즉, 다양성이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양하면 그 중에는 노동자가 노예가 아님을 법으로 보여주거나, 농민을 국가의 근간으로 보고 농민에게 정당한- 독일처럼 년 2000만 원 이상- 연봉을 지불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회의원도 나올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일 하다 죽는 나라, 더는 볼 수 없다면- 휘날리는 현수막 속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가슴으로 받았으면 좋겠다. 총총
    • 칼럼
    • 칼럼
    • 칼럼
    2018-12-15
  •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1)- 누구를 위한, 누구의 나라일까?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1)- 누구를 위한, 누구의 나라일까?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일 하다 죽는다. 일 년이면 백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일 하다 죽는다. 이들은 대부분 통계에도 적용되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다. 그런 가운데 한 청년노동자의 죽음이 통계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그림자의 실체는 바로 ‘당신’의 아들이다. 어머니도 모르는 참혹한 노동 조건 속에서 당신의 아이들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의 참혹한 죽음- 입사 두 달 만에 숨진 청년노동자 김용규 씨는 24세이다. 김용규 씨는 사망했지만, 그리고 이미 여러 명의 서부발전 소속 노동자들이 일하다 죽었지만- 정작 태안화력발전소는 정부로부터 무재해 사업장으로 인정받고 산재보험료 20여 억 원을 감면받았다. 김용규 씨가 태안화력발전소 소속이 아니라 외주업체인 서부발전 소속이기 때문이다.   외주화는 민영화의 산물이다. 서구의 파트타임을 흉내 내서 비정규직이라는 실로 기상천외한 노동자 학대를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그보다 한 수 위인 외주화에 이르렀다. 그런 것이 아니어도 이미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급여는 박하기 그지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은 “아래것”들에게 시키면서 박한 처우와 고용불안을 강요하는 신분제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를 보는 듯한, 일제 강점기를 보는 듯한, 아니면 군부독재시절을 보는 듯한, 통칭 보수정권시절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전체에서 10퍼센트만 벗어나면 다들 형편은 비슷하다. 10퍼센트가 우리 재화의 90퍼센트를 쥐고 있다는 통계들이 있다. 100명 중 90명의 사람들은 100개의 재화 중 단 10여개만으로 나눠야 한다. 이런 이상한 상황은 이미 민란이 일어나고도 넘어야 하는 통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못살겠다고 일어난 민란은 정치권력의 교체만 가져왔을 뿐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역대 어느 정권도 바로 이런 신분제 같은 노동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이런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가진자들과 권력이 절대로 소득을 나누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박정희가 선성장, 후분배를 구호처럼 외쳤지만- 이미 세계경재 10대국이라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선성장 중이다.   앞으로도 후분배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귀족, 사대부와 양반층이 굳이 노비를 해방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역사적으로 놀랍게도 양반층이랄 수 있는 사회 지도층이 신분을 내려놓은 사례는 있다. 그것이 바로 3.1 만세를 폭발력 있는 대중운동으로 확산한 물밑정서라고 생각한다. 임시정부 헌법이 말하듯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3.1만세 정신을 모르고 있다. “우리”가 권력의 주체라는 것을 모르고, 아직도 신분제가 사라진 줄 모르고 있는 귀족 양반 사대부들한테 90퍼센트를 상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노예처럼.   자신이 주인인 걸 모르는데, 누가 주인대접을 해주겠는가? 그러니 선성장은 있어도 후분배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월급이 신분인 대한민국에서 대부분 월 200만원 이하의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은 주인인지, 아닌지를 따질 시간도 없이 살고 있다. 그리고, 내 자식이 그보다는 더 많이 받는다고 딱히 좋아할 일도 아니다. 대부분의 하급직들은 여전히 상전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 돈 주는 사람은 규모에 상관없이 귀족이고자 한다.   어쨌거나 사람이 일을 하다가 죽고 있다. 해마다 150명 안팎이다.- 일 하다 죽는 나라, 대한민국. 사회적 통계 상 90퍼센트의 국민이 그런 삶을 강요받고 있다고 해도 허언이 아닐진대,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누구의 나라라는 것일까?   조선만 해도 양반은 노비를 때리고, 가두고, 죽일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법으로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사용자들은 노동자 노비들을 일 하다가 죽게 만들고 있다. 일 하다 죽는 노동자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은 여전히 신분제사회일 뿐, 민주주의도 민주공화국도 아니다.
    • 칼럼
    • 칼럼
    • 칼럼
    2018-12-15

실시간 칼럼 기사

  • 양평군의회 행정사무감사 참관기// “그린 뉴딜이 뭐예요?
      양평군에서는 .6월 2일부터 17일 간 제 279회 양평군의회(의장 전진선) 제 1차 정례회가 열리고 있다. 조례심위, 예결산심위에 이어 7일부터 7일 간 행정감사가 실시된다. 7일 월요일 행정감사에서는 윤선옥 의원의 그린 뉴딜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2020년 7월 14일, 문재인 정부는 코로나 이후 경기회복을 위해 마련한 국가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2025년까지 디지털 뉴딜, 그린 뉴딜, 안전망강화라는 3개 축을 마련하여 분야별 투자 및 일자리 창출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5년 간 170조라는 예산을 세운 한국판 뉴딜정책이 발표되자 관련주가가 2달 새에 27% 상승하기도 했다.   2019년 바이러스가 전지구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세계는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뉠 거라는 전망을 쏟아냈다. 공중파를 통한 일부 관측으로는 우리나라가 세계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호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학자들이 기후위기, 바이러스, 비대면사회로의 전환, 비대면사회와 과학의 발전(스마트사회)를 진단했고, 한편에서는 기본소득이 사회적 화두로 부상하기도 했다. 기본소득의 보편적지급과 선택적지급은 재난지원금을 모든 국민에게 줄 것인지 아니면 선택적으로 지급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확산되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 7월 14일 발표된 5년간 170조 예산의 그린 뉴딜 정책은 그 모든 대안과 논의와는 별도로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정부인 양평군 행정감사장에서 나온 “그린 뉴딜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담담했지만, 날카로웠던 셈이다.   정부가 말하는 그린 뉴딜은 도시, 공간, 생활 인프라를 녹색 전환 한다는 것이다. 국민생활과 밀접한 공공시설의 제로에너지화, 국토 해양 도시 녹색 생태계 회복, 물 관리체계 구축이 주된 사업 내용이다. 이 정책이 시행되면- 전기차 수소차 공급, 태양광사업, 자동차 드론사업, 사물인터넷사업, 지능형정부, 스마트의료 등의 사업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양평에서 체감할 수 있는 것은 에너지관련 태양광사업, 비대면으로 진행될 수 있는 시스템구축, 도심숲, 드론사업, 온라인 상품판매 등일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양평군 그린 뉴딜 100대 사업을 보면 가장 많은 예산이 책정된 것으로 ‘신재생에너지보급’이 있고, 건강놀이터나 에너지제로화 리모델링, 문서 스마트 시스템, 정원사업, 산림기반형 일자리창출, 미세먼지, 그린뉴딜 도시재생 등등이 있다. 대부분 기사업으로 진행되던 것들이고, 그린 뉴딜과 성격이 맞는 것으로 각 부서에서 선별하고 모아서 100대 사업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다시, 양평군 행정감사장에서 나온 질문을 떠올려본다. “그린 뉴딜이 뭐예요?” 양평군은 이 질문에 그린 뉴딜의 본래 목적이라고 하는 경기회복에 지역을 담아 양평경기회복이라는 결과로 답해야 할 차례인 것 같다.    
    • 칼럼
    2021-06-09
  • 양평군의회 행정사무감사 참관기// “그린 뉴딜이 뭐예요?
      양평군에서는 .6월 2일부터 17일 간 제 279회 양평군의회(의장 전진선) 제 1차 정례회가 열리고 있다. 조례심위, 예결산심위에 이어 7일부터 7일 간 행정감사가 실시된다. 7일 월요일 행정감사에서는 윤선옥 의원의 그린 뉴딜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2020년 7월 14일, 문재인 정부는 코로나 이후 경기회복을 위해 마련한 국가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2025년까지 디지털 뉴딜, 그린 뉴딜, 안전망강화라는 3개 축을 마련하여 분야별 투자 및 일자리 창출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5년 간 170조라는 예산을 세운 한국판 뉴딜정책이 발표되자 관련주가가 2달 새에 27% 상승하기도 했다.   2019년 바이러스가 전지구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세계는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뉠 거라는 전망을 쏟아냈다. 공중파를 통한 일부 관측으로는 우리나라가 세계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호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학자들이 기후위기, 바이러스, 비대면사회로의 전환, 비대면사회와 과학의 발전(스마트사회)를 진단했고, 한편에서는 기본소득이 사회적 화두로 부상하기도 했다. 기본소득의 보편적지급과 선택적지급은 재난지원금을 모든 국민에게 줄 것인지 아니면 선택적으로 지급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확산되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 7월 14일 발표된 5년간 170조 예산의 그린 뉴딜 정책은 그 모든 대안과 논의와는 별도로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정부인 양평군 행정감사장에서 나온 “그린 뉴딜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담담했지만, 날카로웠던 셈이다.   정부가 말하는 그린 뉴딜은 도시, 공간, 생활 인프라를 녹색 전환 한다는 것이다. 국민생활과 밀접한 공공시설의 제로에너지화, 국토 해양 도시 녹색 생태계 회복, 물 관리체계 구축이 주된 사업 내용이다. 이 정책이 시행되면- 전기차 수소차 공급, 태양광사업, 자동차 드론사업, 사물인터넷사업, 지능형정부, 스마트의료 등의 사업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양평에서 체감할 수 있는 것은 에너지관련 태양광사업, 비대면으로 진행될 수 있는 시스템구축, 도심숲, 드론사업, 온라인 상품판매 등일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양평군 그린 뉴딜 100대 사업을 보면 가장 많은 예산이 책정된 것으로 ‘신재생에너지보급’이 있고, 건강놀이터나 에너지제로화 리모델링, 문서 스마트 시스템, 정원사업, 산림기반형 일자리창출, 미세먼지, 그린뉴딜 도시재생 등등이 있다. 대부분 기사업으로 진행되던 것들이고, 그린 뉴딜과 성격이 맞는 것으로 각 부서에서 선별하고 모아서 100대 사업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다시, 양평군 행정감사장에서 나온 질문을 떠올려본다. “그린 뉴딜이 뭐예요?” 양평군은 이 질문에 그린 뉴딜의 본래 목적이라고 하는 경기회복에 지역을 담아 양평경기회복이라는 결과로 답해야 할 차례인 것 같다.    
    • 칼럼
    2021-06-09
  • 논평 131주년 세계 노동절을 맞이하며
    [논평] 131주년 세계 노동절을 맞이하며    세계 노동절이 131주년을 맞는다.  먼저 오늘도 힘겨운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전 세계 노동자들에 연대와 지지의 인사를 전한다.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날이지만,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을 돌아보면 걱정과 불안이 앞선다.    대한민국에서 2020년 한 해에만 산재로 882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고, 지금도 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위협받고 있으며, 산재 사망률 역시 OECD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에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되어 2022년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그마저도 법적 허점과 사각지대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또 비정규직 문제와 플랫폼 노동자 처우 문제 등 너무도 많은 문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노동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노동자의 권리와 고용을 보장하고 과감한 노동 개혁을 실현시켜야 한다.    촛불로 세워진 현 문재인 정부가 노동자의 권익 수호를 위해 만들어진 세계 노동절의 의미를 되새기고, 얼마 남지 않은 임기동안 노동 개혁의 의지를 보이길 촉구한다.    정의당 경기도당도 노동이 당당한 나라,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끝까지 싸워나가겠다.     2021년 4월 30일   노동의 희망 시민의 꿈 정 의 당 경 기 도 당
    • 칼럼
    • 칼럼
    2021-05-03
  • ‘정동균 양평군수 민선7기 취임 2주년’
          - 광범위한 네트워킹으로 ‘서울~양평 고속도로’, ‘세미원 지방정원 1호 등록’, ‘양동 산업단지 조성’ 등 주요현안사업 성공적으로 풀어나가 - 후반기 정책방향은 ‘자연(강·산·들), 사람(복지·교육·안전),도시(스마트·친환경·경제)가 함께 하는 그린뉴딜 양평’    “양평군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지난 2년 동안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앞으로도 군민을 등에 업고 양평군 발전을 위해 뛰겠습니다. 민선7기의 연착륙을 위해 함께한 관내 기관단체와 군민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1천 5백여 명의 양평군청 공직자와 군민을 잘 섬기고 따뜻한 동행에 앞장설 것입니다. 군민 여러분의 행복은 자랑스러운 우리 ‘양평군’이기 때문입니다” 오는 7월로 양평군수 취임 2년을 맞는 정동균 군수가 소회를 밝혔다. ‘바르고 공정한 행복한 양평’을 군정비전으로 2018년 7월 민선 7기의 닻을 힘차게 올렸던 정동균 양평군수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변화를 기회로 환경과 사람이 중심이 되는 양평형 그린뉴딜정책을 후반기 정책방향으로 설정하고 군정 전반을 새롭게 혁신하고 있다.   민선7기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양평군의 지난 2년은 각종 규제와 제한 속에서도 전방위적인 네트워킹을 통해 양평군의 발전상을 확립하고 ▲소통과 참여의 공정도시 ▲풍요롭고 활력있는 스마트도시 ▲살기 좋고 쾌적한 건강도시 ▲미래의 꿈과 희망을 약속하는 교육도시 ▲모두가 함께 누리는 행복복지도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문화예술, 관광도시 등의 6대 부문별 목표를 바탕으로 전국적으로 내세울 만한 성과를 일궜다.   ◎ 인구, 예산의 양적 성장 일궈 인구는 2020년 5월 31일 기준 11만 8,914명으로 2년전 대비 1,415명이 증가했고, 예산은 8,100억원으로 2018년 대비 32.4%인 1,980억원이 증가했다.   이는 전국 군 단위 중 두번째의 예산규모로 교육부문에서 226% 증가, 산업·중소기업 부문에서 148% 증가, 국토·지역개발 부문에서 125% 증가, 안전 부문에서 89%가 증가하는 등 전 부분에 걸쳐 예산이 증가했다.   ◎ 소통과 협력을 군정의 동력으로 삼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언제나 소통과 협력을 강조한다.   타운홀 미팅, 행복한 양평 만들기 100인 토론회, 소통공감 ‘톡톡!카페’ 운영, 온라인 군민청원제 ‘양평콕콕청원’ 개설 등 주민과의 소통을 위한 다양한 창구를 마련했다.   양평청년사이다와 주민참여예산제를 정착시키고 어울림공동체 활성화, 지속가능한 민관협치 기반을 조성하는 등 군정의 동력이 되는 주민과의 소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 전방위적인 네트워킹으로 주요사업 해결해나가 정 군수는 네트워킹 군수라고도 불린다.   국회, 중앙부처, 교육부, 경기도청 등 어느하나 가릴 것 없이 끊임없이 네트워킹을 하고 양평군 역점사업을 위한 로비활동을 전개해왔다.   그 결과 양평군의 숙원사업 중 하나였던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이 19년 정부 예타 대상으로 선정돼 20년 5월에 발표된 국토교통부 신도시 광역교통개선대책에 23년 개통되는 것으로 발표가 됐다.   또한, 양평~이천 제2순환 고속도로 4공구 공사 착공과 양근대교 4차로 확장사업에 대한 기본·실시설계용역 착수, 국도 37호선 일괄예비타당성 조사 포함 등 대규모 교통인프라 숙원사업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양동 산업단지 조성 업무협약을 체결해 23년에 6만여 제곱미터 규모의 양평군 최초의 일반사업단지가 조성 될 예정이며, 특별교부세, 특별조정교부금, 지역균형발전사업 공모사업에서 152개 사업 1천413억 원의 국·도비를 확보했다.   ◎ 모두가 함께 누리는 건강·교육·행복복지도시 올해 초 불청객으로 찾아온 코로나19로 인해 양평군을 비롯한 전국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 천마스크 제작 자원봉사단 천군마마를 발족해 3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은 천마스크를 직접 제작해 군민들에게 전달했고, 사회단체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원봉사를 자처했다.   군에서는 빈틈없는 방역을 위해 24시간 근무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학교에 열화상 카메라 설치, 선별진료소 운영, 자가격리자 관리와 양평군 재난기본소득 141억원을 포함해 총 546억원을 군민들에게 지급했다.   혁신교육지구사업 추진, 학교환경개선사업, 학교교육협력사업, 평생학습도시 활성화 등 양평의 미래에 투자했으며, 청소년 활동지원, 청소년 문화의 집 건립 등 청소년의 꿈과 끼를 마음껏 펼치는 장들을 마련했다.   ◎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예술·관광도시 세미원의 경기도 지방정원 제1호 등록은 민선7기 상반기 문화예술분야의 가장 돋보이는 성과가 아닐까 싶다.   이와 함께 뮤지엄 허브 양평을 통한 지역문화 향유권 확대와 양강문화플랫폼 조성 및 쉬자파크와 헬스투어를 내실있게 운영했고, 양서에코힐링센터 건립 등 스포츠인프라 구축과 G-스포츠클럽 운영 등 건전한 체육활동을 통한 군민의 행복지수 증대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양평의 소중한 자산인 세미원은 23년까지 국가정원으로 승격시킬 계획이다.   - 자연, 사람, 도시가 함께 하는 그린뉴딜 양평 - 양평군의 민선7기 남은 2년 후반기의 정책 방향은 <자연, 사람, 도시가 함께하는 그린 뉴딜 양평>이다.   지난 5월, 문재인 정부에서는 코로나19가 지나간 이후 새로운 일상 및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따른 한국판 뉴딜정책을 발표했다.   한국판 뉴딜정책의 핵심은 일자리 창출 및 경제혁신으로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환경과 사람이 중심이 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양평형 그린뉴딜정책을 후반기의 정책방향으로 설정했다.   양평은 전체 면적의 95% 이상이 녹지지역으로 그린뉴딜정책의 최적지다.   팔당호 수질정책 특별대책지역 등의 규제를 기회로 건강한 양평군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정부의 친환경, 녹색도시 관련 정책확대 및 스마트시티 기술 사용화에 따른 저비용, 고효율 도시관리체계를 마련하고, 자급자족의 기본이 농업 분야에 지구온난화 등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안정적인 농업생산성을 확보해 나간다는 구상이다.   ◎ 자연과 함께 하는 뉴딜 첫번째는 자연과 함께하는 뉴딜이다.   강과 산, 그리고 들을 이용한 사업들을 통해 풍요롭고 활력있는 스마트한 문화예술, 관광도시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강을 이용한 사업으로는 세미원, 두물머리 수변생태 관광지를 조성해 2022년 세미원을 국가정원으로의 등록을 추진한다.   수변공간을 활용해 군민의 여가 활용 및 관광객 유입을 위해 녹지공간 확충, 수변공간 접근성 강화, 친수공간 조성 및 수변공간 공공목적 활성화, 체육시설 설치 및 걷기코스 조성을 통해 친수생태도시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다음은 산을 이용한 사업으로 산림경영기반 4.0 구축을 통해 양평군 산림사업 활성화를 추진한다.   또한, 포스트 코로나시대 언택트(비대면, 비접촉) 문화관광산업인 실외에서 힐링하는 관광코스 개발에 집중해 헬스투어와 물소리길 코스를 확대하고 숲공원 조성 및 발굴과 마을별 숨어 있는 힐링코스 발굴 공모 등을 실시할 계획이다.   들을 이용한 사업으로는 토종씨앗은행을 설치.운영하고 농업종합분석센터 설립과 청년 창업농 및 귀농인을 적극적으로 육성해 지역 청년 일자리를 창출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친환경농산물 온라인 판매시스템을 구축 등을 통한 안정적인 친환경농산물 판로개척을 통해 친환경농업특구의 재도약을 구상하고 있다.   ◎ 사람과 함께 하는 뉴딜 두번째는 사람과 함께하는 뉴딜이다.   복지와 교육, 그리고 안전분야에 대한 체계적인 투자와 지원으로 살기 좋고 쾌적한 건강도시, 미래의 꿈과 희망을 약속하는 교육도시를 만들고자 한다.   복지분야로는 아이 키우기 좋은 양평을 위해 어린이 놀이시설과 건강서비스 인프라를 확충하고 육아종합지원센터와 온종일 돌봄센터 등을 운영한다.   또한, 치매안심센터 운영과 민간기업 노인일자리사업 도입, 수요중심형 경로당 프로그램의 확대 및 다양화 등을 통해 초고령사회를 대비한 고령친화환경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다음은 교육분야로 혁신교육지구 시즌3 도입으로 양평 혁신교육지구를 정착 및 확대하고 특성화고 및 특성화 학과를 개설 및 활성화해 미래교육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고, 국내대학 연계 특성화학과 운영을 통해 정원관리학과, 크리에이터학과, 청년창업학과 등 양평만의 콘텐츠로 군민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과정을 신설해 지역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안전분야는 코로나19 유사 감염병 관리를 위해 방역 및 대비체계 강화, 전문가 양성, 지역사회 민관협력체계를 구축해 주민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고, 친환경자동차 이용과 자동차 배출가스 줄이기, 스마트팜 확대 등으로 기후변화 및 미세먼지를 적극 대응해 군민 건강 지키기에도 만전을 기할 예정이다.   ◎ 도시와 함께 하는 뉴딜 세번째는 도시와 함께하는 뉴딜이다.   스마트도시와 친환경도시, 그리고 경제도시 건설을 통해 군민이 주인인, 군민이 잘사는, 군민이 행복한 바르고 공정한 행복한 양평을 달성하려 한다.   스마트도시 건설을 위해 거점중심 네트워크형 도시재생을 통해 거점중심 네트워크형 도시개발, 스마트시티 기법 활용 도시 인프라 확충, 도시재생기법을 활용한 도시관리계획을 추진하고, 스마트시티 통합플랫폼 구축으로 스마트도시 안전망을 구축해 도시관리 사각지대를 해소한다는 구상이다.   다음으로 친환경도시 건설을 위해 친환경자동차 공유시스템 도입, 친환경자동차 보급 확대 및 인프라 구축, e-모빌리티 인프라 구축 및 이용 활성화를 추진해 친환경 교통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양평형 킨포크(자연친화적이고 건강한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사회현상)라이프스타일 정립을 통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발굴하고 실행해 귀촌자 유입, 관광방문자 증대 등으로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경제도시 건설을 위해 지역상인주도 전통시장을 활성화를 위해 상인 스스로 고객을 유도하기 위한 대안과 아이디어를 개발할 수 있도록 상권 르네상스, 청년상인창업센터, 특성화 첫걸음 시장 육성사업 등을 추진한다.   양평읍과 양서면, 용문면 3개소에 청년창업공간을 조성해 외식산업 인큐베이팅, 청년 열린복합공간 운영, 청년 크리에이터 창업 지원, 청년창업가 양성 및 지원을 추진 등 청년 일자리 지원정책을 강화해 지역성장동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민선 7기 후반기 2년에는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대비해 녹색환경 조성과 동시에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는 양평형 그린뉴딜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이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바르고 공정한, 행복한 양평’ 달성을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칼럼
    2020-06-24
  • [기고]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의의(上)
    [기고]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의의(上)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3~5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3.1운동은 신분, 사상, 종교를 넘어선 우리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투쟁이었다. 또한, 3.1운동은 4월 11일 임시정부 설립으로 이어졌고 비로소 헌법이 만들어지게 됐으며, 헌법에는 모든 권력의 주체가 국민임이 명시됐다.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3.1운동은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3.1운동은 종교를 넘어서,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신분을 넘어서 하나가 된 일대 거사라고들 한다. 3.1운동 이후인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정부는 헌법을 제정하고, 헌법에는 그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지향했던 나라, 조선이 원했던 나라가 명시돼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 그런데 과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이 가슴에 절절하게 다가올지는 알 수 없다. 100년 전에는 어떠했을까? 당시에 거리에 나와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 일본헌병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2천만 우리 국민들은 총칼 앞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500여명이 넘게 죽고, 2만여 명 가까이 부상을 입었는데도 3월에서 5월까지 계속 됐다. 무엇이 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총칼의 위협을 넘어서게 했을까? 1910년 황제가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넘기더니, 일본이 왕이 돼 거리에서, 학교에서, 사람이 모이는 모든 곳에서 걸핏하면 잡아가고, 죽이고 때린다. 쌀도 빼앗고, 산에서 긁어다 때던 나무도 빼앗고, 농사에 필요한 물도 빼앗는다. 나중에는 말도 빼앗고, 이름도 빼앗았고, 거의 모든 물자를 빼앗더니 문화 또한 착실하게 뭉개버렸다. 그렇게 10년을 살았는데, 나라를 내 준 황제가 죽었고, 황제가 준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국민이 일어섰다. 독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황제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고 선언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3.1운동은 위대한 평민의 거사였다. 한 줌도 안 되는 양반의 세상에서 90퍼센트의 평민이 상놈이 아니라 국민이 되기 위한 거사였다. 대한독립만세는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는 말의 다른 버전이었다.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를 원했던 평민의 외침. 민주주의를 원했던 평민의 바람이 일으킨 폭발력이 전국으로, 전 세계 모든 동포에게로, 그리고 3월에서 5월로,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반상을 뒤집은 평민들이 선언한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독립선언서 첫 문장의 키워드는 그래서 ‘독립’과 ‘자유’다. 마치 현재완료형처럼 자유민들은 독립이 됐다. 독립된 나라는 정부가 있고, 헌법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여느 나라처럼 군대도 만들고, 행정부도 만들고, 국회도 만든다. 국회는 최초로 헌법을 만들어서 제일 앞장에 반상이 아닌 국민의 정부임을 명시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주인이 바뀌고, 그것이 법으로 인정됐던 것이다. 3.1운동의 위대함은 평민의 거사였다는 점과 실제로 상해임시정부와 헌법제정을 통해 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독립기념일이다. 이러한 3.1운동에는 숨은 주역들이 있다.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신한청년당을 조직해서 파리로 보내고, 동포들이 있는 곳곳으로 보내 김규식을 응원하자고 제안한다. 3.1거사의 기폭제 역할을 한 몽양 선생과 신한청년당은 100주년을 맞으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손병희 선생도 있다. 선생은 국내 3.1거사의 여러 계통성을 하나로 통일시킨 주역이다. 자본금도 거의 선생한테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2017년 만주 길림에서 조소앙 선생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의 바탕엔 바로 평민들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결연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결과적으로 3.1운동의 진정한 주역이 되었다.1919년 위대한 평민들의 독립과 자유의 함성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고, 2019년 100주년을 맞이했다. 100년 전 독립을 원했지만 아직도 반쪽인 우리는 이제 평화의 새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끝 하보균 양평 3.1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칼럼
    • 칼럼
    • 칼럼
    2019-03-06
  • 길위에서 만난 사람
    인터뷰 [길위에서 만난 사람]은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가 '삶'이라는 길 어디쯤에 있고 각자 걷고 있는 길이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지금 꽃길을, 누군가는 신작로를, 또다른 누군가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중일지도 모른다. 3.1운동 100주년기념 4차 포럼에서 이성한 씨를 만났다. 어쩌다보니 나란히 함께 안내를 하게 되었다. 함께 하다 보니, 그가 젊은 나이에 병고(病苦)라는 터널을 막 통과한 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의 얘기가 듣고 싶어 인터뷰를 청했다.
    • 칼럼
    • 인터뷰
    • 길위에서만난사람
    2019-03-05
  • 3.1운동 100주년기념 인터뷰
    3.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두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양평군 토박이 정 복동 어르신입니다. 1930년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배잔 마을에서 태어나 결혼 전까지 그곳에서 사셨고, 해방 후 결혼하여 보금자리를 튼 양평읍에서 현재까지 거주중입니다.      기자 : 양평군 토박이라 들었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나셨나요?    정복동 : 나는 대평리에서 태어났어요. 대평리 알죠? 작은 오막살이에서 태어났어요.    기자 : 그럼요, 대평리 잘 알죠. 대평리에서 어린 시절 겪었던 기억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정복동 : 우리 어머니가 딸만 넷을 낳고 다섯째로 아들을 낳으면 저 동산에 가서 춤을 추겠다 그러셨대요. 그리곤 동생이 태어났죠. 그때 나는 멀리 밭에 일하는 아버지한테 점심도 갖다 드리고 새참도 나르고 그랬어요. 어느 날, 아버지에게 참을 날라다 주고 집에 오니까 울어머니하고 동생하고 마루에 걸터앉아 울고 앉았어. 왜 우냐고 하니까 동생이 밥을 먹고 싶은데 죽을 주니까 먹기 싫다고 울고 있다 하더라구요. 동생은 먹기 싫다고 울고 엄마는 그런 동생이 안되서 울었던 거야.    기자 : 그때 몇 살이셨죠, 동생과는 몇 살 터울이었나요?    정복동 : 나는 그때 열세 살쯤 됐을 거에요. 동생이랑은 여섯 살 터울이었어요. 그 동생이 얼마 전 저세상으로 갔어요.   기자 : 그러셨군요... .... 대평리에서 농사를 지으셨나요?    정복동 : 그럼요, 농사를 지으면 배급을 줘요. 친구는 콩깻묵을 받았는데, 나는 그걸 못 받아서 그땐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기자 : 콩깻묵이요?    정복동 : 네, 콩기름을 짜고 남은 게 콩깻묵인데 친구가 먹으라고 줘서 막상 먹어보면 아주 못 먹겠더라구요. 농사를 지어도 죄다 뺏어가니까 곡식을 감춰요. 죽담이라고 담장 뒤에 독을 묻고 거기에 곡식을 감춰요. 그러면 일본 앞잡이들이 쇠꼬챙이로 담벼락을 푹 쑤셔요. 그럼 흙담이 쑥 들어가거나 독에 묻지 않은 곡식이 쏟아져 나와요. 그럼 다 뺏어갔죠.    기자 : 콩이나 조, 수수 같은 곡식도 농사짓고 또 어떤 작물을 농사지으셨어요?    정복동 : 그때 왜정 때 목화를 심으래요. 목화를 심어서 공출을 해라 그래요. 그러고 나서 목화 나무껍데기를 삶아서 벗겨 바치면 돈 얼마 주고 그랬죠. 얼마나 일본에 들볶였는지 나는 해방이 되어야 시집가겠다 그랬어요. 해방이 안 되면 시집가지 않을 거다 그랬어요. 지금 이 집이 내가 시집온 곳이에요. 나는 진짜 말대로 해방되고 열아홉에 시집왔어요.    기자 : 애써 농사를 짓고서도 뺏길까봐 곡식을 숨기고, 정작 가족들이 배곯고 고단했는데 어떻게 인내하며 사셨는지 말씀해 주셔요.    정복동 : 어머니가 봄이 오면 칼나물을 논두렁에 가서 해와요. 나물을 넣고 밥을 비비면 어머니가 얼른 수저를 놓아요. 나 많이 먹으라고... (한참 있다가) 우리 어머니가 막내 낳을 적에 내가 쌀을 퍼서 몰래 바가지에 감추어 두었어요. 어머니 해산밥 해주려고.    기자 : 그 힘들고 배고팠던 때 어린나이에 참 철이 들었네요.    정복동 : 네, 어머니가 옷이 없어 날마다 행주치마를 빨아 입는 걸 보고 내가 시집가면 어머니 옷 한 벌 해드려야지 그랬어요. 손이 다 닳도록 일을 했죠. 다리방아 아시지? 보리를 다리방아로 찧어 마당에 말렸다 까불러 벗겨야 밥을 해먹어요. 그럼 손이 다 닳아요. 그때 어머니가 힘들까봐 안타까워서 내가 다 방앗간으로 날랐어요. 불을 화르륵 때면 방이 뜨뜻해야 하는데 서늘해지면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시집가면 우리 어머니 뜨뜻하게 살게 해드려야지.’    기자 : 어머니의 자식사랑이 극진하여 또 자녀들의 어머니 사랑도 애틋했나 봐요.   정복동 : 동생이 학교에 갈 때 어머니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생 모습이 모퉁이 뒤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서야 집에 돌아와 밥을 자셨어. 한 삼십분이 지나도록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서 계셨어. 대평리에는 과부 딸이랑 외딸(외동딸)만 학교에 다녔어요. 나도 얼마나 학교에 다니고 싶었는지 몰라요. 언니랑 나랑 그때 일본어를 배우면 내가 금세 깨우쳤어. 나를 공부 시켰으면 참 잘했을 거야. 그때 학교에는 못 다녀도 검은 양말(검은 스타킹)이 너무 신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짚새기(짚신)를 삼아 달라 그랬어. 설날에 명으로 지은 새옷을 입고 짚신을 곱게 삼아서 신고 나갔다 오니 양말 뒤꿈치가 다 구멍이 났어(말씀하시며 소녀처럼 까르르 웃으심^^)   기자 : 일본이 식량을 공출시키고 다른 노역도 시켰을 텐데 대평리에서는 어땠나요?   정복동 : 가마니를 치라고 배당을 줬어요. 우리는 농사를 짓는다고 100장이 분담이 돼요. 면에서는 밤에 일할까봐 조사가 나와요. 할머니가 들킬까봐 까만 치마를 두르고 빛이 새나가지 않게 일을 했어요. 언니하고 나하고 같이 하루 종일 일해도 가마니 세 짝밖에 못 짜요, 나는 매달린 채 배고픈 채로 일을 해요. 가마니를 다 짜면 아버지가 꿰어서 마무리를 지어요. 그럼 1등, 2등, 3등까지 차별적으로 돈을 줘요. 그걸 지고 대평리에서 지평에 가요. 그때는 차도 없어서 걸어서... ... 아버지가 불쌍해요. 우리 아버지 세 살 먹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우리 할머니가 과부로 아버지를 키우셨어. 할머니가 이천이 친정인데 잘 살아서 아버지에게 돈을 줘서 대평리에 땅을 샀지.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일만 하니까 농사짓는 거밖에 모르셨지.   기자 ; 정복동 어르신의 일제 강점기 살아온 얘기를 듣다 보니 가족에 대한 안쓰러움과 애틋함,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 느껴져요. 지금도 참 고우시고 건강해 보이셔요.   정복동 : 아유 나는 기운이 없어요 이제. 아유 내 정신좀 봐. 차를 드린다 해놓구선.    정복동 어르신이 준비해 주신 구수한 차를 마시고 귤도 하나 까먹고, 또 손바닥에 쥐어준 커피사탕도 받아 계단을 내려오며 과거와 현재가 정복동 어르신 내면에서 생명력 있게 작동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 칼럼
    • 인터뷰
    • 3.1만세100주년
    2019-02-11
  • 3.1운동 100주년기념 인터뷰
    대한민국 역사상 짧지 않은 기간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그 시대를 살아낸 분들이 점차 귀해지는 시점에 2019년 3.1만세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양평토박이신문사에서는 양평지역내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갖고자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김옥순 :1931년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에서 태어나 서울(마포, 답십리)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여주와 양평지역에서 70여년 거주, 현재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 구둔역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옥순이는 참 이뻐, 언제 이렇게 언문을 배웠어?'' 이러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더라구요. 그게 얼마나 애절한 마음을 나타낸 거에요. 뭐 나를 봐서 눈물이 났겠어요. 어쩌다 한국사람이 한글도 마음대로 못 가르치고 속국이 되어 이러나 하는 마음에서였겠지요.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나도 눈물이 나요.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기자 : 일제강점기에 유년시절을 보내셨는데 기억나는 구체적 경험을 말씀해주시겠어요?   김옥순 : 제가 그때 아홉 살인지 열 살인지 좀 늦게 학교에 들어갔어요. 왕십리에 있는 배명소학교였어요. 지금은 배명중고등학교가 되었지요. 답십리에서 살았고 교통편이 별로 없던 때라서 왕십리까지 걸어다녔죠. 그때 고무밴드 공장이 있었던지 먼지구덩이, 쓰레기장 같은 곳을 지나 다녔어요. 그 길이 지름길이었거든요. 학교 가는 길에 고무밴드를 주워 손목에 걸고 다녔어요. 그 이후 전철이 다녀서 학교에 가려고 전철역에 줄을 섰어요. 그 당시 일본아이들은 짧은 주름치마를 입고 스타킹을 신고 테두리가 있는 아주 예쁜 까만 구두를 신고 단발머리에 가방을 딱 메고 다녔죠. 우리 조선아이들은, 그때는 조선이라고 했어요, 긴 검정치마에 자주저고리, 머리도 부성하고 보자기에 책을 메고 다녔죠. 우리가 먼저 와서 줄을 서잖아요. 그러면 일본 아이들은 나중에 와도 구두 신은 발로 여기를 차요(발목과 무릎 사이 정강이를 가리키며) 그럼 아주 아프지 그냥... 여기를 팍 차며 ‘’아따야로‘’하면 막 울면서 뒤로 갔죠. 어린 나이에도 울면서 생각했죠. ‘ 왜 우리가 일본아이들이랑 같이 살아서 이럴까’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걸 표현을 못했어요.   기자 : 그런 일이 있을 때 대응하거나 방어하는 한국 학생들은 없었나요?   김옥순 : 아니요. 아무도 그러지 못했어요. 맞고 울면서 길을 비켜주고 뒤로 가 줄을 섰어요. 속으로 억울하고 아파서 울어도 그렇게 할 줄을 몰랐어요.   기자 : 학교에서는 주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말을 했죠, 학교에서의 기억을 나눠주시겠어요?   김옥순 : 저는 외할아버지가 한문도 가르쳐주고 언문도 가르쳐줬어요. 그때는 한글을 언문이라 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한글을 깨치고 학교에 들어갔어요. 한번은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아주 어머니 같은 분이셨어요. (잠시 회상하듯이) 아주 인자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 . 그분이 애국자에요. 그때 한국말을 하면 막 혼이 났어요. 일본말을 잘 못해도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한글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어요. 어느 날 나를 불러내더니 ‘’옥순이는 참 이뻐. 언제 이렇게 언문을 배웠어?‘’이러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더라구요. 그게 얼마나 애절한 마음을 나타낸 거에요. 뭐 나를 봐서 눈물이 났겠어요, 어쩌다 한국 사람이 한글도 마음대로 못 가르치고 속국이 되어 이러나 하는 마음에서 그러셨겠죠.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나도 눈물이 나요.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기자 : 그 마음이 언제쯤 헤아려지던가요?   김옥순 : 애들 키우고 애들 학교 다닐 때는 몰랐어요. 애들 다 커서 내 곁을 떠나고 혼자 있을 때 문들 그 생각이 났어요.   기자 : 학교 분위기는 어땠나요, 혹시 일본인이 감시하거나 그런 일도 있었나요?   김옥순 : 배명소학교에서 여주로 이사와 북내에 있는 학교에 다녔어요. 시골이라 그런지 일본인이 감시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일본말을 잘 하면 사쿠라 뱃지를 하나씩 달아줬어요. 벚꽃이 일본 나무라는 말이 있어요. 되지도 않는 일본말을 열심히 배우려고 기를 쓰고 그랬죠. 누군가 조선말을 사용하면 서로가 ‘’얘 조선말 쓴대요.‘’ ‘’얘 조선말 썼어요.‘’서로가 그랬어요. 지금 같으면 안 그러지. 서로 숨겨주고 가려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기자 : 한참 성장기에 음식도 귀했을텐데 먹거리는 어땠나요?   김옥순 : 땅을 좀 사서 농사짓는데 벼농사를 지으면 다 뺏어갔죠. 밭작물도 맘대로 못 심었어요. 목화를 심어야 했어요. 전쟁의 막판으로 치달을 때였죠. 놋숟가락, 놋그릇까지 다 가져가고 농작물도 모조리 공출했어요. 학교 다니며 공부도 거의 못하고 모심고 풀베고 주로 일을 했지요. 먹을게 없어서 많이 주렸어요. 쑥을 캐다가 쌀을 요만큼(손바닥을 오므려 보이시며) 넣고 쑥을 많이 넣어 쑥밥을 해요. 이게 목에 걸려 넘어가질 않아서 토하곤 했죠. 감자를 심으면 감자가 클새가 없어요. 학교 갔다와 배가 고프니까 감자가 클새도 없이 캐어먹었죠. 배 많이 곯았어요. 여기(여주) 내려와서요.   기자 : 그럼 소학교 이전 더 어린 시기는 어디에서 보내셨나요?   김옥순 : 어려서는 함경북도 두만강 근처에서 살았어요. 거기에서 태어났어요. 일정 때 먹고 살기 힘들 때 만주 어디를 가면 땅도 거저 얻고 농사도 맘대로 짓고 산다고 했죠. 그 당시 양반들은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막노동은 꺼려했어요.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와 동네 청년이었던 아버지를 데리고 거기로 갔죠. 두만강 무산 삼장(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이란 곳에서 비단장사를 했어요. 어릴 때 기억이 생생해요. 가게를 아주 크게 차리고 각종 잡화가 많았죠. 두만강이 겨우내 얼었다 녹으면 집채만한 얼음이 위에서부터 엉켜서 내려와요. 강가에 있던 가게까지 얼음덩어리가 넘쳐서 가게 물건이 다 쓸려간 일도 있었어요. 외할아버지는 거기서 돌아가시고 이모는 두만강 근처 다리를 건너 중국으로 넘어가 아주 그쪽 사람이 되버렸죠. 지금도 두만강 그 푸르던 물이 기억에 생생해요.   기자 :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마포에서 잠시 살다가 답십리를 거쳐 여주까지 오신 거네요. 그리고 지금은 양평에 살고 계시구요.   김옥순 : 그렇지요. 두만강에서 가게가 몇 차례 떠내려온 얼음덩어리에 피해를 입고 마포로 왔던 거에요. 가게서 번 돈으로 집을 두 채 샀어요. 길가에 있던 집이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다 비키라고 하는 바람에 답십리로 갔어요. 그리고 여주로 와서 가장 고생이 심했죠. ‘일본 순사’라고 들어봤지요? 기다란 칼을 허리춤에 차고 무릎까지 오는 신발을 신었는데 걸으면 저벅저벅, 칼이 덜컹덜컹 소리가 나요. 저기만 오명 아이들이 ‘’얘 순사 온다‘’ 소리쳐요. 그러면 얼른 뛰어가 숨어요. 길을 가다 경찰서를 지나다 보면 기다란 막대기로 한국 사람들을 때리는 것도 봤어요. 우리 시대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에 이어 식민치하와 전쟁으로 고생이 많았어요.   기자 : 그 어렵고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에도 훈훈한 추억담이 있으시죠?   김옥순 : 그럼요, 주암에서 북내 학교까지 가려면 몇 십리는 족히 될 거에요. 아버지가 짚새기(짚신)를 삼아주면 그게 하루를 못가요. 게다(나막신)는 어찌나 발이 아프고 무거운지 몰라요. 나무 조각에 못 박아 놓으면 얼마 안 되어 끈이 다 벗겨져요. 불편하고 발 아파서 밤낮 벗어들고 맨발로 다녔죠. 그래서 내가 건강한 거 같아요. 어쩔 때는 달 보고 나가 해지고 깜깜해서 들어왔어요. 학교가는 길에 언덕을 지나며 ‘’우우~~‘’ 하고 신호를 보내면 ‘’우우~~~‘’ 하고 친구가 화답을 해요. 그러면 만나서 같이 학교에 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밤나무에 올라가 밤을 따먹고 놀았죠. 그 먼 길을 고생으로 안 알고 재미로 알았어요.‘’   기자 : 해방의 기쁨은 어떻게 누리셨는지 들려주세요.   김옥순 : 3학년 때 해방이 됐을 거에요.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인제 너희들 모도 안 심고 호미도 버리고 낫도 다 버려라. 해방이 되었다.‘’ 그러시죠. ‘’해방이 뭐에요?‘’ 그러자 ‘’일본놈들이 전쟁에 져서 다 쫓겨가 우리 이제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거야.‘’모두들 ‘’야 좋다 해방이다‘’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질렀어요. 내가 그때 열세 살인가 열네 살 때였어요.‘’   김은주 earlyhumming@naver.com
    • 칼럼
    • 인터뷰
    • 3.1만세100주년
    2019-01-21
  •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2)- 그래서 선거법개정이 필요해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2)- 그래서 선거법개정이 필요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란? 정당 지지율만큼 국회의원이 생긴다. 예를들어 국회의원이 300명일 때 한 정당이 3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면, 연동형 비례대표 국회의원 9명이 배출되는 방식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금처럼 노동자가 죽어가는 노동조건을 진정으로 노동자 편에서 대변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지난 6.13 지방선거도 있었지만, 군수든 군의원이든 한 명에게 표를 몰아줘야 된다는 “고민”이 있고, 실제로 연대를 하면 표가 분리되지 않고 당선될 확률이 높아진다. 야당이 둘로 나뉘어서 졌다는 말이 나온다거나, 삼자구도가 여당에세 유리하다는 분석이 당연했던 이유이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적용되면- 각 당에서 골고루 국회의원이 배출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소수정당인 야3당이 적극적이다. 국회의원을 300명으로 놓고, 3퍼센트면 9명, 5퍼센트면 15명, 10퍼센트면 30명의 국회의원이 비례로 되는 것이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 것이다.   승자독식 지금의 선거제도는 아무래도 1등이냐, 꽝이냐는 방식의 독점구도이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적용하면, 내가 찍은 사람이 1위 후보가 아니어도 한 표, 한 표가 유의미하다. 그야말로 소중한 한 표가 말이 아니라 현실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될 놈 찍는다거나, 하나로 밀어야지 갈라지면 죽는다거나, 그래서 결국은 양당구조가 되고 정치적 다양성이 사라져서 국민의 고충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무능국회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것이라 하겠다.   상상 이상의 연대 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막아보자는 것인지 민주당과 자한당이 손을 잡은 모양이다. 그걸 막자고 정의당 이정미 대표와 바른정당 손학규 대표가 국회에서 단식을 하고 있다. 벌써 일주일인지, 9일 정도 됐다. 손학규 대표는 소신을 위해 죽어도 좋다는 강력한 표현도 서슴치 않았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인데, 손학규 대표는- 촛불로 일어선 민주당이 촛불로 망한 자한당과 손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더민주당의 대선 공약이었다. 민주당이 집권을 한 이후에 말을 바꾼다는 비난을 면치 못 할 것으로 보인다.   양평에도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지지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런데 그냥 검은 것은 글자인 듯 내 삶과 연결되는 지점 없이 바람에 나부끼는 듯하다. 하지만 잠깐만 생각해보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되면 양평군에도 비례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양대정당에 이어 지지율이 5-10퍼센트 사이를 오가는 정의당의 경우,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된다면 15명에서 30명 이내의 비례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은 양평에 국한해서 생각해도 적지 않은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불러올 수 있다. 양평에만 국한해서 생각해도 진보 대 보수라는 양대구도가 훅- 무너지고? 무조건 큰 정당은 살고, 작은 정당은 맥을 못 추는 경향도 희박해질 것으로 보인다. 즉, 다양성이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양하면 그 중에는 노동자가 노예가 아님을 법으로 보여주거나, 농민을 국가의 근간으로 보고 농민에게 정당한- 독일처럼 년 2000만 원 이상- 연봉을 지불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회의원도 나올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일 하다 죽는 나라, 더는 볼 수 없다면- 휘날리는 현수막 속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가슴으로 받았으면 좋겠다. 총총
    • 칼럼
    • 칼럼
    • 칼럼
    2018-12-15
  •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1)- 누구를 위한, 누구의 나라일까?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1)- 누구를 위한, 누구의 나라일까?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일 하다 죽는다. 일 년이면 백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일 하다 죽는다. 이들은 대부분 통계에도 적용되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다. 그런 가운데 한 청년노동자의 죽음이 통계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그림자의 실체는 바로 ‘당신’의 아들이다. 어머니도 모르는 참혹한 노동 조건 속에서 당신의 아이들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의 참혹한 죽음- 입사 두 달 만에 숨진 청년노동자 김용규 씨는 24세이다. 김용규 씨는 사망했지만, 그리고 이미 여러 명의 서부발전 소속 노동자들이 일하다 죽었지만- 정작 태안화력발전소는 정부로부터 무재해 사업장으로 인정받고 산재보험료 20여 억 원을 감면받았다. 김용규 씨가 태안화력발전소 소속이 아니라 외주업체인 서부발전 소속이기 때문이다.   외주화는 민영화의 산물이다. 서구의 파트타임을 흉내 내서 비정규직이라는 실로 기상천외한 노동자 학대를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그보다 한 수 위인 외주화에 이르렀다. 그런 것이 아니어도 이미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급여는 박하기 그지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은 “아래것”들에게 시키면서 박한 처우와 고용불안을 강요하는 신분제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를 보는 듯한, 일제 강점기를 보는 듯한, 아니면 군부독재시절을 보는 듯한, 통칭 보수정권시절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전체에서 10퍼센트만 벗어나면 다들 형편은 비슷하다. 10퍼센트가 우리 재화의 90퍼센트를 쥐고 있다는 통계들이 있다. 100명 중 90명의 사람들은 100개의 재화 중 단 10여개만으로 나눠야 한다. 이런 이상한 상황은 이미 민란이 일어나고도 넘어야 하는 통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못살겠다고 일어난 민란은 정치권력의 교체만 가져왔을 뿐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역대 어느 정권도 바로 이런 신분제 같은 노동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이런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가진자들과 권력이 절대로 소득을 나누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박정희가 선성장, 후분배를 구호처럼 외쳤지만- 이미 세계경재 10대국이라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선성장 중이다.   앞으로도 후분배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귀족, 사대부와 양반층이 굳이 노비를 해방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역사적으로 놀랍게도 양반층이랄 수 있는 사회 지도층이 신분을 내려놓은 사례는 있다. 그것이 바로 3.1 만세를 폭발력 있는 대중운동으로 확산한 물밑정서라고 생각한다. 임시정부 헌법이 말하듯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3.1만세 정신을 모르고 있다. “우리”가 권력의 주체라는 것을 모르고, 아직도 신분제가 사라진 줄 모르고 있는 귀족 양반 사대부들한테 90퍼센트를 상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노예처럼.   자신이 주인인 걸 모르는데, 누가 주인대접을 해주겠는가? 그러니 선성장은 있어도 후분배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월급이 신분인 대한민국에서 대부분 월 200만원 이하의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은 주인인지, 아닌지를 따질 시간도 없이 살고 있다. 그리고, 내 자식이 그보다는 더 많이 받는다고 딱히 좋아할 일도 아니다. 대부분의 하급직들은 여전히 상전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 돈 주는 사람은 규모에 상관없이 귀족이고자 한다.   어쨌거나 사람이 일을 하다가 죽고 있다. 해마다 150명 안팎이다.- 일 하다 죽는 나라, 대한민국. 사회적 통계 상 90퍼센트의 국민이 그런 삶을 강요받고 있다고 해도 허언이 아닐진대,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누구의 나라라는 것일까?   조선만 해도 양반은 노비를 때리고, 가두고, 죽일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법으로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사용자들은 노동자 노비들을 일 하다가 죽게 만들고 있다. 일 하다 죽는 노동자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은 여전히 신분제사회일 뿐, 민주주의도 민주공화국도 아니다.
    • 칼럼
    • 칼럼
    • 칼럼
    2018-12-1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