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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의의(上)
    [기고]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의의(上)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3~5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3.1운동은 신분, 사상, 종교를 넘어선 우리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투쟁이었다. 또한, 3.1운동은 4월 11일 임시정부 설립으로 이어졌고 비로소 헌법이 만들어지게 됐으며, 헌법에는 모든 권력의 주체가 국민임이 명시됐다.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3.1운동은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3.1운동은 종교를 넘어서,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신분을 넘어서 하나가 된 일대 거사라고들 한다. 3.1운동 이후인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정부는 헌법을 제정하고, 헌법에는 그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지향했던 나라, 조선이 원했던 나라가 명시돼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 그런데 과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이 가슴에 절절하게 다가올지는 알 수 없다. 100년 전에는 어떠했을까? 당시에 거리에 나와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 일본헌병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2천만 우리 국민들은 총칼 앞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500여명이 넘게 죽고, 2만여 명 가까이 부상을 입었는데도 3월에서 5월까지 계속 됐다. 무엇이 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총칼의 위협을 넘어서게 했을까? 1910년 황제가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넘기더니, 일본이 왕이 돼 거리에서, 학교에서, 사람이 모이는 모든 곳에서 걸핏하면 잡아가고, 죽이고 때린다. 쌀도 빼앗고, 산에서 긁어다 때던 나무도 빼앗고, 농사에 필요한 물도 빼앗는다. 나중에는 말도 빼앗고, 이름도 빼앗았고, 거의 모든 물자를 빼앗더니 문화 또한 착실하게 뭉개버렸다. 그렇게 10년을 살았는데, 나라를 내 준 황제가 죽었고, 황제가 준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국민이 일어섰다. 독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황제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고 선언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3.1운동은 위대한 평민의 거사였다. 한 줌도 안 되는 양반의 세상에서 90퍼센트의 평민이 상놈이 아니라 국민이 되기 위한 거사였다. 대한독립만세는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는 말의 다른 버전이었다.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를 원했던 평민의 외침. 민주주의를 원했던 평민의 바람이 일으킨 폭발력이 전국으로, 전 세계 모든 동포에게로, 그리고 3월에서 5월로,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반상을 뒤집은 평민들이 선언한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독립선언서 첫 문장의 키워드는 그래서 ‘독립’과 ‘자유’다. 마치 현재완료형처럼 자유민들은 독립이 됐다. 독립된 나라는 정부가 있고, 헌법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여느 나라처럼 군대도 만들고, 행정부도 만들고, 국회도 만든다. 국회는 최초로 헌법을 만들어서 제일 앞장에 반상이 아닌 국민의 정부임을 명시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주인이 바뀌고, 그것이 법으로 인정됐던 것이다. 3.1운동의 위대함은 평민의 거사였다는 점과 실제로 상해임시정부와 헌법제정을 통해 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독립기념일이다. 이러한 3.1운동에는 숨은 주역들이 있다.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신한청년당을 조직해서 파리로 보내고, 동포들이 있는 곳곳으로 보내 김규식을 응원하자고 제안한다. 3.1거사의 기폭제 역할을 한 몽양 선생과 신한청년당은 100주년을 맞으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손병희 선생도 있다. 선생은 국내 3.1거사의 여러 계통성을 하나로 통일시킨 주역이다. 자본금도 거의 선생한테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2017년 만주 길림에서 조소앙 선생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의 바탕엔 바로 평민들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결연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결과적으로 3.1운동의 진정한 주역이 되었다.1919년 위대한 평민들의 독립과 자유의 함성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고, 2019년 100주년을 맞이했다. 100년 전 독립을 원했지만 아직도 반쪽인 우리는 이제 평화의 새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끝 하보균 양평 3.1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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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6
  • 길위에서 만난 사람
    인터뷰 [길위에서 만난 사람]은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가 '삶'이라는 길 어디쯤에 있고 각자 걷고 있는 길이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지금 꽃길을, 누군가는 신작로를, 또다른 누군가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중일지도 모른다. 3.1운동 100주년기념 4차 포럼에서 이성한 씨를 만났다. 어쩌다보니 나란히 함께 안내를 하게 되었다. 함께 하다 보니, 그가 젊은 나이에 병고(病苦)라는 터널을 막 통과한 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의 얘기가 듣고 싶어 인터뷰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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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5
  • 3.1운동 100주년기념 인터뷰
    3.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두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양평군 토박이 정 복동 어르신입니다. 1930년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배잔 마을에서 태어나 결혼 전까지 그곳에서 사셨고, 해방 후 결혼하여 보금자리를 튼 양평읍에서 현재까지 거주중입니다.      기자 : 양평군 토박이라 들었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나셨나요?    정복동 : 나는 대평리에서 태어났어요. 대평리 알죠? 작은 오막살이에서 태어났어요.    기자 : 그럼요, 대평리 잘 알죠. 대평리에서 어린 시절 겪었던 기억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정복동 : 우리 어머니가 딸만 넷을 낳고 다섯째로 아들을 낳으면 저 동산에 가서 춤을 추겠다 그러셨대요. 그리곤 동생이 태어났죠. 그때 나는 멀리 밭에 일하는 아버지한테 점심도 갖다 드리고 새참도 나르고 그랬어요. 어느 날, 아버지에게 참을 날라다 주고 집에 오니까 울어머니하고 동생하고 마루에 걸터앉아 울고 앉았어. 왜 우냐고 하니까 동생이 밥을 먹고 싶은데 죽을 주니까 먹기 싫다고 울고 있다 하더라구요. 동생은 먹기 싫다고 울고 엄마는 그런 동생이 안되서 울었던 거야.    기자 : 그때 몇 살이셨죠, 동생과는 몇 살 터울이었나요?    정복동 : 나는 그때 열세 살쯤 됐을 거에요. 동생이랑은 여섯 살 터울이었어요. 그 동생이 얼마 전 저세상으로 갔어요.   기자 : 그러셨군요... .... 대평리에서 농사를 지으셨나요?    정복동 : 그럼요, 농사를 지으면 배급을 줘요. 친구는 콩깻묵을 받았는데, 나는 그걸 못 받아서 그땐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기자 : 콩깻묵이요?    정복동 : 네, 콩기름을 짜고 남은 게 콩깻묵인데 친구가 먹으라고 줘서 막상 먹어보면 아주 못 먹겠더라구요. 농사를 지어도 죄다 뺏어가니까 곡식을 감춰요. 죽담이라고 담장 뒤에 독을 묻고 거기에 곡식을 감춰요. 그러면 일본 앞잡이들이 쇠꼬챙이로 담벼락을 푹 쑤셔요. 그럼 흙담이 쑥 들어가거나 독에 묻지 않은 곡식이 쏟아져 나와요. 그럼 다 뺏어갔죠.    기자 : 콩이나 조, 수수 같은 곡식도 농사짓고 또 어떤 작물을 농사지으셨어요?    정복동 : 그때 왜정 때 목화를 심으래요. 목화를 심어서 공출을 해라 그래요. 그러고 나서 목화 나무껍데기를 삶아서 벗겨 바치면 돈 얼마 주고 그랬죠. 얼마나 일본에 들볶였는지 나는 해방이 되어야 시집가겠다 그랬어요. 해방이 안 되면 시집가지 않을 거다 그랬어요. 지금 이 집이 내가 시집온 곳이에요. 나는 진짜 말대로 해방되고 열아홉에 시집왔어요.    기자 : 애써 농사를 짓고서도 뺏길까봐 곡식을 숨기고, 정작 가족들이 배곯고 고단했는데 어떻게 인내하며 사셨는지 말씀해 주셔요.    정복동 : 어머니가 봄이 오면 칼나물을 논두렁에 가서 해와요. 나물을 넣고 밥을 비비면 어머니가 얼른 수저를 놓아요. 나 많이 먹으라고... (한참 있다가) 우리 어머니가 막내 낳을 적에 내가 쌀을 퍼서 몰래 바가지에 감추어 두었어요. 어머니 해산밥 해주려고.    기자 : 그 힘들고 배고팠던 때 어린나이에 참 철이 들었네요.    정복동 : 네, 어머니가 옷이 없어 날마다 행주치마를 빨아 입는 걸 보고 내가 시집가면 어머니 옷 한 벌 해드려야지 그랬어요. 손이 다 닳도록 일을 했죠. 다리방아 아시지? 보리를 다리방아로 찧어 마당에 말렸다 까불러 벗겨야 밥을 해먹어요. 그럼 손이 다 닳아요. 그때 어머니가 힘들까봐 안타까워서 내가 다 방앗간으로 날랐어요. 불을 화르륵 때면 방이 뜨뜻해야 하는데 서늘해지면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시집가면 우리 어머니 뜨뜻하게 살게 해드려야지.’    기자 : 어머니의 자식사랑이 극진하여 또 자녀들의 어머니 사랑도 애틋했나 봐요.   정복동 : 동생이 학교에 갈 때 어머니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생 모습이 모퉁이 뒤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서야 집에 돌아와 밥을 자셨어. 한 삼십분이 지나도록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서 계셨어. 대평리에는 과부 딸이랑 외딸(외동딸)만 학교에 다녔어요. 나도 얼마나 학교에 다니고 싶었는지 몰라요. 언니랑 나랑 그때 일본어를 배우면 내가 금세 깨우쳤어. 나를 공부 시켰으면 참 잘했을 거야. 그때 학교에는 못 다녀도 검은 양말(검은 스타킹)이 너무 신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짚새기(짚신)를 삼아 달라 그랬어. 설날에 명으로 지은 새옷을 입고 짚신을 곱게 삼아서 신고 나갔다 오니 양말 뒤꿈치가 다 구멍이 났어(말씀하시며 소녀처럼 까르르 웃으심^^)   기자 : 일본이 식량을 공출시키고 다른 노역도 시켰을 텐데 대평리에서는 어땠나요?   정복동 : 가마니를 치라고 배당을 줬어요. 우리는 농사를 짓는다고 100장이 분담이 돼요. 면에서는 밤에 일할까봐 조사가 나와요. 할머니가 들킬까봐 까만 치마를 두르고 빛이 새나가지 않게 일을 했어요. 언니하고 나하고 같이 하루 종일 일해도 가마니 세 짝밖에 못 짜요, 나는 매달린 채 배고픈 채로 일을 해요. 가마니를 다 짜면 아버지가 꿰어서 마무리를 지어요. 그럼 1등, 2등, 3등까지 차별적으로 돈을 줘요. 그걸 지고 대평리에서 지평에 가요. 그때는 차도 없어서 걸어서... ... 아버지가 불쌍해요. 우리 아버지 세 살 먹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우리 할머니가 과부로 아버지를 키우셨어. 할머니가 이천이 친정인데 잘 살아서 아버지에게 돈을 줘서 대평리에 땅을 샀지.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일만 하니까 농사짓는 거밖에 모르셨지.   기자 ; 정복동 어르신의 일제 강점기 살아온 얘기를 듣다 보니 가족에 대한 안쓰러움과 애틋함,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 느껴져요. 지금도 참 고우시고 건강해 보이셔요.   정복동 : 아유 나는 기운이 없어요 이제. 아유 내 정신좀 봐. 차를 드린다 해놓구선.    정복동 어르신이 준비해 주신 구수한 차를 마시고 귤도 하나 까먹고, 또 손바닥에 쥐어준 커피사탕도 받아 계단을 내려오며 과거와 현재가 정복동 어르신 내면에서 생명력 있게 작동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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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 3.1만세100주년
    2019-02-11
  • 3.1운동 100주년기념 인터뷰
    대한민국 역사상 짧지 않은 기간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그 시대를 살아낸 분들이 점차 귀해지는 시점에 2019년 3.1만세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양평토박이신문사에서는 양평지역내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갖고자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김옥순 :1931년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에서 태어나 서울(마포, 답십리)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여주와 양평지역에서 70여년 거주, 현재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 구둔역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옥순이는 참 이뻐, 언제 이렇게 언문을 배웠어?'' 이러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더라구요. 그게 얼마나 애절한 마음을 나타낸 거에요. 뭐 나를 봐서 눈물이 났겠어요. 어쩌다 한국사람이 한글도 마음대로 못 가르치고 속국이 되어 이러나 하는 마음에서였겠지요.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나도 눈물이 나요.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기자 : 일제강점기에 유년시절을 보내셨는데 기억나는 구체적 경험을 말씀해주시겠어요?   김옥순 : 제가 그때 아홉 살인지 열 살인지 좀 늦게 학교에 들어갔어요. 왕십리에 있는 배명소학교였어요. 지금은 배명중고등학교가 되었지요. 답십리에서 살았고 교통편이 별로 없던 때라서 왕십리까지 걸어다녔죠. 그때 고무밴드 공장이 있었던지 먼지구덩이, 쓰레기장 같은 곳을 지나 다녔어요. 그 길이 지름길이었거든요. 학교 가는 길에 고무밴드를 주워 손목에 걸고 다녔어요. 그 이후 전철이 다녀서 학교에 가려고 전철역에 줄을 섰어요. 그 당시 일본아이들은 짧은 주름치마를 입고 스타킹을 신고 테두리가 있는 아주 예쁜 까만 구두를 신고 단발머리에 가방을 딱 메고 다녔죠. 우리 조선아이들은, 그때는 조선이라고 했어요, 긴 검정치마에 자주저고리, 머리도 부성하고 보자기에 책을 메고 다녔죠. 우리가 먼저 와서 줄을 서잖아요. 그러면 일본 아이들은 나중에 와도 구두 신은 발로 여기를 차요(발목과 무릎 사이 정강이를 가리키며) 그럼 아주 아프지 그냥... 여기를 팍 차며 ‘’아따야로‘’하면 막 울면서 뒤로 갔죠. 어린 나이에도 울면서 생각했죠. ‘ 왜 우리가 일본아이들이랑 같이 살아서 이럴까’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걸 표현을 못했어요.   기자 : 그런 일이 있을 때 대응하거나 방어하는 한국 학생들은 없었나요?   김옥순 : 아니요. 아무도 그러지 못했어요. 맞고 울면서 길을 비켜주고 뒤로 가 줄을 섰어요. 속으로 억울하고 아파서 울어도 그렇게 할 줄을 몰랐어요.   기자 : 학교에서는 주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말을 했죠, 학교에서의 기억을 나눠주시겠어요?   김옥순 : 저는 외할아버지가 한문도 가르쳐주고 언문도 가르쳐줬어요. 그때는 한글을 언문이라 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한글을 깨치고 학교에 들어갔어요. 한번은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아주 어머니 같은 분이셨어요. (잠시 회상하듯이) 아주 인자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 . 그분이 애국자에요. 그때 한국말을 하면 막 혼이 났어요. 일본말을 잘 못해도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한글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어요. 어느 날 나를 불러내더니 ‘’옥순이는 참 이뻐. 언제 이렇게 언문을 배웠어?‘’이러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더라구요. 그게 얼마나 애절한 마음을 나타낸 거에요. 뭐 나를 봐서 눈물이 났겠어요, 어쩌다 한국 사람이 한글도 마음대로 못 가르치고 속국이 되어 이러나 하는 마음에서 그러셨겠죠.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나도 눈물이 나요.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기자 : 그 마음이 언제쯤 헤아려지던가요?   김옥순 : 애들 키우고 애들 학교 다닐 때는 몰랐어요. 애들 다 커서 내 곁을 떠나고 혼자 있을 때 문들 그 생각이 났어요.   기자 : 학교 분위기는 어땠나요, 혹시 일본인이 감시하거나 그런 일도 있었나요?   김옥순 : 배명소학교에서 여주로 이사와 북내에 있는 학교에 다녔어요. 시골이라 그런지 일본인이 감시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일본말을 잘 하면 사쿠라 뱃지를 하나씩 달아줬어요. 벚꽃이 일본 나무라는 말이 있어요. 되지도 않는 일본말을 열심히 배우려고 기를 쓰고 그랬죠. 누군가 조선말을 사용하면 서로가 ‘’얘 조선말 쓴대요.‘’ ‘’얘 조선말 썼어요.‘’서로가 그랬어요. 지금 같으면 안 그러지. 서로 숨겨주고 가려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기자 : 한참 성장기에 음식도 귀했을텐데 먹거리는 어땠나요?   김옥순 : 땅을 좀 사서 농사짓는데 벼농사를 지으면 다 뺏어갔죠. 밭작물도 맘대로 못 심었어요. 목화를 심어야 했어요. 전쟁의 막판으로 치달을 때였죠. 놋숟가락, 놋그릇까지 다 가져가고 농작물도 모조리 공출했어요. 학교 다니며 공부도 거의 못하고 모심고 풀베고 주로 일을 했지요. 먹을게 없어서 많이 주렸어요. 쑥을 캐다가 쌀을 요만큼(손바닥을 오므려 보이시며) 넣고 쑥을 많이 넣어 쑥밥을 해요. 이게 목에 걸려 넘어가질 않아서 토하곤 했죠. 감자를 심으면 감자가 클새가 없어요. 학교 갔다와 배가 고프니까 감자가 클새도 없이 캐어먹었죠. 배 많이 곯았어요. 여기(여주) 내려와서요.   기자 : 그럼 소학교 이전 더 어린 시기는 어디에서 보내셨나요?   김옥순 : 어려서는 함경북도 두만강 근처에서 살았어요. 거기에서 태어났어요. 일정 때 먹고 살기 힘들 때 만주 어디를 가면 땅도 거저 얻고 농사도 맘대로 짓고 산다고 했죠. 그 당시 양반들은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막노동은 꺼려했어요.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와 동네 청년이었던 아버지를 데리고 거기로 갔죠. 두만강 무산 삼장(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이란 곳에서 비단장사를 했어요. 어릴 때 기억이 생생해요. 가게를 아주 크게 차리고 각종 잡화가 많았죠. 두만강이 겨우내 얼었다 녹으면 집채만한 얼음이 위에서부터 엉켜서 내려와요. 강가에 있던 가게까지 얼음덩어리가 넘쳐서 가게 물건이 다 쓸려간 일도 있었어요. 외할아버지는 거기서 돌아가시고 이모는 두만강 근처 다리를 건너 중국으로 넘어가 아주 그쪽 사람이 되버렸죠. 지금도 두만강 그 푸르던 물이 기억에 생생해요.   기자 :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마포에서 잠시 살다가 답십리를 거쳐 여주까지 오신 거네요. 그리고 지금은 양평에 살고 계시구요.   김옥순 : 그렇지요. 두만강에서 가게가 몇 차례 떠내려온 얼음덩어리에 피해를 입고 마포로 왔던 거에요. 가게서 번 돈으로 집을 두 채 샀어요. 길가에 있던 집이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다 비키라고 하는 바람에 답십리로 갔어요. 그리고 여주로 와서 가장 고생이 심했죠. ‘일본 순사’라고 들어봤지요? 기다란 칼을 허리춤에 차고 무릎까지 오는 신발을 신었는데 걸으면 저벅저벅, 칼이 덜컹덜컹 소리가 나요. 저기만 오명 아이들이 ‘’얘 순사 온다‘’ 소리쳐요. 그러면 얼른 뛰어가 숨어요. 길을 가다 경찰서를 지나다 보면 기다란 막대기로 한국 사람들을 때리는 것도 봤어요. 우리 시대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에 이어 식민치하와 전쟁으로 고생이 많았어요.   기자 : 그 어렵고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에도 훈훈한 추억담이 있으시죠?   김옥순 : 그럼요, 주암에서 북내 학교까지 가려면 몇 십리는 족히 될 거에요. 아버지가 짚새기(짚신)를 삼아주면 그게 하루를 못가요. 게다(나막신)는 어찌나 발이 아프고 무거운지 몰라요. 나무 조각에 못 박아 놓으면 얼마 안 되어 끈이 다 벗겨져요. 불편하고 발 아파서 밤낮 벗어들고 맨발로 다녔죠. 그래서 내가 건강한 거 같아요. 어쩔 때는 달 보고 나가 해지고 깜깜해서 들어왔어요. 학교가는 길에 언덕을 지나며 ‘’우우~~‘’ 하고 신호를 보내면 ‘’우우~~~‘’ 하고 친구가 화답을 해요. 그러면 만나서 같이 학교에 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밤나무에 올라가 밤을 따먹고 놀았죠. 그 먼 길을 고생으로 안 알고 재미로 알았어요.‘’   기자 : 해방의 기쁨은 어떻게 누리셨는지 들려주세요.   김옥순 : 3학년 때 해방이 됐을 거에요.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인제 너희들 모도 안 심고 호미도 버리고 낫도 다 버려라. 해방이 되었다.‘’ 그러시죠. ‘’해방이 뭐에요?‘’ 그러자 ‘’일본놈들이 전쟁에 져서 다 쫓겨가 우리 이제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거야.‘’모두들 ‘’야 좋다 해방이다‘’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질렀어요. 내가 그때 열세 살인가 열네 살 때였어요.‘’   김은주 earlyhummi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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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만세100주년
    2019-01-21
  •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2)- 그래서 선거법개정이 필요해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2)- 그래서 선거법개정이 필요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란? 정당 지지율만큼 국회의원이 생긴다. 예를들어 국회의원이 300명일 때 한 정당이 3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면, 연동형 비례대표 국회의원 9명이 배출되는 방식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금처럼 노동자가 죽어가는 노동조건을 진정으로 노동자 편에서 대변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지난 6.13 지방선거도 있었지만, 군수든 군의원이든 한 명에게 표를 몰아줘야 된다는 “고민”이 있고, 실제로 연대를 하면 표가 분리되지 않고 당선될 확률이 높아진다. 야당이 둘로 나뉘어서 졌다는 말이 나온다거나, 삼자구도가 여당에세 유리하다는 분석이 당연했던 이유이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적용되면- 각 당에서 골고루 국회의원이 배출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소수정당인 야3당이 적극적이다. 국회의원을 300명으로 놓고, 3퍼센트면 9명, 5퍼센트면 15명, 10퍼센트면 30명의 국회의원이 비례로 되는 것이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 것이다.   승자독식 지금의 선거제도는 아무래도 1등이냐, 꽝이냐는 방식의 독점구도이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적용하면, 내가 찍은 사람이 1위 후보가 아니어도 한 표, 한 표가 유의미하다. 그야말로 소중한 한 표가 말이 아니라 현실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될 놈 찍는다거나, 하나로 밀어야지 갈라지면 죽는다거나, 그래서 결국은 양당구조가 되고 정치적 다양성이 사라져서 국민의 고충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무능국회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것이라 하겠다.   상상 이상의 연대 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막아보자는 것인지 민주당과 자한당이 손을 잡은 모양이다. 그걸 막자고 정의당 이정미 대표와 바른정당 손학규 대표가 국회에서 단식을 하고 있다. 벌써 일주일인지, 9일 정도 됐다. 손학규 대표는 소신을 위해 죽어도 좋다는 강력한 표현도 서슴치 않았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인데, 손학규 대표는- 촛불로 일어선 민주당이 촛불로 망한 자한당과 손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더민주당의 대선 공약이었다. 민주당이 집권을 한 이후에 말을 바꾼다는 비난을 면치 못 할 것으로 보인다.   양평에도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지지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런데 그냥 검은 것은 글자인 듯 내 삶과 연결되는 지점 없이 바람에 나부끼는 듯하다. 하지만 잠깐만 생각해보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되면 양평군에도 비례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양대정당에 이어 지지율이 5-10퍼센트 사이를 오가는 정의당의 경우,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된다면 15명에서 30명 이내의 비례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은 양평에 국한해서 생각해도 적지 않은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불러올 수 있다. 양평에만 국한해서 생각해도 진보 대 보수라는 양대구도가 훅- 무너지고? 무조건 큰 정당은 살고, 작은 정당은 맥을 못 추는 경향도 희박해질 것으로 보인다. 즉, 다양성이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양하면 그 중에는 노동자가 노예가 아님을 법으로 보여주거나, 농민을 국가의 근간으로 보고 농민에게 정당한- 독일처럼 년 2000만 원 이상- 연봉을 지불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회의원도 나올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일 하다 죽는 나라, 더는 볼 수 없다면- 휘날리는 현수막 속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가슴으로 받았으면 좋겠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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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5
  •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1)- 누구를 위한, 누구의 나라일까?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1)- 누구를 위한, 누구의 나라일까?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일 하다 죽는다. 일 년이면 백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일 하다 죽는다. 이들은 대부분 통계에도 적용되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다. 그런 가운데 한 청년노동자의 죽음이 통계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그림자의 실체는 바로 ‘당신’의 아들이다. 어머니도 모르는 참혹한 노동 조건 속에서 당신의 아이들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의 참혹한 죽음- 입사 두 달 만에 숨진 청년노동자 김용규 씨는 24세이다. 김용규 씨는 사망했지만, 그리고 이미 여러 명의 서부발전 소속 노동자들이 일하다 죽었지만- 정작 태안화력발전소는 정부로부터 무재해 사업장으로 인정받고 산재보험료 20여 억 원을 감면받았다. 김용규 씨가 태안화력발전소 소속이 아니라 외주업체인 서부발전 소속이기 때문이다.   외주화는 민영화의 산물이다. 서구의 파트타임을 흉내 내서 비정규직이라는 실로 기상천외한 노동자 학대를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그보다 한 수 위인 외주화에 이르렀다. 그런 것이 아니어도 이미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급여는 박하기 그지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은 “아래것”들에게 시키면서 박한 처우와 고용불안을 강요하는 신분제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를 보는 듯한, 일제 강점기를 보는 듯한, 아니면 군부독재시절을 보는 듯한, 통칭 보수정권시절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전체에서 10퍼센트만 벗어나면 다들 형편은 비슷하다. 10퍼센트가 우리 재화의 90퍼센트를 쥐고 있다는 통계들이 있다. 100명 중 90명의 사람들은 100개의 재화 중 단 10여개만으로 나눠야 한다. 이런 이상한 상황은 이미 민란이 일어나고도 넘어야 하는 통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못살겠다고 일어난 민란은 정치권력의 교체만 가져왔을 뿐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역대 어느 정권도 바로 이런 신분제 같은 노동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이런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가진자들과 권력이 절대로 소득을 나누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박정희가 선성장, 후분배를 구호처럼 외쳤지만- 이미 세계경재 10대국이라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선성장 중이다.   앞으로도 후분배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귀족, 사대부와 양반층이 굳이 노비를 해방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역사적으로 놀랍게도 양반층이랄 수 있는 사회 지도층이 신분을 내려놓은 사례는 있다. 그것이 바로 3.1 만세를 폭발력 있는 대중운동으로 확산한 물밑정서라고 생각한다. 임시정부 헌법이 말하듯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3.1만세 정신을 모르고 있다. “우리”가 권력의 주체라는 것을 모르고, 아직도 신분제가 사라진 줄 모르고 있는 귀족 양반 사대부들한테 90퍼센트를 상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노예처럼.   자신이 주인인 걸 모르는데, 누가 주인대접을 해주겠는가? 그러니 선성장은 있어도 후분배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월급이 신분인 대한민국에서 대부분 월 200만원 이하의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은 주인인지, 아닌지를 따질 시간도 없이 살고 있다. 그리고, 내 자식이 그보다는 더 많이 받는다고 딱히 좋아할 일도 아니다. 대부분의 하급직들은 여전히 상전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 돈 주는 사람은 규모에 상관없이 귀족이고자 한다.   어쨌거나 사람이 일을 하다가 죽고 있다. 해마다 150명 안팎이다.- 일 하다 죽는 나라, 대한민국. 사회적 통계 상 90퍼센트의 국민이 그런 삶을 강요받고 있다고 해도 허언이 아닐진대,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누구의 나라라는 것일까?   조선만 해도 양반은 노비를 때리고, 가두고, 죽일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법으로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사용자들은 노동자 노비들을 일 하다가 죽게 만들고 있다. 일 하다 죽는 노동자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은 여전히 신분제사회일 뿐, 민주주의도 민주공화국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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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5

실시간 칼럼 기사

  • [기고]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의의(上)
    [기고]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의의(上)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3~5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3.1운동은 신분, 사상, 종교를 넘어선 우리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투쟁이었다. 또한, 3.1운동은 4월 11일 임시정부 설립으로 이어졌고 비로소 헌법이 만들어지게 됐으며, 헌법에는 모든 권력의 주체가 국민임이 명시됐다.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3.1운동은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3.1운동은 종교를 넘어서,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신분을 넘어서 하나가 된 일대 거사라고들 한다. 3.1운동 이후인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정부는 헌법을 제정하고, 헌법에는 그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지향했던 나라, 조선이 원했던 나라가 명시돼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 그런데 과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이 가슴에 절절하게 다가올지는 알 수 없다. 100년 전에는 어떠했을까? 당시에 거리에 나와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 일본헌병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2천만 우리 국민들은 총칼 앞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500여명이 넘게 죽고, 2만여 명 가까이 부상을 입었는데도 3월에서 5월까지 계속 됐다. 무엇이 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총칼의 위협을 넘어서게 했을까? 1910년 황제가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넘기더니, 일본이 왕이 돼 거리에서, 학교에서, 사람이 모이는 모든 곳에서 걸핏하면 잡아가고, 죽이고 때린다. 쌀도 빼앗고, 산에서 긁어다 때던 나무도 빼앗고, 농사에 필요한 물도 빼앗는다. 나중에는 말도 빼앗고, 이름도 빼앗았고, 거의 모든 물자를 빼앗더니 문화 또한 착실하게 뭉개버렸다. 그렇게 10년을 살았는데, 나라를 내 준 황제가 죽었고, 황제가 준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국민이 일어섰다. 독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황제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고 선언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3.1운동은 위대한 평민의 거사였다. 한 줌도 안 되는 양반의 세상에서 90퍼센트의 평민이 상놈이 아니라 국민이 되기 위한 거사였다. 대한독립만세는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는 말의 다른 버전이었다.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를 원했던 평민의 외침. 민주주의를 원했던 평민의 바람이 일으킨 폭발력이 전국으로, 전 세계 모든 동포에게로, 그리고 3월에서 5월로,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반상을 뒤집은 평민들이 선언한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독립선언서 첫 문장의 키워드는 그래서 ‘독립’과 ‘자유’다. 마치 현재완료형처럼 자유민들은 독립이 됐다. 독립된 나라는 정부가 있고, 헌법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여느 나라처럼 군대도 만들고, 행정부도 만들고, 국회도 만든다. 국회는 최초로 헌법을 만들어서 제일 앞장에 반상이 아닌 국민의 정부임을 명시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주인이 바뀌고, 그것이 법으로 인정됐던 것이다. 3.1운동의 위대함은 평민의 거사였다는 점과 실제로 상해임시정부와 헌법제정을 통해 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독립기념일이다. 이러한 3.1운동에는 숨은 주역들이 있다.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신한청년당을 조직해서 파리로 보내고, 동포들이 있는 곳곳으로 보내 김규식을 응원하자고 제안한다. 3.1거사의 기폭제 역할을 한 몽양 선생과 신한청년당은 100주년을 맞으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손병희 선생도 있다. 선생은 국내 3.1거사의 여러 계통성을 하나로 통일시킨 주역이다. 자본금도 거의 선생한테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이미 2017년 만주 길림에서 조소앙 선생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의 바탕엔 바로 평민들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결연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결과적으로 3.1운동의 진정한 주역이 되었다.1919년 위대한 평민들의 독립과 자유의 함성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고, 2019년 100주년을 맞이했다. 100년 전 독립을 원했지만 아직도 반쪽인 우리는 이제 평화의 새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끝 하보균 양평 3.1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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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6
  • 길위에서 만난 사람
    인터뷰 [길위에서 만난 사람]은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가 '삶'이라는 길 어디쯤에 있고 각자 걷고 있는 길이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지금 꽃길을, 누군가는 신작로를, 또다른 누군가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중일지도 모른다. 3.1운동 100주년기념 4차 포럼에서 이성한 씨를 만났다. 어쩌다보니 나란히 함께 안내를 하게 되었다. 함께 하다 보니, 그가 젊은 나이에 병고(病苦)라는 터널을 막 통과한 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의 얘기가 듣고 싶어 인터뷰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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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05
  • 3.1운동 100주년기념 인터뷰
    3.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두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양평군 토박이 정 복동 어르신입니다. 1930년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배잔 마을에서 태어나 결혼 전까지 그곳에서 사셨고, 해방 후 결혼하여 보금자리를 튼 양평읍에서 현재까지 거주중입니다.      기자 : 양평군 토박이라 들었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나셨나요?    정복동 : 나는 대평리에서 태어났어요. 대평리 알죠? 작은 오막살이에서 태어났어요.    기자 : 그럼요, 대평리 잘 알죠. 대평리에서 어린 시절 겪었던 기억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정복동 : 우리 어머니가 딸만 넷을 낳고 다섯째로 아들을 낳으면 저 동산에 가서 춤을 추겠다 그러셨대요. 그리곤 동생이 태어났죠. 그때 나는 멀리 밭에 일하는 아버지한테 점심도 갖다 드리고 새참도 나르고 그랬어요. 어느 날, 아버지에게 참을 날라다 주고 집에 오니까 울어머니하고 동생하고 마루에 걸터앉아 울고 앉았어. 왜 우냐고 하니까 동생이 밥을 먹고 싶은데 죽을 주니까 먹기 싫다고 울고 있다 하더라구요. 동생은 먹기 싫다고 울고 엄마는 그런 동생이 안되서 울었던 거야.    기자 : 그때 몇 살이셨죠, 동생과는 몇 살 터울이었나요?    정복동 : 나는 그때 열세 살쯤 됐을 거에요. 동생이랑은 여섯 살 터울이었어요. 그 동생이 얼마 전 저세상으로 갔어요.   기자 : 그러셨군요... .... 대평리에서 농사를 지으셨나요?    정복동 : 그럼요, 농사를 지으면 배급을 줘요. 친구는 콩깻묵을 받았는데, 나는 그걸 못 받아서 그땐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기자 : 콩깻묵이요?    정복동 : 네, 콩기름을 짜고 남은 게 콩깻묵인데 친구가 먹으라고 줘서 막상 먹어보면 아주 못 먹겠더라구요. 농사를 지어도 죄다 뺏어가니까 곡식을 감춰요. 죽담이라고 담장 뒤에 독을 묻고 거기에 곡식을 감춰요. 그러면 일본 앞잡이들이 쇠꼬챙이로 담벼락을 푹 쑤셔요. 그럼 흙담이 쑥 들어가거나 독에 묻지 않은 곡식이 쏟아져 나와요. 그럼 다 뺏어갔죠.    기자 : 콩이나 조, 수수 같은 곡식도 농사짓고 또 어떤 작물을 농사지으셨어요?    정복동 : 그때 왜정 때 목화를 심으래요. 목화를 심어서 공출을 해라 그래요. 그러고 나서 목화 나무껍데기를 삶아서 벗겨 바치면 돈 얼마 주고 그랬죠. 얼마나 일본에 들볶였는지 나는 해방이 되어야 시집가겠다 그랬어요. 해방이 안 되면 시집가지 않을 거다 그랬어요. 지금 이 집이 내가 시집온 곳이에요. 나는 진짜 말대로 해방되고 열아홉에 시집왔어요.    기자 : 애써 농사를 짓고서도 뺏길까봐 곡식을 숨기고, 정작 가족들이 배곯고 고단했는데 어떻게 인내하며 사셨는지 말씀해 주셔요.    정복동 : 어머니가 봄이 오면 칼나물을 논두렁에 가서 해와요. 나물을 넣고 밥을 비비면 어머니가 얼른 수저를 놓아요. 나 많이 먹으라고... (한참 있다가) 우리 어머니가 막내 낳을 적에 내가 쌀을 퍼서 몰래 바가지에 감추어 두었어요. 어머니 해산밥 해주려고.    기자 : 그 힘들고 배고팠던 때 어린나이에 참 철이 들었네요.    정복동 : 네, 어머니가 옷이 없어 날마다 행주치마를 빨아 입는 걸 보고 내가 시집가면 어머니 옷 한 벌 해드려야지 그랬어요. 손이 다 닳도록 일을 했죠. 다리방아 아시지? 보리를 다리방아로 찧어 마당에 말렸다 까불러 벗겨야 밥을 해먹어요. 그럼 손이 다 닳아요. 그때 어머니가 힘들까봐 안타까워서 내가 다 방앗간으로 날랐어요. 불을 화르륵 때면 방이 뜨뜻해야 하는데 서늘해지면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시집가면 우리 어머니 뜨뜻하게 살게 해드려야지.’    기자 : 어머니의 자식사랑이 극진하여 또 자녀들의 어머니 사랑도 애틋했나 봐요.   정복동 : 동생이 학교에 갈 때 어머니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생 모습이 모퉁이 뒤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서야 집에 돌아와 밥을 자셨어. 한 삼십분이 지나도록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서 계셨어. 대평리에는 과부 딸이랑 외딸(외동딸)만 학교에 다녔어요. 나도 얼마나 학교에 다니고 싶었는지 몰라요. 언니랑 나랑 그때 일본어를 배우면 내가 금세 깨우쳤어. 나를 공부 시켰으면 참 잘했을 거야. 그때 학교에는 못 다녀도 검은 양말(검은 스타킹)이 너무 신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짚새기(짚신)를 삼아 달라 그랬어. 설날에 명으로 지은 새옷을 입고 짚신을 곱게 삼아서 신고 나갔다 오니 양말 뒤꿈치가 다 구멍이 났어(말씀하시며 소녀처럼 까르르 웃으심^^)   기자 : 일본이 식량을 공출시키고 다른 노역도 시켰을 텐데 대평리에서는 어땠나요?   정복동 : 가마니를 치라고 배당을 줬어요. 우리는 농사를 짓는다고 100장이 분담이 돼요. 면에서는 밤에 일할까봐 조사가 나와요. 할머니가 들킬까봐 까만 치마를 두르고 빛이 새나가지 않게 일을 했어요. 언니하고 나하고 같이 하루 종일 일해도 가마니 세 짝밖에 못 짜요, 나는 매달린 채 배고픈 채로 일을 해요. 가마니를 다 짜면 아버지가 꿰어서 마무리를 지어요. 그럼 1등, 2등, 3등까지 차별적으로 돈을 줘요. 그걸 지고 대평리에서 지평에 가요. 그때는 차도 없어서 걸어서... ... 아버지가 불쌍해요. 우리 아버지 세 살 먹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우리 할머니가 과부로 아버지를 키우셨어. 할머니가 이천이 친정인데 잘 살아서 아버지에게 돈을 줘서 대평리에 땅을 샀지.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일만 하니까 농사짓는 거밖에 모르셨지.   기자 ; 정복동 어르신의 일제 강점기 살아온 얘기를 듣다 보니 가족에 대한 안쓰러움과 애틋함,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 느껴져요. 지금도 참 고우시고 건강해 보이셔요.   정복동 : 아유 나는 기운이 없어요 이제. 아유 내 정신좀 봐. 차를 드린다 해놓구선.    정복동 어르신이 준비해 주신 구수한 차를 마시고 귤도 하나 까먹고, 또 손바닥에 쥐어준 커피사탕도 받아 계단을 내려오며 과거와 현재가 정복동 어르신 내면에서 생명력 있게 작동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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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만세100주년
    2019-02-11
  • 3.1운동 100주년기념 인터뷰
    대한민국 역사상 짧지 않은 기간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그 시대를 살아낸 분들이 점차 귀해지는 시점에 2019년 3.1만세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양평토박이신문사에서는 양평지역내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갖고자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김옥순 :1931년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에서 태어나 서울(마포, 답십리)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여주와 양평지역에서 70여년 거주, 현재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 구둔역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옥순이는 참 이뻐, 언제 이렇게 언문을 배웠어?'' 이러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더라구요. 그게 얼마나 애절한 마음을 나타낸 거에요. 뭐 나를 봐서 눈물이 났겠어요. 어쩌다 한국사람이 한글도 마음대로 못 가르치고 속국이 되어 이러나 하는 마음에서였겠지요.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나도 눈물이 나요.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기자 : 일제강점기에 유년시절을 보내셨는데 기억나는 구체적 경험을 말씀해주시겠어요?   김옥순 : 제가 그때 아홉 살인지 열 살인지 좀 늦게 학교에 들어갔어요. 왕십리에 있는 배명소학교였어요. 지금은 배명중고등학교가 되었지요. 답십리에서 살았고 교통편이 별로 없던 때라서 왕십리까지 걸어다녔죠. 그때 고무밴드 공장이 있었던지 먼지구덩이, 쓰레기장 같은 곳을 지나 다녔어요. 그 길이 지름길이었거든요. 학교 가는 길에 고무밴드를 주워 손목에 걸고 다녔어요. 그 이후 전철이 다녀서 학교에 가려고 전철역에 줄을 섰어요. 그 당시 일본아이들은 짧은 주름치마를 입고 스타킹을 신고 테두리가 있는 아주 예쁜 까만 구두를 신고 단발머리에 가방을 딱 메고 다녔죠. 우리 조선아이들은, 그때는 조선이라고 했어요, 긴 검정치마에 자주저고리, 머리도 부성하고 보자기에 책을 메고 다녔죠. 우리가 먼저 와서 줄을 서잖아요. 그러면 일본 아이들은 나중에 와도 구두 신은 발로 여기를 차요(발목과 무릎 사이 정강이를 가리키며) 그럼 아주 아프지 그냥... 여기를 팍 차며 ‘’아따야로‘’하면 막 울면서 뒤로 갔죠. 어린 나이에도 울면서 생각했죠. ‘ 왜 우리가 일본아이들이랑 같이 살아서 이럴까’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걸 표현을 못했어요.   기자 : 그런 일이 있을 때 대응하거나 방어하는 한국 학생들은 없었나요?   김옥순 : 아니요. 아무도 그러지 못했어요. 맞고 울면서 길을 비켜주고 뒤로 가 줄을 섰어요. 속으로 억울하고 아파서 울어도 그렇게 할 줄을 몰랐어요.   기자 : 학교에서는 주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말을 했죠, 학교에서의 기억을 나눠주시겠어요?   김옥순 : 저는 외할아버지가 한문도 가르쳐주고 언문도 가르쳐줬어요. 그때는 한글을 언문이라 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한글을 깨치고 학교에 들어갔어요. 한번은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아주 어머니 같은 분이셨어요. (잠시 회상하듯이) 아주 인자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 . 그분이 애국자에요. 그때 한국말을 하면 막 혼이 났어요. 일본말을 잘 못해도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한글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어요. 어느 날 나를 불러내더니 ‘’옥순이는 참 이뻐. 언제 이렇게 언문을 배웠어?‘’이러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더라구요. 그게 얼마나 애절한 마음을 나타낸 거에요. 뭐 나를 봐서 눈물이 났겠어요, 어쩌다 한국 사람이 한글도 마음대로 못 가르치고 속국이 되어 이러나 하는 마음에서 그러셨겠죠.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나도 눈물이 나요.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기자 : 그 마음이 언제쯤 헤아려지던가요?   김옥순 : 애들 키우고 애들 학교 다닐 때는 몰랐어요. 애들 다 커서 내 곁을 떠나고 혼자 있을 때 문들 그 생각이 났어요.   기자 : 학교 분위기는 어땠나요, 혹시 일본인이 감시하거나 그런 일도 있었나요?   김옥순 : 배명소학교에서 여주로 이사와 북내에 있는 학교에 다녔어요. 시골이라 그런지 일본인이 감시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일본말을 잘 하면 사쿠라 뱃지를 하나씩 달아줬어요. 벚꽃이 일본 나무라는 말이 있어요. 되지도 않는 일본말을 열심히 배우려고 기를 쓰고 그랬죠. 누군가 조선말을 사용하면 서로가 ‘’얘 조선말 쓴대요.‘’ ‘’얘 조선말 썼어요.‘’서로가 그랬어요. 지금 같으면 안 그러지. 서로 숨겨주고 가려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기자 : 한참 성장기에 음식도 귀했을텐데 먹거리는 어땠나요?   김옥순 : 땅을 좀 사서 농사짓는데 벼농사를 지으면 다 뺏어갔죠. 밭작물도 맘대로 못 심었어요. 목화를 심어야 했어요. 전쟁의 막판으로 치달을 때였죠. 놋숟가락, 놋그릇까지 다 가져가고 농작물도 모조리 공출했어요. 학교 다니며 공부도 거의 못하고 모심고 풀베고 주로 일을 했지요. 먹을게 없어서 많이 주렸어요. 쑥을 캐다가 쌀을 요만큼(손바닥을 오므려 보이시며) 넣고 쑥을 많이 넣어 쑥밥을 해요. 이게 목에 걸려 넘어가질 않아서 토하곤 했죠. 감자를 심으면 감자가 클새가 없어요. 학교 갔다와 배가 고프니까 감자가 클새도 없이 캐어먹었죠. 배 많이 곯았어요. 여기(여주) 내려와서요.   기자 : 그럼 소학교 이전 더 어린 시기는 어디에서 보내셨나요?   김옥순 : 어려서는 함경북도 두만강 근처에서 살았어요. 거기에서 태어났어요. 일정 때 먹고 살기 힘들 때 만주 어디를 가면 땅도 거저 얻고 농사도 맘대로 짓고 산다고 했죠. 그 당시 양반들은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막노동은 꺼려했어요.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와 동네 청년이었던 아버지를 데리고 거기로 갔죠. 두만강 무산 삼장(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이란 곳에서 비단장사를 했어요. 어릴 때 기억이 생생해요. 가게를 아주 크게 차리고 각종 잡화가 많았죠. 두만강이 겨우내 얼었다 녹으면 집채만한 얼음이 위에서부터 엉켜서 내려와요. 강가에 있던 가게까지 얼음덩어리가 넘쳐서 가게 물건이 다 쓸려간 일도 있었어요. 외할아버지는 거기서 돌아가시고 이모는 두만강 근처 다리를 건너 중국으로 넘어가 아주 그쪽 사람이 되버렸죠. 지금도 두만강 그 푸르던 물이 기억에 생생해요.   기자 :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마포에서 잠시 살다가 답십리를 거쳐 여주까지 오신 거네요. 그리고 지금은 양평에 살고 계시구요.   김옥순 : 그렇지요. 두만강에서 가게가 몇 차례 떠내려온 얼음덩어리에 피해를 입고 마포로 왔던 거에요. 가게서 번 돈으로 집을 두 채 샀어요. 길가에 있던 집이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다 비키라고 하는 바람에 답십리로 갔어요. 그리고 여주로 와서 가장 고생이 심했죠. ‘일본 순사’라고 들어봤지요? 기다란 칼을 허리춤에 차고 무릎까지 오는 신발을 신었는데 걸으면 저벅저벅, 칼이 덜컹덜컹 소리가 나요. 저기만 오명 아이들이 ‘’얘 순사 온다‘’ 소리쳐요. 그러면 얼른 뛰어가 숨어요. 길을 가다 경찰서를 지나다 보면 기다란 막대기로 한국 사람들을 때리는 것도 봤어요. 우리 시대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에 이어 식민치하와 전쟁으로 고생이 많았어요.   기자 : 그 어렵고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에도 훈훈한 추억담이 있으시죠?   김옥순 : 그럼요, 주암에서 북내 학교까지 가려면 몇 십리는 족히 될 거에요. 아버지가 짚새기(짚신)를 삼아주면 그게 하루를 못가요. 게다(나막신)는 어찌나 발이 아프고 무거운지 몰라요. 나무 조각에 못 박아 놓으면 얼마 안 되어 끈이 다 벗겨져요. 불편하고 발 아파서 밤낮 벗어들고 맨발로 다녔죠. 그래서 내가 건강한 거 같아요. 어쩔 때는 달 보고 나가 해지고 깜깜해서 들어왔어요. 학교가는 길에 언덕을 지나며 ‘’우우~~‘’ 하고 신호를 보내면 ‘’우우~~~‘’ 하고 친구가 화답을 해요. 그러면 만나서 같이 학교에 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밤나무에 올라가 밤을 따먹고 놀았죠. 그 먼 길을 고생으로 안 알고 재미로 알았어요.‘’   기자 : 해방의 기쁨은 어떻게 누리셨는지 들려주세요.   김옥순 : 3학년 때 해방이 됐을 거에요.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인제 너희들 모도 안 심고 호미도 버리고 낫도 다 버려라. 해방이 되었다.‘’ 그러시죠. ‘’해방이 뭐에요?‘’ 그러자 ‘’일본놈들이 전쟁에 져서 다 쫓겨가 우리 이제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거야.‘’모두들 ‘’야 좋다 해방이다‘’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질렀어요. 내가 그때 열세 살인가 열네 살 때였어요.‘’   김은주 earlyhummi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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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만세100주년
    2019-01-21
  •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2)- 그래서 선거법개정이 필요해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2)- 그래서 선거법개정이 필요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란? 정당 지지율만큼 국회의원이 생긴다. 예를들어 국회의원이 300명일 때 한 정당이 3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면, 연동형 비례대표 국회의원 9명이 배출되는 방식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금처럼 노동자가 죽어가는 노동조건을 진정으로 노동자 편에서 대변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지난 6.13 지방선거도 있었지만, 군수든 군의원이든 한 명에게 표를 몰아줘야 된다는 “고민”이 있고, 실제로 연대를 하면 표가 분리되지 않고 당선될 확률이 높아진다. 야당이 둘로 나뉘어서 졌다는 말이 나온다거나, 삼자구도가 여당에세 유리하다는 분석이 당연했던 이유이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적용되면- 각 당에서 골고루 국회의원이 배출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소수정당인 야3당이 적극적이다. 국회의원을 300명으로 놓고, 3퍼센트면 9명, 5퍼센트면 15명, 10퍼센트면 30명의 국회의원이 비례로 되는 것이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 것이다.   승자독식 지금의 선거제도는 아무래도 1등이냐, 꽝이냐는 방식의 독점구도이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적용하면, 내가 찍은 사람이 1위 후보가 아니어도 한 표, 한 표가 유의미하다. 그야말로 소중한 한 표가 말이 아니라 현실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될 놈 찍는다거나, 하나로 밀어야지 갈라지면 죽는다거나, 그래서 결국은 양당구조가 되고 정치적 다양성이 사라져서 국민의 고충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무능국회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것이라 하겠다.   상상 이상의 연대 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막아보자는 것인지 민주당과 자한당이 손을 잡은 모양이다. 그걸 막자고 정의당 이정미 대표와 바른정당 손학규 대표가 국회에서 단식을 하고 있다. 벌써 일주일인지, 9일 정도 됐다. 손학규 대표는 소신을 위해 죽어도 좋다는 강력한 표현도 서슴치 않았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인데, 손학규 대표는- 촛불로 일어선 민주당이 촛불로 망한 자한당과 손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더민주당의 대선 공약이었다. 민주당이 집권을 한 이후에 말을 바꾼다는 비난을 면치 못 할 것으로 보인다.   양평에도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지지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런데 그냥 검은 것은 글자인 듯 내 삶과 연결되는 지점 없이 바람에 나부끼는 듯하다. 하지만 잠깐만 생각해보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되면 양평군에도 비례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양대정당에 이어 지지율이 5-10퍼센트 사이를 오가는 정의당의 경우,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된다면 15명에서 30명 이내의 비례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은 양평에 국한해서 생각해도 적지 않은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불러올 수 있다. 양평에만 국한해서 생각해도 진보 대 보수라는 양대구도가 훅- 무너지고? 무조건 큰 정당은 살고, 작은 정당은 맥을 못 추는 경향도 희박해질 것으로 보인다. 즉, 다양성이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양하면 그 중에는 노동자가 노예가 아님을 법으로 보여주거나, 농민을 국가의 근간으로 보고 농민에게 정당한- 독일처럼 년 2000만 원 이상- 연봉을 지불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회의원도 나올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일 하다 죽는 나라, 더는 볼 수 없다면- 휘날리는 현수막 속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가슴으로 받았으면 좋겠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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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5
  •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1)- 누구를 위한, 누구의 나라일까?
    칼럼. 일 하다 죽는 나라(1)- 누구를 위한, 누구의 나라일까?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일 하다 죽는다. 일 년이면 백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일 하다 죽는다. 이들은 대부분 통계에도 적용되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다. 그런 가운데 한 청년노동자의 죽음이 통계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그림자의 실체는 바로 ‘당신’의 아들이다. 어머니도 모르는 참혹한 노동 조건 속에서 당신의 아이들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의 참혹한 죽음- 입사 두 달 만에 숨진 청년노동자 김용규 씨는 24세이다. 김용규 씨는 사망했지만, 그리고 이미 여러 명의 서부발전 소속 노동자들이 일하다 죽었지만- 정작 태안화력발전소는 정부로부터 무재해 사업장으로 인정받고 산재보험료 20여 억 원을 감면받았다. 김용규 씨가 태안화력발전소 소속이 아니라 외주업체인 서부발전 소속이기 때문이다.   외주화는 민영화의 산물이다. 서구의 파트타임을 흉내 내서 비정규직이라는 실로 기상천외한 노동자 학대를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그보다 한 수 위인 외주화에 이르렀다. 그런 것이 아니어도 이미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급여는 박하기 그지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은 “아래것”들에게 시키면서 박한 처우와 고용불안을 강요하는 신분제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를 보는 듯한, 일제 강점기를 보는 듯한, 아니면 군부독재시절을 보는 듯한, 통칭 보수정권시절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전체에서 10퍼센트만 벗어나면 다들 형편은 비슷하다. 10퍼센트가 우리 재화의 90퍼센트를 쥐고 있다는 통계들이 있다. 100명 중 90명의 사람들은 100개의 재화 중 단 10여개만으로 나눠야 한다. 이런 이상한 상황은 이미 민란이 일어나고도 넘어야 하는 통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못살겠다고 일어난 민란은 정치권력의 교체만 가져왔을 뿐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역대 어느 정권도 바로 이런 신분제 같은 노동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이런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가진자들과 권력이 절대로 소득을 나누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박정희가 선성장, 후분배를 구호처럼 외쳤지만- 이미 세계경재 10대국이라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선성장 중이다.   앞으로도 후분배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귀족, 사대부와 양반층이 굳이 노비를 해방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역사적으로 놀랍게도 양반층이랄 수 있는 사회 지도층이 신분을 내려놓은 사례는 있다. 그것이 바로 3.1 만세를 폭발력 있는 대중운동으로 확산한 물밑정서라고 생각한다. 임시정부 헌법이 말하듯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3.1만세 정신을 모르고 있다. “우리”가 권력의 주체라는 것을 모르고, 아직도 신분제가 사라진 줄 모르고 있는 귀족 양반 사대부들한테 90퍼센트를 상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노예처럼.   자신이 주인인 걸 모르는데, 누가 주인대접을 해주겠는가? 그러니 선성장은 있어도 후분배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월급이 신분인 대한민국에서 대부분 월 200만원 이하의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은 주인인지, 아닌지를 따질 시간도 없이 살고 있다. 그리고, 내 자식이 그보다는 더 많이 받는다고 딱히 좋아할 일도 아니다. 대부분의 하급직들은 여전히 상전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 돈 주는 사람은 규모에 상관없이 귀족이고자 한다.   어쨌거나 사람이 일을 하다가 죽고 있다. 해마다 150명 안팎이다.- 일 하다 죽는 나라, 대한민국. 사회적 통계 상 90퍼센트의 국민이 그런 삶을 강요받고 있다고 해도 허언이 아닐진대,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누구의 나라라는 것일까?   조선만 해도 양반은 노비를 때리고, 가두고, 죽일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법으로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사용자들은 노동자 노비들을 일 하다가 죽게 만들고 있다. 일 하다 죽는 노동자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은 여전히 신분제사회일 뿐, 민주주의도 민주공화국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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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5
  • 칼럼, 은혜재단으로 본 양평군수의 개혁 의지
          은혜재단 김종인 재단이사장 측이 재판에서 잇달아 승소하면서 결과가 정의로울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4일 여주지원의 최문경 이사장 직무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지면서- 양평군과의 원만한 해결의 근거로 작동될 것으로 보인다.   양평군은 김종인 측의 잇단 승소에도 불구하고, 3심까지 가야한다는 입장이 주류였다. 하지만, 지난 정권 행정갑질에 진저리를 치는 군민들에게 또다시 1년여의 세월을 감내하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요구일 테고, 결과적으로 새 군수에게 매우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은혜재단 건은 재판 판결문에서도 드러났듯이 부패한 최모 재단 측과 양평군 담당 공무원들의 합작품이라고 하겠다. 재단 내부에서 소송이 진행되는 사안에 군이 개입하면서 기만적으로 김종인 이사장 측을 거꾸러뜨린 사건이다.   지난 정권에서는 상식적인 공적 행위였을지 모르지만, 새정권에서도 잇단 승소에도 불구하고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너무도 명백하게 양평군 공무원의 갑질이 재판에서 드러났음에도 1심으로는 불가하다는 양평군의 태도에 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하여 일부 정당에서도 술렁이던 3일 오전이었다. 이미 동일 사안에 대한 대법 판결에서 승소한 터였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4일, 최모 재단이사장의 직무정지 판결이 나면서 정상화로 가닥이 잡힐 것 같다.   어쨌든, 은혜재단의 정상화가 이루어지고, 정의로운 결과로 귀결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바로 이 모든 사태를 불러온 갑질행정의 주범들이 3일까지도 반성모드가 아니라, 여전히 갑질모드였다는 점이다.   양평군 공무원들은 행정처리를 할 때, 사안의 경중보다는 인맥의 유무 및 관계의 정도를 먼저 따지는데, 지난 10여년간 길들여지고, 이제는 거의 체질화되어 있다. 그들은 군수의 복심과 오더에 거의 바람보다 먼저 눞는다. 자동사인지, 타동사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그래서 더욱 의문이다. 양평군 공무원들이 부패한 재단 측과 거의 운명 동일체처럼 재단 내부의 소송 중에도 개입한 것은 과거라고 하겠으나 이제 시절이 달라졌음에도 계속해서 갑질모드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현역 공무원이 국가를 대상으로 80억에 가까운 사기를 치고, 여러 부서에서 거의 사기와 위조로 재판을 받는 공무원들이 즐비한 양평군이다. 돈 먹는 하마라는 양평공사나 여러 부패의 흔적들이 공공연한 양평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갑질모드를 버리지 않는 공무원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양평군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여전할까? 지난 정권에서 너무 오랜 기간 지친 군민들은 이제나 저제나 양평군수의 개혁의지를 기다리고 있다. 정동균 양평군수는 이미 지쳐있는 군민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행정갑질이 대표 적폐인 양평군에서 군수가 군민의 지지를 얻는 방법론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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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5
  • [칼럼] 폭염, 재해로부터 양평군은 무엇을 할 것인가?
      111년만의 더위가 찾아왔고,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곧 아열대기후권에 들어갈 전망이라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으로 온열환자가 발생하고, 죽음으로도 이어졌다. 정부는 물론이고, 각 지자체도 이런 기후변화에 따른 행정지원이나 사업방향성 제고가 시급한 것으로 판단된다.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은 비 한 방울 없이 이십여 일 계속됐는데, 이런 기후변화의 주요인은 지구온난화라고 한다. 북극권을 중심으로 고산지대의 얼음이 녹아버린 것이 햇빛반사와 제트기류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우리나라를 포함한 지구의 극지방을 제외한 중간지대에 열대 돔현상을 만들고 있다. 더운기류가 정체되어 있는 우리나라는 태풍마저 빗겨가면서 그야말로 불가마 찜통더위를 겪었다.   우리나라는 동남아시아보다도 덥다는 여름을 맞으면서 채소값이 폭등하고, 과일이 햇빛에 그을려 떨어지는 등 농산물에도 많은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곧 다가올 추석에는 식물이 모든 성장을  멈추었다는 폭염의 피해가 그대로 물가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농업인구가 많은 양평에서도 이런 폭염에 대비한 농산물 생산과 종목 및 기타 제반 여건에 대한 재정비가 절실하다는 점이다. 한편, 줄어들고 있는 벼농사 및 수생산업에 대한 긍정적인 요인도 검토하여 농업관련사업을 조정할 필요가 보인다. 또한 이러한 기후변화는 도심의 열섬현상을 낮추기 위한 노력도 요구되고 있다. 도심에 그늘을 만들 수 있는 가로수 식재나 도심숲조성, 또는 물을 활용하여 도심의 달궈진 기온을 낮추는 노력도 필수사항으로 보인다. 하다못해 염천에 시내 도로에 재활용되는 물이라도 뿌려주는 성의가 여름 집행부의 매뉴얼에 포함되는 일도 기후 변화에 따른 군민을 배려하는 행정이라고 하겠다. 정부는 기록적인 폭염으로 인한 가정 전기료 누진률을 낮추는 등 국민들이 더위를 피해 냉방시설을 이용하는 문제를 자연재해에 대한 국민의 복지문제로 해석했다. 또한 서울시는 아파트 경비실에 에어컨을 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태양광을 설치해주고 있다. 지역에서도 군민이 폭염의 재난에서 기본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행정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그밖에도 행정 전반에 걸쳐 변화하는 기후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서 다른 어느 시군보다 기후변화에 앞서 가는 양평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측면에서 개별 사안이지만, 양평 물축제는 특히 이대로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의 고장 양평에서 폭염과 여름, 그리고 물이라는 조건들은 어떻게 활용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축제준비관계자들이나 도리상 예의상 참가한 사람들이나 준비하다 더위에 죽을 지경이라는 말이 나왔다. 물은 관정에서 1년에 한 번 퍼올린 지하수고, 지역주민에겐 1회적인 축제일 뿐이고, 자신의 삶과 생활과 경제와 소득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1억씩 더위 먹어가며 축제 진행하고, 좋은 소리 듣기 힘들고, 마을 사람들의 참여도도 더위로 인해서 뚝 떨어진 상황에서 양평군은 물축제의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일이야 말로 공론화가 필요한 일인 것 같다. 어느 축제를 가든 장소만 다를 뿐 대동소이다. 이런 경향성에서 벗어나려면 안목과 헌신이 요구된다. 물전문가이자 소통에도 특허 준비 중인 현 집행부 리더의 면모가 내년 물축제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군민들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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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18
  • 6.13 승리, 정동균 양평군수 당선자에게 바란다
          6월 18일, 언론 보도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여당이 압승을 거둔 6.13 지방선거와 관련하여 “우리가 받았던 높은 지지는 굉장히 두려운 것이며, 어개가 많이 무거워졌다는 정도가 아니라 등골이 서늘해지는,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정도의 두려움”이라고 말했다. “지지에 답하지 못하면 기대는 금새 실망으로 바뀔 수 있다.”고 했다.   문재인대통령은 “지역, 색깔론으로 국민을 편 가르는 정치는 계속될 수 없게 됐다”고 선거 결과에 의미를 두면서도 지방권력을 상대로 한 감찰계획을 보고받았다. 검찰, 경찰도 감찰 대상에 포함된다.   양평의 선거 결과도 놀라웠다. 민주당이 군수, 도의원3명(비례 1명 포함), 군의원(2명)이 당선됐다. 정동균 양평군수 당선자를 비롯하여 더불어민주당 당선자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등골이 서늘하게 두려운 일”이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양평군민은 그동안 공무원군수의 행정갑질에 원망이 높았다. 집행부는 위탁사업체에 갑질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같은 공무원 중에서도 원칙을 지키는 공무원을 좌천시키는 일도 허다했다. 공무원사회조차 내편 네편으로 가르고 갑질을 해댔던 정권의 몰락은 군민의 기쁨이다.   이제, 새롭게 탄생한 더불어민주당 정동균 당선자의 양평은 억울했던 군민과 좌천당한 공무원과 이유도 안 되게 밀려났던 사업체들의 손을 들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야말로 정의가 바로 서는 양평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양평은 사전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앞섰지만 본 선거에서는 뒤졌다. 판을 뒤집은 것은 관외투표였다. 또한, 양평군민들의 시선 밖에 있던 도의원은 예상을 뒤엎고 모두 이겼지만, 군의회는 여소야대 국면을 맞게 되었다. 지난번과 동일하게 민주당 의원은 2명뿐이다.   더군다나 정동균 당선자는 행정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고, 여소야대 국면에서 해내야 할 일들은 산적해 있다. 선거전에서 통합의 정치를 외쳤던 만큼 협치의 정신이 절실할 것이다. 또한, 행정경험이 없는 만큼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일하는 공무원들과는 믿음과 신뢰로 군정을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정동균 양평군수 당선자가 성공적으로 군수직을 수행하는데 가장 절대적인 요소 중 하나는 – 공무원과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행정갑질을 했던 계보인지, 원칙과 소신을 지켰던 소신파인지를 정확히 가리고, 일벌백계로 삼을 일과 함께 손을 잡고 군민을 위해 봉사할 공무원을 알아봐주고 대우해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는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 벌을 받고, 벌을 받아야 할 자가 상을 받는 일이 많았다. 바로 이런 점을 정동균 양평군수 당선자가 교훈으로 삼아 군정에 임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1천여 명 조직을 이끌어갈 수장의 역할이 결코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만만치 않은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군민이 편안하다. 정동균 당선자가 소신파 공무원들에게 함께 이해볼만한 군수라는 평가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으면 한다.   다시 문재인 대통령의 심중을 헤아려본다. 6.13 지방선거 민주당 대승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문재인 바람”이라고 본다. 특히, 양평은 그렇다고 보여진다. 이 지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등골이 서늘하다”는 표현과 “감찰계획보고”를 받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으로 인해 얻어진 결과에 대해 국민이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준 것 같다. 적폐청산과 평화시대에 어느 정도 성과를 낸 정부는 이제 지방정권에도 시선을 주고 있다.  
    • 칼럼
    2018-06-19
  • 칼럼. 기자수첩 “평화의 시대”- 몽양 여운형과 양평 패싱
    지난 2012년도부터만 보더라도 행정의 달인이라는 군수 아래서 양평군민이 흘린 눈물은 동이로도 부족할 판이다.         군민의 눈물을 부르는 행정 얼마 전에 용문에 사행성 경마장을 지역주민도 모르게 들여오려고 했던 것을 비롯하여, 지금도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은혜재단과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몽양기념관 사태도 있다. 이밖에도 SNS 상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00캠핑장도 있고, 잊혀진 것처럼 보이는 환경미화원 100일 투쟁도 있다. 그래도 거론이 되는 것은 그나마 무언가 저항의 몸짓을 했다는 것이고, 밖으로는 아무 말도 못하는 답답함을 지닌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 중에서 몽양기념관 사태는 역사적이고, 전국적인 인물에 대한 문제이기에 더욱 특이한 경우라고 하겠다.   몽양의 부활 예측 ‘평화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남북정상이 만났고, 이제 곧 북미정상도 만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종전협정 가능성까지 나오고 있다. 한반도에 평화가 오면, 역사적 인물 가운데 가장 주목받을만한 사람이 있다. 바로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몽양 선생의 고향이 양평인 만큼, 몽양의 부활은 양평의 위상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양평이 평화를 상징하는 도시가 될 기회에 관해서는- 수년 전부터 양평의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고갔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3.1운동 100주년이 도래하고, 임시정부와 헌법이 주목받는 상황이 오면- 반드시 몽양 여운형 선생이 부활할 것이라고들 예측했다. 이제는 거기에 예상보다 빠르게 남북과 북미 정상이 만나는 상황까지 겹쳐졌다.   양평군의 갑질행정 그런데 마치 이런 예측에 찬물이라도 끼얹듯이 양평군은 몽양기념관에서 몽양기념사업회를 내몰고, 직영으로 전환했다. 양평군의 직영 전환을 위한 노력(?)은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악착같고. 치밀하고. 지속적이었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소름이 돋는다.   양평군과 몽양기념사업회와의 갈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생산됐지만, 출발점은 양평군 담당자의 사업제안에 대한 몽양기념사업회 측의 ‘거부’였다고 알고 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양평군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람이 함께 하기 어려운 축면이 있다. 이때부터 행정갑질이 도를 넘기 시작하고, 해마다 계약연장을 위해 안간힘을 쓰게 만들더니, 결국은 양평군 뜻대로 기념관에서 몰아냈다.   양평 패싱 평화시대가 열리고, 몽양 여운형 선생이 주목받으면- 덕분에 양평은 위상이 따라 오르는 게 아니라 몽양을 쫓아낸 고향으로 기억될 것만 같다. 몽양 수혜를 누리기는커녕 양평패싱 현상이 생길 전망이다.   몽양의 부활을 예측했기에 더더욱 몽양기념사업회가 내몰리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동안 양평군은 몽양기념관 직영을 통해 어떤 사업을 해냈는지 모르겠지만, 사업회 측은 질적 변화를 위해 노력했고 지금은 현역 국회의원만 14명이 이사로 선임됐다.   양평군이 계속해서 몽니를 부리면, 사업회 측도 손을 놓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양평 패싱의 시작이다. 양평 버리고, 서울로 가면 된다. 서울에도 몽양관련지역이 많고, 워낙 전국적인 인물이어서 사실은 지역 따질 필요도 없다.   양평군이 예산 2억 좀 넘는 기념관을 그렇게 차지하려고 한 까닭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양평군 공무원들 덕분에 “평화시대”의 “양평”은 졸지에 “몽양을 몰아낸 고향”이 될 처지가 되었다.   여야 정치인들의 민낯 2014년부터 지금까지 몽양기념관 사태로 많은 이들을 만났다. 그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정치인들이 그대로 자기 민낯을 공개한 시간들이었다.   그 많은 정치인 중에 단 한 사람만이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받아주었다. 피켓을 든 적도, 앞에 나선적도 없지만- 공정한 자세로 몽양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동의했다. 양평에 그런 정치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이 인터뷰를 하면서도 굉장히 위로가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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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8-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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